031: 원자력 통제 정책 연구자, 박성윤

Feminist in STEM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 031: 원자력 통제 정책 연구자 박성윤

2020년 6월 4일,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박성윤 연구원을 만났다. 그는 KAIST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STP)에서 석사를 마친 뒤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에서 국제협력, 정책 업무를 하고 있다.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페미니스트임을 밝혔다는 박성윤 연구원. 그에게 원자력 통제 정책이란 무엇인지, 그가 원자력 정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그리고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업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들어보고자 한다.

인터뷰어인 〈페미회로〉의 우연, 위선희는 ‘회로’로, 인터뷰이 박성윤 님은 ‘성윤’으로 표기했다. 교정은 〈페미회로〉의 선희, 발행은 〈페미회로〉의 배현주, 우연(이상 가나다순)이 맡았다.

회로: 안녕하세요, 박성윤 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성윤: 안녕하세요, 박성윤이라고 합니다. 카이스트 물리학과에서 학부를 마쳤고,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서 석사를 받았습니다. 현재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KINAC; Korea Institute of Nuclear Nonproliferation And Control) 대외협력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이 박성윤 님 (사진: 박성윤 제공)

진로와 전공

회로: 진로가 계속 바뀌었네요. 물리학과에서 과학기술정책대학원으로 진학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전공을 바꾼 이유와 그 과정을 듣고 싶어요.

성윤: 세대 별로 본인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회적 사건들이 있어요. 최근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충격적인 사건이듯, 저에게는 3.11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제 삶의 전환점이었어요.

사람들은 과학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과학기술로 얼마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남들이 못하는 걸 빨리 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아요. 저도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엘리트 과학자로 성장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3.11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과학기술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민하게 됐어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그 사고로 인해서 고통 받았고 아직도 받고 있잖아요. 그래서 학부 때 졸업 연구(URP*)로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소속 교수님께 지도를 받아 원전 지역주민들의 후쿠시마 사고 전후 인식 조사를 했었어요.

(*)3.11 후쿠시마 사고: 2011년 3월 11일,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으로 인해 JMA 진도 7, 규모 9.0의 지진과 해일(쓰나미)로 도쿄전력이 운영하는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 1~4호기에서 발생한 사고.

(**)URP: Undergraduate Research Program, KAIST에서 학부생을 대상으로 소정의 연구비를 제공하며 학부생 스스로가 원하는 주제를 제안해 주도적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제도.

회로: 성윤 님은 물리학과에 속했는데 과학정책기술대학원 교수님이 URP 지도를 해주셨네요? URP 이후에는 어떤 활동을 하면서 대학원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나요?

성윤: 네,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담당 교수님께서 흔쾌히 지도를 해주셨어요. 그때 원전 주변 지역주민의 후쿠시마 사고에 대한 인식을 인터뷰 했어요. 그렇게 논문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전공이 바뀌게 된 것 같아요. 관심사가 바뀐 거죠. 그 이후로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이 운영하던 에너지 정책 싱크탱크인 Green Korea 21에서 인턴십을 했었고,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가 개최되던 시기 아산정책연구원의 대학생 교육 프로그램인 아산서원에서 인문학적인 공부를 한 뒤에 미국에 있는 싱크탱크인 CNI (Center for the National Interest)에서 인턴십을 하면서 물리학보다 과학기술정책 쪽이 더 적성에 맞겠다는 확신이 든 것 같아요. 이 분야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게 더 많을 거라 생각해서 큰 고민 없이 과학기술정책대학원으로 진학했습니다.

회로: 아산서원에서 했던 연구도 원자력 인식 연구와 연관이 있나요?

성윤: 제가 아산서원에 들어갔을 때 동기 중에 원자력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원자력 관련 인턴십에 지원자가 몰렸어요. 그래서 저는 동아시아 지역 에너지 정책과 관련한 부서에서 인턴십을 수행했습니다. 중국의 미세먼지 관련 규제 체제를 분석하거나 중국 내 에너지 비율 등 자료 조사를 수행했어요.

회로: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서는 원자력 정책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으셨네요. 어떤 연구를 하셨는지 설명 해주세요.

성윤: 대학원은 처음부터 원자력 정책을 연구하려는 목적으로 입학했어요. 학부 때 한 연구를 심화시키고 싶었죠. 안전과 대중 인식의 관점에서 원자력 정책을 더 연구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대학원 입학 후 전 원자력연구소 소장이셨던 고 한필수 선생님을 인터뷰하고 회고록을 쓰는 일을 지원하면서, 원자력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생각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원자력을 배우고, 연구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원자력 안전에 관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인식 격차 연구는 많이 이루어졌는데, 비확산과 통제 등 다른 원자력 이슈에 대한 전문가의 인식은 연구가 많이 안 됐거든요.

회로: 그러면 ‘핵비확산’을 연구하신 건가요?

성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핵비확산 주제를 유의 깊게 보다가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 2004년 미신고 핵물질 실험 사건을 접했어요. 우리나라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더욱 강화된 안전조치 접근법인 추가의정서를 도입할 당시에, 우리나라의 핵활동에 관해 확대된 정보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과거 허가받지 않은 농축도의 핵물질을 사용한 실험을 진행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논란이 되었던 사건이에요. 이 사건을 연구하면 우리나라 핵비확산 인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국내에서 핵비확산을 잘 이행하기 위한 제도와 인프라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연구 주제가 괜찮다는 지도교수님의 조언도 있었고요.

성윤 님의 졸업 논문 초록.

회로: 인터뷰를 하기 전에 성윤 님의 논문을 읽어보았어요. 논문에 ‘핵 투명성’이라는 용어가 주로 등장하던데요, 구체적으로 ‘핵 투명성’은 무엇을 지칭하나요?

성윤: 핵 투명성(Transparency)과 정보의 개방(Openness) 정도가 다른 개념이라는 게 제 논문의 핵심이에요. 사람들이 두 개념을 혼동하고 종종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핵 투명성은 정보 개방 그 자체보다 좀더 정치적이고 정책적인 용어입니다. ‘얼마나 투명해야 국제기구에서 요구하는 대로 투명한가’라는 질문을 물었을 때, 단순히 정보에 대한 접근 권한을 많이 주는 것이 핵 투명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보다는 어떤 나라의 핵 비확산 의지와 역량에 관한 종합적인 신뢰를 뜻합니다.

그래서 저는 ‘핵 투명성’이 기구, 제도, 정책 등을 통해 우리나라에 어떻게 이식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 사례 연구로서 2004년 전후로 대한민국이 정치적 선언 등을 통해 투명성에 관한 의지를 천명하고, 독립적인 원자력 통제 기관과 그 기관을 컨트롤할 수 있는 정부 부처를 설립하고, 핵 비확산 이행 전문성을 쌓아 나갔는지 서술했습니다.

회로: 그렇군요. 핵 투명성 개념을 좀 더 설명해주세요. 그럼 정보 개방과 투명성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나요?

성윤: 개방 정도는 단순히 정보를 얼마만큼 공개할 건지 그 척도를 얘기하는 거예요. 정보의 양이나 질에 관한 건 절대적으로 평가가 가능한 영역이니까요. 그런데 투명성은 정보를 주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받는 사람의 평가가 내포된 용어에요. 정보를 받는 사람의 선입견이나 신뢰도 등이 포함된 개념이죠. 즉 핵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보를 많이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보를 어떻게 생산하고 보여줄 것인지를 전략적으로 고민해야 해요.

회로: 핵 투명성이 높아진다는 건 대중이 핵을 잘 이해하게 된다는 의미인가요?

성윤: 여기서 투명성은 정책의 투명성은 아니에요. 국제 핵 비확산 레짐 하에서 한 국가가 원자력을 얼마나 평화적으로 이용하고 있는지를 국제사회에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투명하다는 거예요.

회로: 그럼 정보 수혜자가 국제사회가 되는 거고 정보제공자는 국가가 되는 거네요.

성윤: 그렇죠. 국제원자력기구(IAEA;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를 대표로 하는 국제사회가 평가를 하는 거에요.

국제원자력기구의 공식 로고

회로: 정보를 공개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군요. 그럼 한국의 핵 투명성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는 거 같나요?

성윤: 제가 일하고 있는 기관의 목표가 한국의 핵 투명성을 제고하는 거에요. 핵 비확산 체제의 근간은 핵 비확산조약(NPT; 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이에요.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조약으로, 핵무기를 가지고 있던 기존의 국가들만 핵무기를 가지고 앞으로는 핵무기의 양을 더 늘리지 말자는 게 NPT의 핵심입니다.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핵 보유국에서 핵 미보유국으로 넘기지 않고 원자력은 평화적인 목적으로만 이용하자는 조약이에요.

그러면 그 조약을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검증하고, 이것을 어떻게 이행할 것인지의 문제가 남죠. NPT 3조(*)에 따라 그 검증을 국제원자력기구가 합니다. 사찰관들이 각 국가를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방문해요.

(*) NPT 3조

3조

1. 핵무기 비보유 조약당사국은 원자력을, 평화적 이용으로부터 핵무기 또는 기타의 핵폭발장치로 전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본 조약에 따라 부담하는 의무이행의 검증을 위한 전속적 목적으로 국제원자력기구규정 및 동 기구의 안전조치제도에 따라 국제원자력기구와 교섭하여 체결할 합의사항에 열거된 안전조치를 수락하기로 약속한다. 본조에 의하여 요구되는 안전조치의 절차는 선원물질 또는 특수분열성물질이 주요원자력시설내에서 생산처리 또는 사용되고 있는가 또는 그러한 시설외에서 그렇게 되고 있는가를 불문하고, 동 물질에 관하여 적용되어야 한다. 본조에 의하여 요구되는 안전조치는 전기당사국 영역내에서나 그 관할권하에서나 또는 기타의 장소에서 동 국가의 통제하에 행하여지는 모든 평화적 원자력 활동에 있어서의 모든 선원물질 또는 특수분열성물질에 적용되어야 한다.

2. 본 조약 당사국은, 선원물질 또는 특수분열성물질이 본조에 의하여 요구되고 있는 안전조치에 따르지 아니하는 한, (가) 선원물질 또는 특수분열성물질 또는 (나) 특수분열성물질의 처리사용 또는 생산을 위하여 특별히 설계되거나 또는 준비되는 장비 또는 물질을 평화적 목적을 위해서 여하한 핵무기 보유국에 제공하지 아니하기로 약속한다.

3. 본조에 의하여 요구되는 안전조치는, 본 조약 제4조에 부응하는 방법으로, 또한 본조의 규정과 본 조약 전문에 규정된 안전조치 적용원칙에 따른 평화적 목적을 위한 핵물질의 처리사용 또는 생산을 위한 핵물질과 장비의 국제적 교환을 포함하여 평화적 원자력 활동분야에 있어서의 조약당사국의 경제적 또는 기술적 개발 또는 국제협력에 대한 방해를 회피하는 방법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4. 핵무기 비보유 조약당사국은 국제원자력기구규정에 따라 본조의 요건을 충족하기 위하여 개별적으로 또는 다른 국가와 공동으로 국제원자력기구와 협정을 체결한다. 동 협정의 교섭은 본 조약의 최초 발효일로부터 180일이내에 개시되어야 한다. 전기의 180일 후에 비준서 또는 가입서를 기탁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동 협정의 교섭이 동 기탁일자 이전에 개시되어야 한다. 동 협정은 교섭개시일로부터 18개월 이내에 발효하여야 한다.

회로: 그럼 사찰관들이 미리 말하지 않고 각 국가를 방문하는 건가요?

성윤: 그게 되게 재미있는 부분이에요. 판옵티콘(*) 개념이 규제 체계에도 점점 적용이 되가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사찰관이 정기적으로 신고된 시설에만 갈 수 있었다면, 지금은 신고되지 않은 시설도 볼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무통보 사찰’도 있어요. 간다고 미리 알리지 않고 가도 사찰관이 2시간 전에만 통보하면 해당 기관을 공개해야 해요. 국제원자력기구에서는 그게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안전조치라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사찰 기구에 좀더 강력한 접근 권한을 줌으로써 국가가 항상 긴장하고 있게 만드는 거죠.

사찰 기구의 권한과 국가의 주권이 배치되는 면도 있어요. 그래서 새로운 안전조치 접근법을 적용하기 이전에 먼저 각 국가들의 동의를 받아요. 특정 국가가 불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사회에서 상호 논의를 통해 고치기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안전조치 접근법의 시도와 교훈은 중요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솔선수범하는 편이에요. 한국은 다양한 원자력 시설을 보유하고 있어 사찰 방법이 복잡해서 국제원자력기구 시찰관을 대상으로 훈련을 제공하기도 하고요.

안타까운 점은 한국의 일부 원자력 연구자들은 원자력 물질이 얼마나 국제적으로 민감하게 규제되는지 모른다는 거에요. 혹시 선희 님은 원자력을 대학원 과정까지 전공하면서 해당 내용을 학교에서 배운 적 있으세요?

(*) 판옵티콘(panopticon): ‘모두’를 뜻하는 접미사 pan과 ‘본다’는 뜻의 opticon을 합성한 말로, 소수의 감시자가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도 모두를 감시할 수 있는 감옥 형태를 말한다.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밴담이 고안했으며,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적 감시 체계로 그 개념을 확장하였다.

회로(선희): 아니요. 실험실에서는 핵물질을 다루려면 필요한 조건(RI 자격증, 방사선 종사자 교육)정도만 주로 배웠던 것 같아요. 원자력을 전공하지 않는 일반 공대 학생들을 대상으로는 보통 그런 교육을 하지 않죠.

성윤: 안전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계량되고 있는지, 농축도 관련 규정은 어떻게 되는지 등은 안 배우니까 2004년의 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해요. 국가차원에서는 국제원자력기구에 협조를 잘하고 있는데, 연구자나 대중 인식은 아직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아요.

학교와 회사

회로: 이제 주제를 약간 바꾸어서 성윤 님이 다니고 있는 회사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성윤 님이 근무하는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은 주로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요?

성윤: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은 핵비확산과 핵안보를 이행하는 기관이에요.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원자력 안전을 규제하고 핵물질을 통제하는데, 이 중 통제 관련 업무를 위탁 받은 전문기관이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입니다.

회사가 하는 일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1) 첫 번째는 안전조치로, 핵물질이 핵무기 또는 기타 핵폭발 장치 등의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계량, 격납, 감시, 사찰 등 일련의 활동이에요. (2) 두 번째는 수출입통제, 즉 핵무기 개발 의도를 가진 국가가 핵무기 생산에 필요한 핵물질, 장비, 기술 등에 국제 거래를 통해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하는 활동이에요. (3) 세 번째는 물리적방호, 즉 핵물질 및 원자력 시설에 대한 국내외 위협을 사전에 방지하고 위협이 발생한 경우 불법행위를 저지하는 한편, 사고가 발생한 경우 이를 최소화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해요. (4) 마지막은 사이버보안으로, 즉 핵안보를 위협하는 사이버 공격을 예방, 탐지, 대응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하고 있어요.

오바마 정부 이후 물리적방호와 사이버보안 등 핵안보 관련 국제사회 관심이 특히 높아졌습니다. 9.11 테러 때 원자력 발전소를 폭파시킬 계획도 있었다는 게 밝혀졌어요. 이때 국가가 핵무기를 만드는 것을 통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원자력 발전소를 악의가 있는 행위자로부터 보호하는 것도 또한 중요하겠다는 인식이 생기며 핵안보라는 개념이 주목받기 시작했어요. 이러한 맥락에서 저희 회사는 사업자들이 원자력 발전소를 물리적 공격과 사이버 테러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있도록 가이드를 제공하고 그 이행 여부를 평가하는 거죠.

원자력 발전소를 처음 지으려고 하는 나라나 새로 시설을 지은 지 얼마 안된 나라에 규제 역량 강화를 위해서 전문성을 이전해주는 업무도 하고 있어요. 한국이 원자력 활동을 얼마나 잘 규제ㆍ통제하고 있는지를 국제 사회에 알리는 방안으로 파트너 국가들과 우리의 규제 경험을 공유하는 거죠.

회로: 통제와 안전이 다른 업무인가요?

성윤: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지키는 게 안보라면 안전은 원자력 발전소에 사고가 안 나도록 지키는 것에 가까워요. 통제는 우리나라에 핵물질이 얼마나 있는지, 적합한 용도로 쓰이고 있는지 등을 관리하는 거고요. 물론 안전과 통제가 겹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안전과 통제를 연계하여 연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어요.

회로: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을 직장으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성윤: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은 2004년 사건을 계기로 원자력을 통제하기 위한 독립적인 기구로서 설립되었어요. 제 석사논문이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의 역사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기관이 창립되고 정착하기까지의 과정과 관련이 많아요. 또, 원자력 업계가 외부인이 접근하기 쉬운 곳은 아니다 보니 항상 업계 내부가 궁금했어요. 그러던 차에 원자력 정책 관련 부서에서사람을 뽑는다는 소식이 들려서 이 기관에 지원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제가 입사했을 때가 딱 기관 10주년이어서 입사하자마자 기관의 역사를 썼습니다. 나름 전공을 살린 거죠. (웃음)

회로: 지금 성윤님이 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 설명 해주세요. 이전 인터뷰(POKAS-ON)를 보면 대학원생 때 배운 내용과 현재 하는 일이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지는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럼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시나요?

성윤: 첫 번째는 국제협력 업무에요. 국제협력 업무는 단순히 ‘우리는 핵무기 안 만들고 있어, 잘 하고 있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많은 국가가 우리를 신뢰하도록 만드는 게 중요해요. 그래서 국제원자력기구라거나 국가적으로 중요한 파트너인 미국, 캐나다, 일본, 호주, 그리고 우리나라 원전을 수입한 아랍에미리트와 협력을 긴밀하게 하고 있어요.

두 번째로 원자력 통제와 관련한 정책연구를 하고 있어요. 국제 사회의 변화나 최근 떠오르는 이슈를 빠르게 입수해서 정리하고 공유하기도 하고, 이행에 필요한 부분을 선제적으로 연구하기도 합니다.

회로: 지금 하는 일에는 어떤 종류의 전문성이 필요한가요?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지 않더라도 대학원에서 배운 것 중 도움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성윤: 저는 정책 부서나 총괄 부서, 협력 부서에 있었기 때문에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서 훈련 받은 기본적인 능력들, 즉 잘 읽고 잘 정리하고 잘 쓰는 능력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저희 회사에 다니는 분 중 30%는 원자력과 졸업생이지만, 그 분들이 학교에서 핵비확산, 핵안보 개념을 전공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원자력을 전공했더라도 회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오시는 분들이 많지는 않아요. 저는 졸업 논문 쓸 때 국제원자력기구의 정책 변화를 공부했던 게 업무를 하면서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이행을 주 업무로 하시는 분들은 이행에 필요한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서 교육과 훈련을 많이 받으세요. 법과 규정에 근거해서 이행을 하기 때문에 법과 규정을 우선적으로 숙지하시고요. 또 사업자들에게 저희가 어떤 기준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무엇이 합리적인 기준인지 연구하느라 외국 사례도 많이 참고합니다. 시뮬레이션도 돌려보고 하면서 합리적인 규제 기준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로 알아요.

회로: 회사에서 새로 배운 스킬은 무엇이 있을까요?

성윤: 눈치가 많이 는 것 같아요. 저는 눈치가 없는 편이었는데 회사를 다니면서 눈치와 사회성이 많이 늘었어요. 이상하게 술은 줄었어요. 아쉬워요. (웃음)

또 회사에 와서 영어가 늘었어요. 제가 살면서 영어로 밥 벌어 먹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회사를 다니면서 영어를 쓸 일이 생각보다 많아요. 출장 다니다 보면 영어로 속기를 해야 할 때도 있고요. 예전과 비교하면 영어가 좀 편해진 거 같아요.

업계의 여성 문제와 페미니즘

회로: 성윤 님이 속했던 다양한 집단 내 성비 차이에 관해 묻고 싶습니다. 카이스트 물리학과 08학번은 40명 중에 여성이 4명뿐인데 반해 과학기술정책대학원은 성비가 약 1:1인데요. 성비가 각 집단의 분위기에 미치는 영향이 있나요?

성윤: 저는 성비가 1:1이었던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 속했을 때가 물리학과에 있었을 때보다 편했는데요, 이게 과학기술정책대학원이 분위기가 좋은 곳이어서 편했던 건지 아니면 성비가 맞아서 편했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서 조심스럽기는 합니다.

성비가 달라지면 직장 문화가 획기적으로 달라진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성비가 낮으면 불편한 건 있어요. 예를 하나 들자면, 물리학과 학부 때는 MT를 가는데 학생들이 이화여대 물리학과와 합동 MT를 가고 싶었나 봐요. 전적으로 남학생들의 희망이 반영된 거였죠. 그런데 동기들이 MT가기전에 여학생들에게 먼저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안 와줬으면 좋겠다고요. MT가 학과 공적인 행사는 아니어서 웃어 넘겼지만, 성비가 균등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죠.

회로: 먼저 오지 말라고 했군요.

성윤: 그런 일들이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어요. 근데 이게 성비 때문에만 일어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들 스무 살, 스물 한 살 정도로 어리고 서툰 나이였으니까요. 지금 직장은 여성 성비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좀 더 공적인 관계다 보니까 서로 더욱 조심하죠.

회로: 지금 근무하고 있는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의 성비는 어떻게 되나요?

성윤: 제가 입사할 무렵에는 전체 직원 100명 중 여직원 수가 20명이 안 됐어요. 12명이었나? 그런데 제가 입사하고 다음 해부터 역량 있는 여성분들이 많이 지원할 수 있도록 회사에서 적극적으로 홍보를 했어요. 예를 들면 여대에 가서 채용 설명회를 여는 거죠. 그래서 어떤 해에는 신입 직원 중 여직원 비율이 70~80% 되기도 했어요. 2018년에는 위셋(WISET,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에서 여성과학기술인력 채용목표제 우수기관으로 수상하기도 했고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여직원 비율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어요. 부서별로 골고루 있기도 하고요. 지금은 기관 내 여성 비율이 20%가 조금 넘는 것 같아요.

그리고 회사에서 위셋과 연계해서 여직원 간담회, 여직원 리더십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어요. 필요한 일이고 좋은 변화라고 생각은 하지만, 더 욕심을 내 보자면, 교육을 넘어서 제도적인 영역에서 조금 더 여성친화적인 문화가 회사 내에 자리잡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저희 회사는 여성친화적이라기보다는 가정친화적이에요. 남성 직원도 눈치보지 않고 육아휴직을 쓰는 편이에요. 관련 제도에 관한 자료집도 제공하고요.

이 일을 담당하고 계신 인사 담당자께서 정말 열정이 넘치세요. 남성분이신데, 여대에서 채용설명회를 하고, 위셋 사업을 유치하는 등 변화에 적극적이세요. 한 사람의 열정이 조직을 많이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느껴요. 개인적으로는 그 분의 인사 담당자로서의 철학이 참 궁금해요.

회로: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인사담당자님이 일을 잘 하시는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네요. 한 분이라도 젠더 관점으로 직장 환경을 변화하려 애쓰시면 많이 바뀌는 것 같아요.

성윤: 네. 저희 회사는 육아휴직을 할 때 눈치를 주지 않습니다. (웃음)

회로: 페미회로가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단체다 보니 인터뷰를 요청할 때 불편해하시는 분들이 있으세요. ‘여성’ 과학자가 아닌 ‘과학자’로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분들도 있고요.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불편하게 느끼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성윤: 공감합니다. 회사에서 여성과학기술인 대상으로 교육하는 자리에서도 그걸 느껴요. 위셋 지원으로 성공한 여성과학기술인 선배님들이 오셔서 강의를 해 주실 때가 종종 있어요. 그런데 페미니즘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때때로는 그 강의들이 기성 세대 사고 방식에 갇혀 있다고 느껴요. 커리어 개발을 독려하기 위해서 오셔서는 강의를 듣고 있는 후배 과학자들이 입고 있는 옷을 지적하세요. ‘그렇게 입고 다니면 직장에서 성공하기 힘들다’라고 얘기를 하신다던지. 직장 내에서 어떻게 하면 더 성공하고, 더 빠르게 남들보다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평가와 잣대가 남성 중심적인 가치로 굳어져 있는 상황에서 쉽게 해결되지 않는 부분인 거죠.

한편으로 개인다움을 존중하고 다양한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직장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도 남성들처럼 공격적으로 직장 생활을 해서 더 많은 여성이 임원직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죠. 두 방향의 조화는 어려운 일이지만 공존을 위해 노력해 나가야 할 부분인 것 같아요.

회로(선희): 저도 학회에서 여성과학기술인 분들이 결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가지고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어떤 분들은 결혼을 하지 말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절대 아이를 낳지 말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다른 분들은 결혼은 해야 한다, 다만 두 배, 세 배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조언해 주시더라고요. (웃음)

성윤: 두 가지가 동시에 진행되면 좋을 거 같아요. 기존 사회 문법에서 더 많은 여성들이 성공하게 된다면 그 또한 여성주의 향상에 기여하게 될 거에요. 다른 한편으로는 성공한 삶의 정의를 바꾸기 위한 일도 같이 해야 하지 않을까요?

회로: 직장에 새로 입사했을 때 페미니스트인 걸 밝히기 조차 힘드셨을 것 같아요.

성윤: 아니오. 저는 이미 수습 때 커밍아웃을 했습니다. (웃음)

회로: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읽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성윤: 얼마 전에 빈곤 여성의 삶을 그린 ‘신을 기다리고 있어’라는 일본 소설을 읽었어요. 빈곤은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의지할 사람이 없는 거라는 책의 메시지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들었어요. 저는 빈곤하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첫째이기 때문에 굳이 겪지 않아도 되는 시행착오를 하거나, 지름길로 갈 수 있는데도 돌아간 경험이 많아요.

페미회로의 이 인터뷰 프로젝트가 ‘선배들이 이렇게 했으니 너희도 이렇게 해라’가 아니라, 같은 백그라운드를 전공하고 커리어를 쌓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공유함으로써 시행착오를 줄이고, 개인이 물려받은 조언자 외에도 내가 살면서 만나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조언을 주고받을 수 있는 플랫폼으로 기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터뷰이 성윤 님. (사진: 박성윤 제공)

성윤 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직의 의지에 따라 조직 내 여성과학자, 공학자의 자리가 적극적으로 마련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느꼈다. 우리는 유리천장을 부순 ‘최초’ 여성과학기술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여성이 여러 명인 과학기술조직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그래서 한 명의 슈퍼우먼의 강연을 듣기보다는 평범한 여성과학자, 공학자들이 바글바글 모여 직접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여성들이 그리는 미래가 더 다양해지기를 소망한다.

030: 경남에서 페미니스트들을 기록하기, 경상대 페미니스트 모임 〈수요일의 페미니즘〉

Feminist in STEM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 030: 경남에서 페미니스트들을 기록하기, 경상대 페미니스트 모임 〈수요일의 페미니즘〉

 

인터뷰이 한솔이 〈수요일의 페미니즘〉(이하 〈수펨〉)을 안 것은, 〈수펨〉이 「경남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남기」(이하 「경페살」)라는 인터뷰집을 출간했다는 소식이었다. 「경페살」과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가 꼭 닮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둘의 차이점에도 눈길이 갔다.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는 부족하게나마 다양한 지역의 페미니스트 모임들을 인터뷰하려 노력해온 것과는 반대로, 「경페살」은 경남 지역에 집중한 점도 색다르게 느껴졌다. 질문 중에도, 페미니스트로서 비하당한 경험, 신념에 반해 행동했던 상황, 한국 페미니즘 현황에 관한 의견 꼭 물은 점이 인상 깊었다. 이 질문들은 페미니스트들이 서로에게 한 번씩은 꼭 던져보는 질문이다.

〈수펨〉은 「경페살」 외에도 모임과 같은 이름을 가진 잡지 「수요일의 페미니즘」를 꾸준히 출판해오기도 했다. 〈수펨〉은 꾸준한 출판 활동에서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었을까?

 

인터뷰어인 페미회로의 한솔은 회로, 수펨의 인터뷰이 강선희, 김지영, 천우진 님은 선희’, ‘지영’, ‘우진으로 표기했다. 교정은 페미회로의 우연, 희수, 발행은 페미회로의 배현주, 우연, 희수(이상 가나다순)가 맡았다.

 

(본 인터뷰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선희 님과 지영 님을 먼저 만나고 나중에 우진 님을 만난 후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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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집회에 참여한 〈수펨〉 회원들. 김지영 제공.

 

선희, 지영, 우진

회로: 안녕하세요, 여러분.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선희: 17학번이고요, 생명과학부에요. 대학 내 여성운동과 실천에 관심이 많습니다.

지영: 여성운동의 장을 어떻게 분석할지 관심이 있어요. 대학이나 지역이라는 장을 어떻게 볼지 고민해요. 서울과 진주에서의 여성운동은 굉장히 다르지만, 담론의 중심은 서울이고요. 서울의 담론을 걷어내고 진주의 담론을 어떻게 오리지널로 볼 수 있을까 궁금해요.

우진: 경제학과 문화콘텐츠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정치에 관심이 많아, 모 정당에서 당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회로: 선희 님이 생명과학부라니 반갑네요. 자연대나 공대에서는 대개 남초다 보니 페미니스트를 만나기 더 어려워요. 학과 활동에 불편한 점은 없나요?

선희: 생명과학부는 여자가 조금 더 많긴 해요. 제가 입학할 때 여남 성비가 6:4였고, 후로도 점점 더 늘어 여자가 10명 중 7~8명도 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남초 문화가 있긴 하죠. 이제는 제가 페미니스트라고 숨기지 않고 말하긴 하지만, 주변 시선이 느껴지기도 하고 주류 문화에 어울리기 어렵긴 하죠. 당당하게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얘기를 하고,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쉬쉬하고 다녀야 하는 분위기가 있죠. 말해놓고 보니 어디나 다 마찬가지인 것 같기도 하네요(웃음).

회로: 인터뷰에 응한 동기를 말씀해주세요. 인터뷰에 응할 때 주저하는 점은 없었나요?

선희: 작년 〈수펨〉에서 경남 청년 페미 네트워크 만들기 프로젝트를 활동한 게 인터뷰에 응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수펨〉 활동을 엄청 열성으로 하지 않아서 제가 대표해서 인터뷰해도 될지 고민이긴 했어요.

지영: 저도 비슷해요. 「경페살」를 만들 때 제가 인터뷰어로서 질문도 작성하고 인터뷰이들을 섭외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이번엔 반대로 제가 인터뷰이가 되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우진: 기사에 얼굴이 실릴 정도로 여러 페미니즘 활동을 했고, 위험 부담이 있는 시위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기에 인터뷰에 응하는 데에 주저하지는 않았어요. 각 지방에 있는 페미니스트들을 인터뷰한다고 하셨는데, 지역 페미니즘을 아카이빙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회로: 수펨에는 어떻게 참여하셨나요?

선희: 17년 학기 말에 우진 님과 함께 들어갔어요. 저는 처음엔 〈수펨〉엔 관심이 없었는데, 우진 님이 들어가고 싶은데 망설여진대서 같이 들어갔어요. 저도 일상 속에서의 여성혐오를 불편해하게 여겨왔으니, 〈수펨〉 활동이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참여했어요. 공부하면서 내가 겪은 어려움이 나만의 경험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으로 뿌리깊은 여성혐오라는 걸 알았죠. 여자애는 그러면 안 된다는 인식이 많잖아요. 사람으로 바꾸고 나면 말이 안 되는. 여학생은 다리에 큰 흉터가 있던가하는 불가피한 때에만 바지 교복을 입을 수 있다던가, 여자애가 그렇게 기가 쎄고 고집 있으니까 남자애들이 무서워서 안 오는 거 아니냐, 좀 애교있게 넘겨야 사람관계가 순탄하게 잘 풀린다고 말하곤 하죠. 남성이 기가 쎄고 고집 있다면 강단 있다고 좋게 표현할법도 하죠.. 고등학교 때까지 선생이나 친인척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때는, 그냥 겪는 문제인가보다 생각했는데, 겪어야 하는 게 아니었다는 걸 알았죠.

지영: 18년 10월에 가입했어요. 페미니즘에는 중학교 때부터도 관심이 있었어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학교 폭력 경험 때문인 것 같아요. 제게는 제 경험을 해석할 틀이 필요했는데, 학급 문고에서 읽었던 페미니즘 책이 나름의 해석틀을 줬어요. 가정 폭력 경험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대학 입학하자마자 〈수펨〉에 가입할까 계속 고민했는데, 가입한 때는 학교에선 사회과학대 부학생회장으로 활동하던 때였어요. 학생회 활동을 할 때에는 3.8일 여성의 날을 맞아 미투운동을 지지하는 withyou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직접 반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목격했고 에브리타임에도 부정적인 게시글이 올라오기도 했어요. 사실상 과뿐만 아니라 학교의 전반적인 정서가 반페미니즘적이어서 학교 내에서 페미니즘 얘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어요. 한편으로는, 진주여성민우회 활동을 시작하던 때기도 했어요. 민우회에서 성평등 강좌가 있어, 강좌 끝나고 식사 자리에서 〈수펨〉 기획단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수펨〉에도 찾아가보고 결국 가입했죠.

우진: 페미니스트를 만나는 건 〈수펨〉에서가 처음이었어요. 페미니즘 모임이라고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도 모르고, 무섭기도 해서 혼자 갈 용기를 못 내서 선희 님에게 같이 가자고 했어요. 트위터에도, 익명의 사람들이 누군가의 신상을 알아내 위협하겠다고 협박하는 일을 많이 봐서, 페미니스트더라도 모르는 사람에게 제가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는 게 위험한 일 같았어요. 신상에 대한 위협도 있었고, 페미니스트를 만난다는 게 어떤 일인지도 몰랐으니까요. 사람들이 저를 커뮤니티 일원으로 인정해주지 않을지 모른다는 걱정도 있었어요. 모임에 한 번 나가고는 걱정은 바로 사라졌지만요. 누군가 내 신상을 학과에 알린다든가 하는 구체적인 두려움은 아니지만,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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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수펨〉에서 붙인 대자보. 〈수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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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대자보와 같은 내용의 대자보가 철거당한 자리에 붙은 학교 측 안내문. 게시판에 게시한 다른 대자보도 훼손되었다. 〈수펨〉 제공.

회로: 우진 님은 페미니즘을 어떻게 접했나요?

우진: 20살에 트위터로 접했어요. 19살에 팟캐스트를 듣다가, 페미니즘이 있다는 것과 여성인권의 현재 위치를 알았어요. 하지만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어요. L살롱이라는 레즈비언 팟캐스트였는데, 레즈비언 두 분이 페미니즘 이야기, 퀴어 이야기를 반반 나누어 설명했어요. 퀴어 이야기에만 관심을 갖고 페미니즘에는 별 관심이 없었어요.

회로: 수펨전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지영: 저는 사회과학대에서 교수님 연구를 도운 적이 있어요. 교수님과 함께 일해 본 경험이 〈수펨〉에서 활동할 때 더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교수님의 전담 조교 같은 역할이었어요. 원래 중요한 일을 맡는 역할은 아닌데, 교수님이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써주셨어요. 제가 성장할 수 있게 글도 여럿 맡기셨고, 기획도 해봤어요. 그때는 역량이랄 것도 없었어요. 다들 처음이라 엉망진창이었어요. ‘위안부’ 관련된 사업 보고서 써봤고, 지역 공공역사 아카이빙도 해봤어요.

회로: 수펨결성 계기는 무엇인가요?

우진: 저도 결성 2년 넘어 들어가 들은 내용만 전할게요. 페미니즘에 관심 있던 몇몇 대학생과 대학원생이, 만나 담소 나누기에 그치지 않고 더 생산적으로 활동해보자는 생각으로 소모임을 만들었고 점점 커졌다고 들었어요.

회로: 수펨은 개방된 편인가요?

선희: 누군가 〈수펨〉에 참여하고 싶다면 페이스북 메시지로 대화해본 후에 들어와요. 간단히 자기소개하고 모임 시간과 장소를 안내하는 정도로 만요.

지영: 참가 대상에 제한은 없어요. 초창기에는 경상대 학생이 아닌 일반 시민도 세미나에 자유롭게 참석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세미나 자체가 뜸해지면서 자유롭게 왕래하고 싶지만 그럴 기회 자체가 부족해요.

회로: 수펨회원 구성은 어떤가요?

지영: 지금은 활동 잠정 중단이에요. 적지만 대학원생도 있었고, 인문대와 사회대 학생이 많아요. 전체 회원이 20명 정도인데 실제로 활동하는 사람은 여섯 명 정도?

선희: 대부분 17 이전 학번이에요. 활동을 잠정 중단 중인 이유로, 앞으로 활동을 이어나갈 낮은 학번 회원이 적어 재생산이 어려워진 점도 있어요. 〈수펨〉 단톡방에서 여러 정보를 주고받지만, 꾸준히 참여하는 사람은 많이 없어요.

지영: 재생산은 다른 단체도 직면한 문제 같아요.

우진: 대학원생이 2~3명이었는데, 다들 개인 사정으로 활동을 그만두었어요. 나머지 10명 정도는 학부생이에요. 사회, 인문대가 압도적으로 많고, 농대와 공대는 정말 적어요. 농대에서 한 분 오셨는데 짧게만 활동하셨어요.

회로: 모임이 잘 운영되지 않는다니 안타까워요.

선희: 다른 페미니즘 동아리처럼 〈수펨〉도 매해 겪은 문제에요. 일단 기본적인 토론, 배경 지식이 전무한 사람이 들어오니까 처음부터 시작해요. 경험 나누기, 자신에게 페미니즘은 무엇인지 말하기,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화하는 이야기 등 매번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어요. 별 게 아닐 수 있지만, 몇 년 활동한 사람은 지루해하는 기색이 없지 않아 있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더 수준 높은 토의를 하고 싶어 하는데, 만족하지 못하니 나가고. 비교적 새로 들어온 분들은 잘 운영되지 않는 분위기에 적응 못 하고 나가기도 하는 것 같아요.

19년 활동을 기획하면서 이 얘기를 꺼냈어요. 같이 기획했던 분들이,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반복되는 면이 있고, 지친다고 말씀하셨어요. 처음엔 학회로 시작했고, 논문을 주로 읽었으니까요. 그런데 새 회원이 들어오면서 어려운 건 못 읽게 되었으니, 두 세대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커리큘럼을 잘 짜면 좋겠다는 의견이었어요. 그래서 3, 4월에는 나의 페미니즘이나 경험 나누기 위주로 진행하고, 여름방학부터 좀 더 어려운 책을 읽었어요. 여름방학엔 올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니까요. 그걸 거쳐 가을, 겨울에는 더 어려운 책이나 논문 읽기로 넘어갔어요. 그런데 사실 제대로 되진 않았어요. 신입생이 안 들어오기도 했고, 이렇게 운영한다니 기존 회원도 안 오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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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펨〉의 역사. 「경페살」에서 발췌.

경페살을 만들며

회로: 수펨에서 모임 이름과 같은 제목인 수요일의 페미니즘으로 정기적으로 출판물을 내왔고, 가장 최근에는 경페살을 내는 등 꾸준히 출판 활동을 해오셨어요. 여러 활동 중 출판 활동을 해온 이유는 뭔가요?

지영: 원래는 페미니즘 연구모임으로 시작했어요. 나중에 콘텐츠를 만들어보자며, 「수요일의 페미니즘」 창간준비호를 냈어요. 그게 〈수펨〉의 상징적인 활동이라고 들었어요.

우진: 전에 하던 출판을 계속 이어서 해야겠다는 데에는 다들 동의했어요. 지원받을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이 문제였는데, 마침 지원사업 공고가 나와서 두 군데 지원했다가 경남청년센터 〈청년온나〉의 지원사업에 붙어 구체적으로 기획하기 시작했어요. 원래는 동아리원들이 기고했는데, 이 지원사업에서는 인터뷰집으로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기존 세대 페미니스트들은 너무 주목받지만 영영페미니스트들은 마이크를 받지 못한다고 계속 생각해왔거든요. 영영페미니스트들 중에도 경상도 사람들을 만나보자, 그리고 그들의 전망을 중심으로 출판물을 내고 싶었어요.

「수요일의 페미니즘」은 동아리 활동과 동아리원들의 생각을 기록하고자 기획했어요.

회로: 경페살인터뷰 따실 때 인터뷰이는 어떻게 섭외했나요? 공개적으로 모집했나요, 인터뷰할만한 분들을 알아본 뒤에 섭외했나요?

지영: 둘 다 했어요. 모집도 했고, 경남의 단체들을 컨택해서 섭외하기도 했고요. 선희 님이 개인적인 연이 있어서 컨택에 수고해주셨어요. 서울 단체들은 저희가 알아보고 섭외했죠. 알아본 서울 단체들은 연대체에요. 사업 내용은 출판이 전부가 아니라 경남 청년 페미 네트워크 만들기였거든요. 서울은 어떻게 연대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서울여성회 페미니스트 대학생 연합(*)과 창립 준비 중이던 〈유니브페미〉(*)를 서면으로 인터뷰했죠.

「경페살」에 실린 이혜숙교수님(**)은 지역 여성운동을 오래 연구해온 분이라 제가 강력히 추천해 인터뷰했어요.

(*)〈유니브페미〉는 페미회로에서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유니브페미〉 인터뷰 링크: https://femicircuit.wordpress.com/2019/11/12/020-%EB%8C%80%ED%95%99-%ED%8E%98%EB%AF%B8%EB%8B%88%EC%8A%A4%ED%8A%B8%EB%93%A4-%EB%8C%80%ED%95%99-%EB%B0%96%EC%97%90%EC%84%9C-%EB%A6%AC%EB%B6%80%ED%8A%B8/

(**) 경상대학교 이혜숙 교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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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페살」 목차. 「경페살」에서 발췌.

회로: 경페살에서 몇 가지 공통질문들이 눈에 띄더라고요. 페미니스트로서 조롱과 비하를 듣거나, 신념에 반대되는 행동을 한 적이 있는지, 한국 페미니즘 현황에 우려하거나 바라는 점을 꼭 물어보셨어요. 이 질문들을 모두에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지영: 공교롭게도 저 질문 모두 제가 만든 질문이네요. 페미니스트로서 조롱과 비하를 받은 경험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제가 인터뷰이라면 물어봐 주길 기대했을 것 같아요. 경험을 나누면서 라포도 형성할 수 있고요. 서울과 정도도 다를 테니 비교해보고 싶기도 했고요. 신념에 반대되는 행동을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은, 페미니스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연결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신념과 다른 행동이라는 건 ‘페미니스트답지 않은 행동을 한 적이 있느냐?’라는 뜻이잖아요. 제가 원하는 답이 나오진 않았어요. 원하는 답은 학과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가 오갈 때, 이에 입을 다물거나 어색하게 웃고 말아버리는 그런 얘기를 듣고 싶었어요. 한국 페미니즘에 우려하거나 바라는 점은, 마무리하는 질문으로 넣었어요. 트랜스젠더에 관해 담론이 이분화되는 지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어요.

우진: 지영 씨가 전공 때문에 인터뷰 경험이 많아, 질문 중 절반 넘게 지영 씨 질문이었을 기예요. 백래시에 대한 경험을 묻고 싶지 않았나 짐작해요. 페미니즘 현황에 우려하거나 바라는 점은 제가 질문을 넣었어요. 제가 궁금했어요. 페미니즘의 방향은 계속 달라지만, 정말 계속 추구하고 싶은 답변도 받았어요. 다른 여성들과 연대하며 너무 지치지 말자, ‘정치적인 여성’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답변이 인상 깊었어요.

커뮤니티 안에서 일어나는 오해와 갈등은 항상 걱정되었기에, 갈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조정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싶었어요. 〈수펨〉도 독서 모임이기에 토론이 활발했어요. 작은 주제로도 의견이 갈리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지금 한국의 여성인권 상황이 너무 안 좋기도 하고, 워낙 다들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첨예하게 부딪힐 수밖에 없었어요. 의견 차이가 갈등으로까지 번지는 경우를 직접 보거나 전해 듣기도 했고요. 제가 어떤 의견을 ‘좀 아닌 것 같다’고 느껴도, 제가 말하면 갈등으로 퍼질까 봐 참아야 할 때도 많았고요. 다른 페미니스트들도 저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을 것 같았고, 인터뷰에서 이런 상황들을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듣고 싶었어요.

선희: 같이 지방에 있는 페미니스트들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봤어요. 페미니스트가 되기까지의 생애사,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자각하게 된 계기나 시점, 혹은 ‘페미니스트, 페미니즘’에 대한 본인만의 정의를 물어봤어요. 본인이 페미니스트임을 밝히거나/혹은 밝혀져서 일어난 불링의 경험, 학교나 학생회, 동아리연합회, 학과에 의해 활동이 위협받거나 방해받은 경험, 불링 속에서 느낀 감정 등. 그리고 비슷한 상황의 지방 페미니스트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물봤어요.

회로: 우진 님이 생각한 답변이 많았나요?

우진: 대부분 저와 비슷한 걱정을 가졌더라고요. 의견 조정은 누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 같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힘이 되더라고요. 예를 들면, 페미니스트라면 비건을 실천해야 하는지, 남성 페미니스트를 커뮤니티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외에도 수많은 문제가 있죠. 저도 옛날과 지금 생각이 반대로 생각하는 주제도 많거든요. 제가 변했듯이, 한 사람도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이런 부분이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데에 중요한 기준점이 될 수 있는데, 이견 좁히기가 힘들고 의견 차가 있는 채로 계속 갈 수밖에 없을 때가 있죠. 예전에는 서로 계속 설득해서 의견 차이를 좁혀 비슷한 생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각자 의견이 다른 게 당연하고 각자 모습 그대로 커뮤니티를 만들어가는 것도 방법일 것 같아요.

회로: 출판 기획에 관해 말씀해주세요. 기획단계에서는 어떤 대화를 나눴나요?

우진: 제가 출판에 참여한 건 2번이에요. 제가 〈수펨〉에 참여하기 전에는, 3번 출판했어요. 〈수펨〉은 다양성이 특징인 그룹이라서, 제가 출판에 참여할 때도 어떤 다양한 얘기를 담을지 의논했어요. 사소한 문장이나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공격적일 수 있으니, 이에 주의를 기울였어요. 두 번째 프로젝트에서는, 어느 지역으로 갈지, 어디까지를 지방으로 설정할지, 어느 단체를 인터뷰할지 많이 논의했죠. 사실 친한 사람들끼리 꾸린 팀이라서, 노는 얘기도 정말 많이 했어요. 다들 열정적이라서 쉬는 시간이 필요했고, 인터뷰를 가면 어디서 놀지 얘기했죠.

회로: 출판물 수요일의 페미니즘이나 경페살을 만들 때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지영: 「경페살」은 〈청년온나〉에서 지원받아 금전적 어려움은 없었어요. 다만 부산, 창원, 진주에 있던 단체가 함께하는 프로젝트팀이 모이기 힘들었어요. 팀원도 6명으로 적지 않았고요. 녹취록 푸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녹취록 푸는 알바는 너무 비쌌고 결국 다 못 풀었어요. 보통 2시간씩 하는 인터뷰를 3개씩 맡아 푸느라 힘들었죠.

선희: 편집, 디자인, 인쇄를 직접 하는 게 어려웠다고도 들었어요. 「경페살」에서는, 학교 다니는 사람, 취업한 사람이 한날 한곳에 모여야 하니 일정 잡기가 힘들었어요. 회의 잡은 날엔 종일 다른 일정 못 잡고요. 인터뷰이랑 시간 맞추기도 어려웠고요. 처음엔 머뭇거리는 말이나 잡소리도 다 글로 옮기는데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진: 출판은 항상 지원받았어요. 돈도 더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지원이 있어 어렵지는 않았어요.

제가 참여한 두 출판 중, 첫 번째는 학교에서 창의동아리 지원사업에서, 두 번째는 〈청년온나〉의 지원사업에서 지원받았어요. 둘 다 제한된 기간 안에 끝내야 했는데, 생각보다 작업이 길어져 너무 힘들었어요. 일손도 모자랐지만, 하다 보니 더 욕심나고, 작은 일을 붙잡고 있어서요.

시간 다음에 찾아온 어려움은 배포였어요. 학교 휴게실에 두면 학생들이 훼손하기 일쑤였어요. 그렇다고 학교 게시판에 배포할 테니 연락 달라고 글을 남기는 건 신상에 위협이 되고요. 학교에서 지원해주었던 만큼 학교에서 배포도 도와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한 권을 나눠줘도 먼저 연락이 와야 나눠줄 수 있다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에브리타임에 배포 홍보 글을 올리면 신고가 누적되어 다 잘렸고요. (회로: 「경페살」은 구글폼으로 나눠주었던데, 다른 건 어떻게 배포했나요?) 그건 학교에서 지원받은 예산이 많지 않아, 많은 부수를 뽑지 못했고, 교내 배포했고 민우회같은 여성단체를 만날 일이 있으면 나눠드렸어요.

첫 프로젝트는 한 권이 아니라 두 권을 6개월 동안 작업했어요. 다른 한 권은 페미니즘과 관련된 책은 아니었어요. 다른 프로젝트는 한 권을 4~5개월 동안 만들었어요. 처음 한 달은 인터뷰이를 모으며 보내서 정말 촉박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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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온나〉의 지원사업 심사받을 때 찬 명찰. 김지영 제공.

회로: 우진 님이 참여한 첫 출판에서 한 권은 수요일의 페미니즘이고, 다른 한 권은 무엇이었나요?

우진: 첫 번째 책은 원래 〈수펨〉이랑 상관없이 저와 뜻이 맞는 5명이 교내 길고양이와 페미니즘에 관해 책을 내기로 했어요. 길고양이 사진이랑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등 고양이에 관한 정보를 담아서요. 같이 작업했던 사람 중 〈수펨〉 사람들도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페미니즘 활동을 하지는 않지만, 페미니즘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여주는 분들이었어요. 기획하던 중에 〈수펨〉과 같이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수펨〉에 제의하고, 5명과 〈수펨〉이 기고하면 5명이 편집하고 묶어서 디자인도 출판도 했어요.

회로: 경페살마감할 때 느낀 점이 있나요?

선희: 엄청 가볍게 생각하고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생각보다 책임감이 매우 느껴지더라고요. 처음에는, 페미니즘에 관심도 못 갖게 하는 끔찍한 사회 분위기, 도시보다 확실히 부족한 토론의 장, 집회, 강좌를 활성화하고 가시화하자고. 시작했어요. 책임감이 뼈저리게 느껴졌죠.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에서도 몸으로 부딪치며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이 계시더라고요. 제가 정말 의미 있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고 느꼈어요. 프로젝트로 생각하고 시작했지, 페미니스트로 성장하려 시작하지는 않았거든요. 많이 배우고 성장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수펨〉 활동은 잘 못 하지만 혼자 책도 더 열심히 읽고 내면화하고요.

얘기 듣다 보면, 제가 프로젝트에 열성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너무 끔찍한 환경에서도 열심히 하는 분들을 봤으니까요.

지영: 제 느낌도 선희 님이 잘 설명해주셨어요. 저는 「경페살」에 욕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몸이 잘 안 따라서 자책을 많이 했어요. 「경페살」 결과물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요. 원래 구술 자료에 질적 방법론을 써서 무언가 도출해 사업 목표와 연결 짓고 싶었어요. 그런데 정말 인터뷰집이 되어 버려서 쉽지 않다고 깨달았어요. 사업 초반엔 기가 좋았어요. 사업 심사받으러 가서는 ‘내가 이렇게 말을 잘 하나’ 하는 생각까지 했는데, 사업 말에 가서는 너무 지쳐서 거의 신경 못 써서 친구들에게 미안했어요. 너무 힘들었고 돈이 없었으면 제대로 못 마쳤을 거예요.

우진: 구성에 관해서는 생각도 못 해봤네요. 요즘에 돌아보니, 제 생각은 없이 인터뷰만 들어간 건 아쉽더라고요. 제 개인 얘기와 시류를 인터뷰에 엮어 적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가장 자주 한 생각은, 팀원들도 너무 좋고, 활동도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즐거운 활동이어서, 앞으로도 계속 이런 활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배포까지 마치고 독자들이 보내준 후기를 읽고 이런 생각을 했어요. 경상도에 페미니스트들이 연대할 수 있는 장이 부족했다는 점을 느꼈고, 저희가 이 물꼬를 튼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어요. 주변에 이런 활동이 있는 줄 몰랐다, 자신과 같은 환경에 있는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들 들으니 힘이 된다는 얘기가 많았어요. 활동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많아 놀랐고요. 인터뷰이 중에 힘든 과거를 가진 분도 많았는데, 그런 얘기를 읽고 나니 힘이 된다, 〈수펨〉 활동에 고양된다는 후기도 많았고요. 자기도 인터뷰를 읽으면서 힘낸 만큼 열심히 활동하겠다는 분도 있었고요.

회로: 지영 님은 말하자면 연구를 하고 싶었던 거죠?

지영: 처음에는 난 진주에서 페미니스트로 슈퍼스타가 되겠다는 포부를 안고 시작했는데, 뒤로 갈수록 너무 힘드니까 설렁설렁하게 되고 어떻게든 결과만 내자는 식으로 편집했어요. 팀원들도, 이 인터뷰 자료는 그 자체로 충분히 좋은 자료니까 괜찮다고 위로해줬고요.

회로: 주로 진주 사람들이 많아 경페살을 받아갔나요?

우진: SNS 홍보라서 진주 사람은 별로 없었어요. 진주에선 저희가 알던 페미니스트들에게 전달한 게 거의 전부에요. 서울 등 전국에서 신청해주셨어요.

회로: 이런 활동이 있는 줄도 몰랐다는 후기도 있었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경상대에서는 수펨이 잘 알려져 있나요?

우진: 경상대 학생들은 홍보물을 봐야 이런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아요. 홍보가 잘 되진 않아요. 다른 학교 페미니스트 동아리는 저희를 만나봤으니 알 수도 있겠지만, 학교 안팎의 페미니스트가 아닌 다른 학생들은 잘 모를 거예요.

회로: 진주의 다른 학교의 사정은 어떤가요?

우진: 페미니즘 동아리가 전혀 없는 학교가 대다수에요. 그리고 저희 〈수펨〉처럼 활동하는 사람도 많이 본 적은 없어요.

진주의 분위기

회로: 교내외 다른 페미니즘 단체와 인연을 맺어오고 있나요?

지영: 진주여성민우회, 〈페미씨네〉와 연대를 해오곤 있죠. 그런데 〈수펨〉 자체가 세미나 위주로 운영되다 보니, 교류할 기회가 적어요. 서로의 존재를 알고, 지역에 행사 있으면 모이는 정도.

선희: 〈수펨〉에는 〈페미씨네〉 활동하는 분들도 있었고, 〈페미씨네〉에서 영화상영회 하면 〈수펨〉 활동 인원과 같이 보러 가기도 했고요.

우진: 〈페미씨네〉가 주최하는 여성영화제에 부스로 참여했어요. 〈페미씨네〉와 인원이 많이 겹쳐, 「경페살」에 〈페미씨네〉가 인터뷰에 참여했고요. 서로 응원하는 등 교류 있었어요. 진주여성민우회는 큰 행사에 같이 활동하자며 제안하기도 했고요. 몇 년 전 여성의날에, 진주여성민우회 등 여러 단체가 함께 주관하는 행사에서 제가 성명서를 낭독했어요. 여성의날 피케팅도 하고.

회로: 서울의 페미니즘 담론을 접한 적이 있나요? 접한 적이 있다면 어느 정도 공감하시나요?

지영: 페미니즘 담론이 전부 서울 담론이죠. 인터뷰 다니면서 느꼈는데, ‘서울은 우리에 비하면 정말 달콤하다’ 여긴 토양이 달라요. 가시화도 안 되어 있고, 지금도 경상대 에브리타임에서 불링당하려면 언제든 당할 수 있어요. 〈수펨〉도 실제로 많이 당했고요. 심지어 정식 동아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경상대학교 페미니즘 ‘동아리’라고 부르지 말라는 소리도 들었어요. 그런데 서울은 많이 다르더라고요. 서울은 여럿이 함께 활동할 기회가 많지만, 진주는 그런 기회 자체가 적고요. 대학의 의식 수준도 많이 달라요.

총여학생회(이하 ‘총여’) 폐지에 관심이 많아요. 흔히 총여 폐지의 기점을 연세대 총여로 꼽잖아요. 사실 지역의 대학은 더 일찍 진행됐어요. 경상대는 2016년, 경남대도 비슷한 시기에 폐지되었을 거예요. 서울도 한 사례일 뿐이지, 그게 기점이거나 최전방이 아니거든요. 서울권에서 총여가 폐지되기 전 비서울지역 대학 총여가 폐지되었음에도, 당연히 서울의 대학 총여 폐지가 최초로 이슈화되고 그것이 총여 폐지의 기점으로 여겨지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지방의 페미니즘 역사는 기록되지 못하고 잊히니까요

선희: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고 느끼죠. 집회 등 모일 기회가 진주에도 있으면 좋겠어요.

우진: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페미니스트들을 알기도 하고, 「경페살」 만들며 서울 페미니스트들을 만나기도 했고. 총여 폐지, 어떤 여성학 전공, 교양 수업이 있는지 여쭤봤어요. 진주와는 상황이 정말 달라서, 서울에는 학교마다 몇 개씩 있는데, 경상대에서는 그나마 하나 있던 과목도 이번 학기인지 저번 학기인지 폐지됐어요. 가르치던 교수님이 연구년에 들어가면서 과목을 가르칠 사람이 없었거든요.

서울 여대 대학가를 지나가면 탈코한 것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정말 많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진주에서는 가끔 한 명 보이면 반가워서 속으로만 위로로 삼았단 말이에요. 서울의 페미니즘 활동은 지방이랑 정말 달라서 공감되는 점은 없었어요.

회로: 서울과 비교해, 진주라서 아쉬운 점을 소개해주세요.

지영: 세대로 구분해서 보자면, 페미니즘 담론이 가장 많이 오가는 공간이 대학이잖아요. 그런데 대학에서도 페미니즘 담론이 그리 활발하지 오가지 않아요. 서울보다 반페미니즘 정서가 너무 강하고요. 활동해도 서울보다 스포트라이트를 잘 못 받아요.

회로: 진주에서 아쉬운 점은 어떻게 해결하시나요?

지영: 아쉬운 점을 해결하려 경남 청년 페미 네트워크를 만들었고, 이게 「경페살」을 만든 프로젝트에요. 그런데 각자 사정이 다 다르니 잘 되진 않았어요. 경남 청년 페미 네트워크 프로젝트와 〈수펨〉의 기존 세미나를 병행하려니 힘에 부쳐서 학교에 독서클럽 제도(*)를 활용했어요. 〈수펨〉의 기존 세미나에는 언제든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는데, 독서클럽에 이름 올린 사람 말고는 참여율이 떨어져서 활동 인원이 더 줄었어요. 결과적으로는 더 안 좋아졌어요.

우진: 「경페살」 인터뷰와 관련해서는, 각 학교에 연락할 수 있는 분들에게 최대한 연락해서, 인터뷰하고 싶다, 페미니즘 모임이 있다면 소개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진주 교대에 막 생기던 단체 빼고는 없더라고요.

「경페살」과 관련된 얘기는 아니지만, 진주의 경남과학기술대학교 분이 〈수펨〉에 참여하고 싶다고 하셔서, 적극적으로 모임에 참여하도록 도왔죠. 그 외에는,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다른 페미스트는 잘 못 찾았어요.

(*) 개척독서클럽은 경상대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독서 활성화 사업이다. 1학기에 2권 읽고 토론문 올리면 우수 독서클럽을 선정해 상과 상품을 준다.

회로: 진주라서 느끼는 장점이 있나요?

지영: 진주라서인지는 모르지만, 서울에는 페미니스트가 많지만, 진주에는 내가 있으니 참 다행이다. 진주에는 황무지에서 새싹을 피워내는 듯해요.

선희: 저희는 뭘 해도 시작이에요. 뭘 해보고 싶어서, 과거 사례를 찾아 부족한 점은 보충하고 잘한 점은 따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찾아보면 아무것도 안 나와요. 그렇게 행사 만들고 나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장점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지영: 저는 좋아요. 진주만의 페미니즘을 할 수 있다는 게요.

우진: 진주에서는, 모임 자체가 적다 보니 모임들끼리 활발하게 교류하죠. 〈수펨〉이 〈페미씨네〉랑 그래왔고, 진주 교대에도 모임이 생기면 그러려 했고요. 없는 만큼 더 친밀하게 연대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회로: 지영 님은 연구하고 싶어 한다고 느꼈어요. 사회학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이신가요?

지영: 그런 질문 많이 들었어요. 고민하고 있지만, 지금은 현장에 있는 게 더 마음에 들어요. 연구에 열의도 있었고, 연구자가 되고 싶기도 했지만, 연구는 너무 느리고 피해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것 같아 괴로웠어요. 그래서 요즘엔 어떤 공부를 하는 게 도움이 될까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법을 공부할 수도 있고, 언론인이 될 수도 있고요. 연구할 수도 있겠죠.

회로: 오늘 인터뷰 어떠셨나요? 인터뷰 소감 한마디씩 부탁드려요.

선희: 「경페살」 할 때는 몰랐는데, 질문에 답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고 느꼈어요. 인터뷰이가 이런 느낌이었겠네요. 인터뷰 질문지를 받아보고 제가 할 말을 메모해왔어요. 메모 적으며 내가 모르는 게 많다고 열심히 해야겠다고 느꼈어요.

지영: 전 역시 인터뷰어보다는 인터뷰이가 더 맞고 재미있네요. 제 이야기가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진: 페미니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기뻐요.

회로: 저도 오늘 재미있는 말씀 들을 수 있어, 만족스러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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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펨〉의 로고. 늑대는 수요일(Wedness)와 페미니즘(Feminism)에서 한 글자씩 따온 WF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다. 〈수펨〉 제공.)

이번 인터뷰에서는 수펨이 참여한 여러 출판 프로젝트 과정과 재생산 문제를 해결하려 기울여온 노력을 들어 보았다.

인터뷰어 한솔의 이야기를 꺼내자면, 페미회로에서 여러 조직을 인터뷰할수록 처한 사정이 정말 제각각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깨달았다. 조직 운영에는 정해진 길이 없으므로, 자신의 환경에 맞는 일을 벌여야 한다. 하지만 무슨 일을 벌일지 찾기 어렵다. 무언가 하기로 결심한 뒤에도, 돈과 공간 등 필요한 자원은 조직 내에서 찾기 어렵기 십상이다. 이번 수펨인터뷰에는 무엇을 할지 또 자원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참고할 점이 많다. 인터뷰는 주변과 만나고 주변을 기록하기에, 조직이 놓인 지형을 파악하기에 좋다. 필요한 자원은 학교와 지역에서 추진하는 지원사업에서 따올 수 있다.

무슨 일인가 벌여보고 싶은데 아이디어가 부족하다면, 수펨처럼은 어떨까? 인터뷰가 아니라도 자신의 주변을 알아볼 방법을 궁리해보자. 다른 이에게 질문하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무엇을 얻고 싶은지, 즉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누구를 만나든 성실히 만남을 준비한다면, 자신과 조직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전보다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029: 현장 과학자와 시민단체 활동가를 넘어 사업가를 꿈꾸는 정치하는 엄마, 윤정인

Feminist in STEM 페미회로인터뷰 프로젝트 029:  현장 과학자와 시민단체 활동가를 넘어 사업가를 꿈꾸는 정치하는 엄마, 윤정인

 

의약품합성화학 분야를 전공한 윤정인 박사를 지난 38 여성의 날에 만나보았다. 그는 대학원 박사 과정 중에 결혼과 출산, 육아를 병행했다. 박사학위를 딴 이후에는 직장생활을 거쳐 스타트업 회사의 연구소장이라는 직책을 수행하며 활발하게 현장 과학자로서 행보를 이어나갔다. 그와 동시에 시민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창립멤버이며, 과학기술인네트워크(ESC) 젠더다양성위원회 위원장, 정의당 세종시당 부위원장 직을 겸하고 있다.

과학자이자 시민단체 활동가, 한 아이의 엄마를 넘어 사업가를 꿈꾸는 윤정인 박사의 멋있는 행보를 들어 보자.

 

인터뷰어인 페미회로의 우연, 위선희는 회로, 인터뷰이 윤정인 님은 정인으로 표기했다. 교정은 페미회로의 한솔, 발행은 페미회로의 배현주, 우연(이상 가나다순)이 맡았다.

 

회로: 안녕하세요, 윤정인 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정인: 저는 유기합성화학자인 윤정인입니다. 과학자이자 아이 엄마이고, 시민단체 활동가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이직을 준비하기 위해 일을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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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인 님. 사진: 페미회로

 

화학자 윤정인

 

회로: 안녕하세요, 정인 님. (우연)도 학부 때 화학을 전공해서 정인 님이 더욱 반갑습니다. 정인 님의 전공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세요.

정인: 저는 학위를 다양하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도 교수님도 많고요. 학부는 대전대학교에서 응용화학과를 졸업해 공학사를 받았고, 고려대학교에서 유기화학으로 이학 석사를 받았습니다. 박사는 충남대학교 약학대학에서 생물약학을 전공했습니다. 박사 때는 신약개발 중에서도 의약품합성화학을 주로 연구했는데, 인 비보 테스트(*)로 제가 만든 화합물을 쥐에 주사한 후 암세포 크기가 줄어드는지를 확인하는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 인 비보(in-vivo) 테스트는 생체 내 실험으로, 살아 있는 세포를 이용한 테스트이다. 반대로 인 비트로(in-vitro) 테스트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페트리 디쉬 등 제어 가능한 환경에서 진행한 테스트다.

 

회로: 서울과 대전을 오가며 학위를 받으셨네요. 혹시 대전에서 서울로 옮겼다가 다시 대전으로 돌아온 이유가 있나요?

정인: 고려대학교 대학원은 제가 고집을 부려서 진학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할 때 수시에서 고려대학교에서 떨어졌던 한을 좀 풀고 싶었거든요. 제가 다닌 대전대학교에 한국화연(이하 ‘화연’) 박사님들이 많이 출강하셨는데, 방학 때 성적 좋은 학생들을 연구원에 데려가 실험실을 구경시켜주곤 했어요. 학부 졸업 후에는, 화연에 학연생(학생연구생)(*)으로 합격해서 화연 연구원장의 추천으로 고려대학교에 다니며 화연에서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화연과 고려대학교를 동시에 다녔죠.

 

(*) 학연생은 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는 학생으로, 학업과 연구를 병행해 정부출연연구소에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한다(박세준, 「‘일할 때는 근로자, 돈 줄 때는 학생’」, 2017.04.03, 주간동아). 학연생의 소속은 대학이지만 정부출연연구소에 출근해 상근직 연구원들과 함께 일한다. 그렇기에 대학에 지도교수가 있고 연구소에 지도 박사가 있어 동시에 지도를 받는다.

 

회로: 학연생 제도로 입학하면 화연과 고려대학교에서 동시에 돈을 받나요?

정인: 아니요, 돈은 화연에서 받아요. 고려대학교에서 월급은 따로 나오지는 않지만, 논문을 쓸 때마다 BK21(*)에서 인센티브는 받을 수 있었어요. 인센티브 수입이 생각보다 좀 짭짤해요. 제가 고려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학연생을 안 하고 풀타임으로 입학할지, 아니면 학연생으로 파트타임으로 공부하면서 화연에서 돈을 받을지 많이 고민했어요. 학연생은 다른 학교에 파트타임으로만 입학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입학하려던 해에 고려대학교 화학과가 BK21 사업에서 떨어졌어요. 돈을 얼마나 받느냐가 대학원생에게 굉장히 중요한 이슈인데, 고려대학교에서 등록금을 받을 수가 없게 된 거죠. 그해에 카이스트와 고려대 화학과는 BK21 사업에 떨어지고 충남대 화학과가 선정됐다고 기억해요. 그래서 충남대에 학연생이 엄청 많이 몰렸는데, 어떤 친구는 “언니, 나는 내가 수시를 보는 줄 알았어. 대학원인데 지원자가 너무 많아.”라고 말할 정도였어요.

 

(*) BK21 사업은 미래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 우수 대학원의 교육·연구역량 강화 및 학문후속세대 양성을 추진하기 위한 국가지원사업이다(출처: BK21 사업 홈페이지).

 

회로: 정인 님이 경험했던 학연생의 대학원 생활은 어떠셨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정인: 대학원 생활이 예상과 좀 달라서 많이 고생했습니다. 화연에서 하는 연구와 고려대학교에서 하는 연구가 너무 달랐거든요. 고려대학교에서는 이론적인 것을 훨씬 많이 배웠는데, 특히 저희 연구원 지도 박사님께서 저에게 굉장히 긴 커리큘럼을 짜 주셨어요. 석사에 입학하면서 제가 박사까지 할 거라고 말했거든요. 그 커리큘럼은… 지도 교수님이 의욕이 넘치셔서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봤어”란 느낌이었어요. 교수님께서는 신약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천연물 전합성(*)도 해봐야 하고, 조건 최적화를 시키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방법론(methodology)도 익혀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바로 신약을 개발하지 않고요.

 

(*) 전합성(total synthesis)은 상업적으로 이용 가능한 단순한 전구물질로부터 복잡한 분자(종종 천연물)를 만드는 완전한 화학합성이다. 전합성은 일반적으로 생물학적 과정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합성만을 뜻한다.

 

회로: 어떤 것들을 준비해두셨던가요?

정인: 연구원 지도 박사님께서는 방대한 실험을 준비해주셨고, 고대 지도 교수님은 방대한 이론 수업을 준비해주셨어요. 특히 고대 지도 교수님은 몸이 좀 편찮으시고 원래는 수업을 안 셨는데, 저를 학생으로 받고 나서 새 학생이 들어왔으니 수업을 하겠다고도 하셨어요. 또 저는 수업을 듣기 싫어서 가만히 있는데 입체화학 교재를 미리 사두셨다는 거예요. 그러니 어떡해요. 울면서 수업에 들어갔죠. 맨날 전화로 혼나고, 시험 못 봐서 혼나고. 입체화학에서는 모든 화합물을 3D로 봐야 하는데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내 눈엔 평면인데 자꾸 입체로 보라고 하니까… (웃음).

그때 주어진 공부를 다 하면서 이게 고등학교인가 대학원인가 하는 생각까지 했어요. 강의를 3시간 연속으로 듣는데, 학교에서 백날 배우고 시험을 보아도 내 연구에 접목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화연에 있는 박사님들에게 많이 상담받았습니다. 화연에서도 오랜만에 학생이 들어왔으니 신약을 많이 개발시키고 싶었는데, 고려대학교에서는 이론 수업으로 좀 더 공부하길 바라셨던 거죠. 지도 교수 2명이 합의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고려대학교 지도 교수님이 화연 출신이어서 의견은 잘 맞았어요.

 

회로: 말씀하신 방법론은 어떤 방법론인가요?

정인: 반응 조건을 최적화하는 방법론을 말하는데요, 신약을 개발하려면 방법론과 전합성을 모두 공부해야 해요. 석사 때 지도 교수님께서 준비하셨던 커리큘럼 중 하나가 의약품합성화학에서 여러 방법론을 활용해서 같은 유도체(*)들을 계속 합성하기였고요. 그다음에 한 화합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드는 전합성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정말 일을 많이 했어요. (웃음)

 

(*) 유도체(derivative)는 화합물의 일부를 화학적으로 변화시켜서 얻는 유사한 화합물이다(출처 : 두산백과). 예를 들어, 메탄올과 에탄올은 모두 알콜 유도체다.

 

회로(우연): 저도 학부 때 전합성을 하는 연구실에서 개별 연구를 한 적이 있어요. 만든 화합물을 분리하기 위해 칼럼을 내리면(*) 합성해 놓은 결과물이 다 망가져 있고 그랬어요. 그때 제가 실험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정인: 분명히 칼럼을 내리기 전에는 물질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분리하고 나면 서로 다른 물질 네 개가 있는 상황이 발생하곤 했죠. 저는 정말 석사 입학하고 나서 1년 반 동안 실험이 너무 안 됐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학연생들은 연구소 프로젝트와 랩 프로젝트를 다 해야 해요. 그런데 화연에서 하는 게 너무너무 안 되는 거예요. 지도 박사님은 제 손이 똥손이라면서, 저 손 어떻게 하냐고 구박하지. 저도 다른 손을 어디서 구해와서 잘라 붙여야 하나 생각했어요. 너무 실험이 안 되니까, 실험실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벤치를 걷어차면서 “아 xx, 못 해먹겠네!”라고 소리쳤어요. 그런데 건너편에 지도 박사님이 계셨던 거에요. 뭘 꺼내려고 숙이고 계셨던 거죠. “정인 씨 미안해, 내가 너무 괴롭혔구나. 안 그럴게…”하고 나가시더라고요. (웃음)

 

(*) 칼럼(column)은 혼합물에서 단일 물질을 분리하는 크로마토그래피(chromatography)의 한 방법이다. 보통 긴 실린더를 세로로 두고 중력을 이용해 분리하기 때문에 ‘칼럼을 내린다’고 표현한다.

 

회로: 아찔한 순간이기도 하네요. 그 실험은 결국 어떻게 해결되었나요?

이후에 지도 박사님께서도 실험이 안 되는 이유를 알아보신다고 서울대 약대에 출장 가셨어요. 박사님께서, 지금은 계신 서울대학교 약대 김득준 교수님 연구실 출신이었거든요. 가서 “넌 그것도 모르고 애한테 실험을 시켰냐”고 혼나셨대요. 알고 보니 원래 안되는 실험이었던 거에요. 그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논문 주제 바꾸자고 하셔서 부랴부랴 바꿨죠. 처음 하던 실험이 안 되는 바람에 다른 방법론으로 합성해서 냈는데, 뒤에 게 너무 잘 돼서 두 편으로 나눠 냈어요. 학연생이 좀 힘든 게 석사 졸업을 하려면 SCI 논문으로 1저자나 2저자가 나와야 해요(*). 졸업을 못 할 뻔했죠.

 

(*) SCI(Science Citation Index, 과학인용색인)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학술지들을 모은 색인이다. ‘SCI 논문’은 SCI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을 말하며, 많은 이공계 대학원에서 졸업요건을 SCI 논문과 관련지어 제시한다. 논문에 많이 기여한 저자일수록 저자 목록 앞에 위치한다.

 

회로: 졸업요건을 못 채워서 졸업을 미루는 경우도 있나요?

정인: 생각보다 많아요. 저는 그때 석사를 졸업해야 했고 박사 진학도 약속이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6개월밖에 안 남았고 1년 반 동안 했던 실험은 안 되니까 난리가 났죠. 그런데 연구원에서 지도받는 장점은, 연구원의 지도교수님들은 학연생들의 학교 지도 교수님들과 싸워가면서도 자신이 맡은 학생들을 잘 키워낸다는 거예요. 자신이 맡은 학생이 졸업을 못 하거나 유예되면 담당 박사가 일정 기간 학생을 못 받는 페널티가 있거든요.

 

회로: 학생을 받는 게 많이 중요한가 보네요.

정인: 그럼요. 학생을 받으면, 연구실 인력도 충원되고, 연구원의 교수님에게도 학생을 지도했다는 경력도 쌓여요. 그 경력이 쌓여야 UST나 다른 학교에 겸임교수로 나갈 수 있어요. 그래서 화연 지도교수님도 상황이 급했어요. 그래서 지도 박사님과 논의해서, 실험을 거친 화합물을 모아 놓는 테이블(표)을 3개쯤 채워서 졸업하기로 했어요. 그 테이블들을 채우려면, 재현 실험까지 해서 최소 36번의 실험을 해야 하더라고요. 근데 그 실험을 완성하기 위한 세부실험이 4번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이 36번이지, 실제로는 144번 실험해야 했어요. 한 달 동안 매일매일 실험해도 빠듯했어요. 그 와중에 10월에 박사 과정 지원서를 내고 기말고사도 보고. (웃음)

 

회로: 대학원 학위 과정 동안 한 연구를 조금 더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정인: 제 연구는 유기화학 분과에 넓게 걸쳐 있었어요. 천연물 전합성은 마크로사이클(macrocycle)이라고 12각형 또는 9각형 고리들을 가지고 했어요. 팔라듐(Pd)이나 루테늄(Ru) 원자를 포함하는 촉매도 많이 합성했고요. 걔들은 제 친구예요. 의약품 쪽에서는 특히 피리미딘 계열 항암제(*)를 개발하는 연구를 했어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석사 때는 헤지옥 시그널링 패스웨이(hedgehog signaling pathway)라고 줄기세포를 죽이는 연구를 했어요. 그때 줄기세포가 연구 주제로 막 핫할 때였거든요. 박사 때는 ALK 인히비터(**)를 연구했어요. 폐암 중에 유전자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비소세포폐암이 있어요.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아이건 노인이건 여성이건 상관없이 유전자 돌연변이로 폐암에 걸려요. 저희 팀은 특정 유전자 변이로 일어나는 암만 연구했어요.

암은 수술하면 웬만큼 살아요, 현대에는. 담배를 피우거나 술 먹고 암에 걸린 사람들은 수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평소에 정말 건강하게 생활하다가 유전자 변이로 암에 걸리면 살기 힘들거든요. 그래서 보통 화연 같은 정부출연연구소에서는 그런 희귀암을 많이 연구해요. 박사 때는 ALK 인히비터를 중점적으로 연구해서 논문을 냈어요. 제가 졸업한 이후에도 후속연구가 계속 나오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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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 님이 주로 합성했던 화합물의 코어 구조. 의약화학에서 유도체를 합성하는 연구란 화합물의 R1, R2, X 위치에 다양한 구조를 붙이는 연구다. 사진: 윤정인

 

(*) 피리미딘 계열 항암제는 DNA의 구성요소인 피리미딘과 비슷한 분자 구조를 가진 항암제다. 이 항암제는 DNA 복제 과정에서 피리미딘과 경쟁해 암세포 증식을 억제한다.

(**) ALK 인히비터란 ALK 유전자로부터 발현된 유전자 변이로 생긴 종양에 작용하는 잠재적 항암제를 말한다. (출처 : Nelsen (2010). “ALK Inhibitors: Possible New Treatment for Lung Can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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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 님이 출판했던 논문 갈무리

 

회로: 그럼 계속 같은 계열의 연구를 하면서 학교를 옮기셨네요. 충남대에서 박사를 하면서 지도 교수님이 바뀌었을 텐데도 연구 방향이 안 바뀌는 게 신기해요.

정인: 충남대학교로 박사를 옮기면서 지도 교수님이 늘었을 뿐이죠. 이게 학연생의 특징이에요. 나의 소속 대학과 관계없이 수업을 듣고 싶은 곳에서 수업을 들고 학위를 딸 수 있어요. 같은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으니 연구 방향은 크게 안 바뀌어요.

 

회로: 그럼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다시 대전으로 돌아온 이유가 무엇인가요?

정인: 학교가 집에서 머니까 다니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리고 사실 고대에 약대가 있었으면 고대에 진학했을 거예요. 어느 학교로 박사를 진학할지 교수님들께 상담을 요청하니, 만약 포닥(*)을 외국에서 할 생각이 있으면 국립대가 낫다고 말씀하셨어요. “국립(National)” 자가 들어가 있으면 좋다는 거죠. 그래서 충남대학교로 진학했는데, 포닥을 외국으로 나가지 못했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고려대학교에 있을걸. (웃음)

 

(*) 포닥(post-doctoral, 박사 후 연구원)은 많은 박사 졸업생이 연구자로 성장하려 거치는 임시직이다.

 

박사 과정의 결혼, 출산, 육아

 

회로: 정인 님의 브런치 연재 글(*)에는 박사 과정 중에 시작한 결혼, 출산, 육아 이야기가 많은데요, 그에 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정인: 그때 잘못 선택한 것 같아요……. (웃음) 원래 제가 26살, 27살 즈음에 결혼하고 싶어 하긴 했어요. 석사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학생 때 결혼하고 싶어 했거든요. 할 거면 빨리하고 싶었는데, 유학 갈 때 가족과 같이 가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어렸을 때 유학생인 부모님 따라 해외에서 살았던 친구가 많았어요. 그게 부러워서 저는 제 아이에게도 그런 경험을 주고 싶어서 결혼을 빨리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때쯤에 랩에 저희 지도 교수님을 포함해 남자 박사님이 6분 정도 계셨는데 저를 꼬드기기도 했어요. ‘이제 결혼을 할 때가 됐다. 결혼해라.’ ‘우리가 도와주겠다.’, ‘우리가 출산휴가 해줄게.’, ‘우리가 케어해줄게.’, ‘너 나가면 아기 못 낳는다’는 둥 얘기하면서 다들 외국 나가기 전에 낳아야 한다고 하셨죠. 그때는 그냥 그렇구나 했는데, 저 사람들은 다 남자였던 거에요. 자기들은 애를 직접 안 낳고 안 키웠어요. 제가 그 생각을 못 했죠.

그러다가 진짜 애가 생겼어요. 아기를 정말 가지고 싶었던 박사 2년 차 때는 안 생기고, 이제 졸업하고 외국에 포닥을 나가려고 하는 3년 차 때 생겼어요. 교수님은 육아휴직하고 그냥 논문만 쓰라고 하셨는데, 말이야 쉽죠. 데이터가 전부 연구소에 있는데, 어떻게 밖에 나가서 논문만 써요. 어떻게든 연구실에 나와서 썼어요.

 

(*) 정인 님은 브런치에서 『엄마 과학자 생존기』라는 제목으로, 결혼, 임신, 육아, 출산이 여성 과학자에게 끼치는 영향을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 쉽게 소개하고 있다.

 

회로: 결혼은 어떻게 하셨나요?

정인: 신랑과는 대학생일 때부터 캠퍼스 커플이었어요. 고려대학교 연구실을 소개해준 선배이기도 했고요. 알고 보니 자기네 연구실이었어요, 세상에. (웃음) 입학하니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같은 학부를 다니던 선배들 다수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뭐야 여기는, 학부야? 이러다가도, 그 선배들이 있어서 석사를 그만두지 않았던 거 같아요. 학교가 바뀌면서 적응이 쉽지 않았는데 먼저 들어가 있던 선배들이 마음을 다잡아준 거죠. 또 체력적으로 많이 힘든 시기이기도 했어요. 목요일 오전까지 화연 연구실에서 실험하다가, 수업 들으러 목요일 오후에 서울에 올라가서 토요일까지 있다 오고.

그때 너무 힘들어서 심신을 위해 결혼했어요. 제가 저희 신랑한테 프러포즈했는데, 그때가 제 석사 연구 실험은 안 되는 실험이라는 걸 확정받은 6월이었어요. 남자친구였던 지금 남편이 데이트하러 저희 연구실에 왔어요. 어차피 자기도 화연 출신이니까 주말마다 저와 연구실에 같이 출근했죠. 신랑도 합성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칼럼 좀 받아달라고 하고 그사이에 저는 NMR(*) 찍으러 갔다 오고. 주말에 나온 박사님들께서 저희를 흐뭇하게 보면서 “연애는 저렇게 하는 거다. 정말 훌륭한 학생들이다.” 하셨어요. 저희가 잘못된 선례를 만들고 나죠. (웃음)

 

(*) NMR(Nuclear Magnetic Resonance, 핵자기공명분석법)은 원자핵을 특정 주파수의 전자기파와 공명시켜 분자 구조를 분석하는 분광법이다.

 

회로: 그러다가 프러포즈하신 거예요?

정인: 네, 그때 같이 실험하면서 마음이 많이 위로됐어요. ‘아! 이 사람은 칼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NMR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내 인생에 가장 필요한 사람이다!’하는 생각이 들어서 프러포즈했어요. 냉정하게 생각해서 제가 만약에 박사급 인력이 돼서 혼자 연구실을 꾸렸는데 인건비가 없다면, 누구를 고용할 수 있겠어요? 그때 와서 NMR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인 이 남자에게 의지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물어봤죠. 결혼할 거면 박사 1년 차 때 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했더니 좋대요. 저희 그렇게 결혼했어요. 저희 시부모님은 모르세요. (웃음) 결혼식 날짜도 제가 기말고사 마지막 날로 잡았어요.

 

회로: 졸업할 때는 아이가 몇 살이었어요?

정인: 애가 돌일 때 제가 박사 졸업했어요. 박사 막바지에 애 낳고 3개월 쉬고 바로 복귀해 미친 듯이 논문을 썼죠. 졸업하려고요. 충남대 약대 논문심사 절차가 좀 복잡해요. 영어시험성적을 내야 했는데, 제 성적이 만료된 거예요. 그래서 토익도 공부했어요. 기준 점수만 나오면 되니까 나올 때까지 매주 보고. 예비 심사라고 졸업 한 학기 전에 발표해야 해서 그것도 애 낳고 복귀하자마자 하고.

 

회로: 아까 포닥을 나가려고 하셨다가 안 나가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결정에 관한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정인: 저는 해외로 포닥을 나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이를 낳고 나서도 당연히 해외로 나가야지, 생각하다가 신랑에게 이야기했어요. 좀 고민이 되었던 점은, 약대 출신들이 돌아와서 교수를 꿈꾸는 게 아니면 포닥을 잘 안 나가요. 당시에 의약품화학 펀딩이 많이 줄기도 했고요. 주변 박사님들께서 ‘너 포닥 못 나가면 우리 랩에서 받아 줄게’하고 이야기해주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그래도 일단은 밖으로 나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신랑에게 제 계획을 이야기했죠. “여보, 아이가 돌 밖에 안 됐으니까 당장 데리고 나가는 건 너무 힘들 것 같고 내가 먼저 나가서 6개월 동안 자리를 잡을 테니 당신이 왔으면 좋겠어. 나가서 늦어도 6개월, 빠르면 3개월이면 자리를 잡으니까. 내가 데일리 케어센터까지 좀 알아 볼게.”라고 말했어요.

이후에 한동안 신랑이 그 이야기를 피하더라고요. 나중에는 신랑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어한다는 점을 알게 됐어요. 본인은 이 안정된 삶이 좋은데, 굳이 힘든 삶을 살기 싫었던 거죠. 그래서 제가 “그럼 아이는 두고 갈 테니까 나 혼자 갔다 올게, 1년만 참자.”고 하니까 정색을 하더라고요. 결론은 본인은 외국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거였어요. 저희 신랑이 그때 회사에서 대리 달고 과장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저랑 나가면 본인 경력이 단절되는 거니까요. 아이랑 둘이 있는 것도 자신이 없고요.

한참 이야기하다가 그냥 제가 접었어요. 포닥을 나갔다가 제가 일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 제가 박사 학위가 있으니까 조금 더 업계에서 살아남겠지만 지금 남편이 잘 나가는 건 맞고. 의약화학계는 남자들이 훨씬 잘 나요. 특히 석사 남성 연구 인력이 수요가 많고, 페이도 좋아요. 승진도 빠르고요. 테크니션이 많이 부족한데 남자 석사가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돈과 관련된 현실적인 고민도 있었어요.

제가 만났던 박사님들의 사모님들을 보면 되게 잘 나가셨던 분들이 많아요. 동아제약, 종근당 등 유명 제약회사에서 근무하셨던 분들. 그런데 그분들이 남편 박사 공부하는 동안 다 뒷바라지하다가 포닥을 같이 갔다 오면 일을 안 하세요. 사실 못 하는 거죠. 업계로 못 돌아가니까. 그 잘났던 여성 연구원들이 나갔다 오면 다들 주부가 돼요. 취업 시장에서 기혼 여성을 반기지 않아요. 업계를 옮기지 않는다면요.

 

회로: 보통 어디로 옮기나요?

정인: 연구재단으로 많이 가요. 기획 분야나 사교육 시장으로도 가고요. 학위가 있으니까 학원 시장으로 가면 많이 좋아하죠. 저는 심지어 수능을 다시 봐서 교대에 입학한 다음에 임용고시 본 분도 봤어요. 이게 현실이에요. 이런 사례를 많이 접하다 보니까, 저 스스로도 자신이 없어졌어요. 1년, 2년 후에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와서 직장을 구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신랑은 확실하게 교수할 마음이 있는 게 아니면 싫다고 했고, 저는 교수가 될 마음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취업으로 돌렸어요.

 

회로: 그때가 2015~2016년쯤일 테고, 지금은 2020년인데, 앞으로 과학자로서의 꿈은 뭐에요?

정인: 사업? (웃음)

 

회로: !

정인: 저는 실험실에서 TLC를 찍어야지만, 내가 현장 과학자라고 많이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현장 과학자라는 자리를 놓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굳이 거기에 집착할 필요는 없겠더라고요. 과학자라는 정체성은 내가 어떤 형태의 직업을 갖던지, 하고자 했던 연구 범주에 몸만 두면 된다고 마음이 많이 바뀌었어요. 제가 힘드니까요. 그래서 현장을 좀 확대해서 사업을 해볼까 생각했어요.

전에 있던 회사에 마음 맞는 엄마 직원이 한 분 있어요. 경영 담당이셨는데 우리끼리도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둘이 자주는 못 만나지만 매일과 카톡으로 사업계획서 주고받으면서 준비하고 있어요.

 

시민단체 활동가 윤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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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하는 엄마들. 사진: 윤정인

 

회로: 과학 이외에도 정인 님께서 여러 사회활동(정치하는 엄마들, ESC젠더다양성위원회(이하 젠다위) 위원장, 정의당 세종시당 부위원장)을 한다고 알아요. 정인 님이 활동하는 단체들을 소개해주세요. 어떤 계기로 들어가셨나요?

정인: 〈정치하는 엄마들〉은 제가 첫 번째 회사를 때려치우고 자괴감 때문에 고생했을 때 시작했어요. 그때 저는 제가 그만둔 이유가 납득이 안 됐어요. 내가 화나서 나왔지만 내가 왜 회사에서 밀려났는지, 왜 상사나 동료들의 평가가 안 좋았는지 질문 한마디 못 하고 나왔는지 억울했어요. 그래서 몇 달 동안 심란했는데, 장하나 전 국회의원이 쓴 칼럼을 읽었어요(*). 그 칼럼에서 임신한 순간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죄인이 된 기분에 공감했어요. 애 낳고 대학원생 내내 저도 잉여인간이 된 것 같다고 많이 생각했거든요. 자꾸 실험실에서 사람들에게 미안한데 이것 좀 해달라고 부탁하고. 제가 제대로 된 사람으로 안 느껴지는 거예요. ‘나만 느꼈나? 나만 성격이 좀 그런가?’했는데 장하나 언니가 쓴 글에 꽂혔어요. 이후에 우리 한번 만나자며 구글 설문 폼이 떠서 사람들을 만나러 갔어요.

그렇게 처음 만난 게 2017년 4월 21일이었을 거에요. 여성 플라자에서 처음 만났는데, 별거 없었어요. 그 칼럼 보고 온 사람들이 모여서, 왜 우리는 다 죄인처럼 있었나 이야기하다가, 우리가 잘못된 게 아니고, 우리가 이상한 게 아니고, 엄마가 되는 순간 사회적 약자가 되는 건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이걸 바꾸려면 이 사회에 사는 우리가 모두 양육자의 시선에서 생각해봐야 한다는 목적이 생겼고요. 〈정치하는 엄마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비영리 단체에요. 캐치프레이즈는 ‘우리 모두가 엄마다’. 출산하거나 임신한 여성만이 아닌 모든 어른이 양육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엄마의 시선에서 세상을 보고 싶었어요.

 

(*) 장하나, 「엄마들이 정치에 나서야만 ‘독박육아’ 끝장낸다!」, 2017.03.25, 한겨레

 

회로: 이번 21대 총선에서, 정치하는 엄마들에서 조성실(정의당), 이소현(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후보가 랜선 캠프로 꾸렸던데요.

정인: 랜선 캠프는 텔레그램으로 꾸렸어요. 저희가 다들 엄마라서 할 일이 없어요. 육아휴직 중이거나 회사를 그만뒀거든요. 다들 직장인으로 잘 훈련됐는데 할 게 없는 거죠. 출판 업계에 있던 사람,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사람, 디자이너였던 사람, 옷 만드는 사람이었는데, 아이 낳고 쉬고 있는 거죠. 그래서 교회 동생이 비례대표 후보들 따라다니면서 영상 찍고, 서류 챙겨주고, 디자인 쉬고 있는 디자이너들이 웹자보 만들고, 소규모 온라인 팬클럽에서 부시샵(*) 경력이 있는 제가 온라인 조직을 하고요.

 

(*) 부副시샵은 천리안 시절 초창기 온라인 팬클럽에 있던 직책이다. 요즘 온라인 카페 부매니저와 비슷한 직책이다.

 

회로: 주로 정치하는 엄마들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주세요.

정인: 저희는 엄마가 관심 가지는 모든 일을 해요. 미세먼지, 환경, 사교육 등등. 국회에도 자주 출동하고요. 〈ESC〉는 〈정치하는 엄마들〉 활동하다가 알게 됐어요. 저는 〈정치하는 엄마들〉 활동에서 하면서도 과학기술인이니까 이공계 젠더 감수성에 예민했어요. 과학기술계의 남초 문화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2017년 9월 이후에 〈ESC〉 가입했어요.

 

회로: ESC젠다위 위원장은 어떻게 맡게 되신 건가요?

정인: 저는 원래 〈ESC〉의 청년위원회 과학기술법 스터디에 참여했어요. 그러다가 사람들을 점점 알게 되고, 사무국장과 밥을 먹다가 제안받았어요. 과학기술계의 젠더 이슈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하는데도 잘 이야기되지 않아요. 여성과학자들이 젠더를 이야기하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요. 젠더 이야기를 하는 순간부터 남자 연구원들에게 지고 들어간다고 느끼곤 하니까요. 왜냐하면, 남성들은 결혼, 임신, 출산과 관계없이 잘 먹고 잘사는데, 우리는 항상 결혼, 임신, 출산에 걸리잖아요. 노처녀 교수면 노처녀라고 한 소리 듣고. 그렇기 때문에 각종 편견들을 뛰어넘기 위해서 엄청난 연구를 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 탑까지 가신 분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젠더를 이야기하면, 그분들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 들인 노력이 무너지는 거예요. 예를 들어 유기합성 실험실은 무거운 걸 많이 들어요. 40L짜리 수소 통, 용매 통 등 여자들이 그냥 다 들어요. 그런데 힘쓰는 일은 남자들이 더 잘 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해달라고 하기 싫은 거예요. 그러니까 다들 그 “여성임”을 버리죠. 공구질 하면서 내가 여자여도 이런 걸 할 수 있다고 어필해야 하는 상황이 오다 보니까 더 그렇죠. 87년생인 제가 이렇게 느끼면서 살아왔는데 저보다 나이 많은 분들은 어떻게 느끼겠어요.

그러다 보니 과학기술계에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산 여성이 많아요. 그 정도 비범하지 않으면 여성과학자로 이름도 못 내미는 현실인 거에요. 근데 저는 살아보니까 그런 ‘슈퍼우먼’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정치하는 엄마들〉에서 활동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할 수 있다면 과학기술계에도 하면 좋겠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젠다위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었어요.

 

회로(선희): 저는 처음에 들어갔을 때부터 임신부 연구자 사업이 너무 좋았어요.

정인: 임신부 연구자 사업은 제가 정말 하고 싶었는데, 다들 좋게 봐주셨어요. 과학기술인의 젠더 이슈가 엄청난 능력으로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임신해도 현장에서 연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제가 이전에 일하던 스타트업 회사에서 연구실을 차리면서 알았는데, 외국에는 휠체어를 탄 사람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실험실을 설계하는 규정이 있어요. 국내에는 없고요.

그때 마침 시민단체 활동을 하다가 해외에 있는 여성과학자 한 분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분께서 외국에는 임신부 연구복이 있다고 알아봐 주시고, 사진도 찍어서 보내주시고, 가격도 알아봐 주시고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ESC〉 젠다위는 앞으로도 소소하고 평범한 이야기를 계속할 계획이에요. 존재하기는 하는데 우리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는 여성으로서 겪은 이야기와 사연을 모아보자 제안이 나왔어요. 그래서 ‘여성과학기술인과의 대화’라는 가제로 토크콘서트 사업을 준비 중이기는 한데 코로나 때문에 멈췄어요.

 

회로: 정의당 세종시당 부위원장이 되신 이야기도 해주세요.

정인: 〈정치하는 엄마들〉 활동가끼리 정치란 무엇인가 많이 이야기했어요. 국회의원, 보좌관이 되는 것만이 정치인가? 시민단체도 정치적인 활동이잖아요. 또 마음에 맞는 정당에 후원하거나 민원실에 항의하는 것도 정치적인 활동이고. 각종 단체에서 운영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으니 사소한 것부터 바꿔보자는 말을 했어요. 저는 노회찬, 심상정 의원이 방송에 나와서 말하는 게 좋아서 정의당에 후원했어요. 그러고서 조용히 있었는데 세종시당에서 연락을 받았어요. 이 동네에 30대 청년이 없다고 같이 하자고 해서요. 저희 신랑이 저보고 일을 몰고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회로: 이제까지 많은 이야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께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요?

정인: 막 비범해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여성 후배든 남성 후배든, 과학기술인이라는 직업군이 주는 무게가 무겁잖아요. 뭔가를 업적으로 남겨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참 부담스러워요. 박사 하고 나면 그 부담감이 되게 크거든요. 그런데 제가 해보니까, 그 부담감에 사람이 눌리면 머리가 어차피 안 돌아가요. 모두 재미있게 살면 좋겠어요. 재미있게 하루하루를 존재하고 버티는 것 자체로 이미 평범을 넘었다고 생각해요. 꼭 엄청난 연구가 아니라, 내가 즐겁고, 필요하고,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꼭 벤치(실험실 책상)에 앉아야만 전공을 살리는 게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임신한 순간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죄인이 된 기분을 느꼈다는 정인 님. 그리고 그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었다는 정치하는 엄마들. 사회의 부조리함을 지속적으로 꼬집고 다양한 방법으로 싸우는 정인 님과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더 나아진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 여성이라서 혹은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양육자라는 이유로 죄인이 된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오길 바라면서 그가 만들어갈 사회를 기대해본다.

028: “나만 억압당하지 않을 수는 없다”, 전남대 페미니스트 모임 〈F;act〉

Feminist in STEM 페미회로인터뷰 프로젝트 028: 나만 억압당하지 않을 수는 없다”, 전남대 페미니스트 모임 F;act

 

〈F;act〉는 2017년부터 전남대에서 활동한 페미니스트 모임이다. 전남대의 〈사회문제연구회〉와 교지 〈용봉〉편집위원회와 함께 여러 차례 세미나를 개최했다. 또한 꾸준히 낙태죄 폐지, 탈코르셋 등 다양한 주제로 부스를 열어 일반 학우들을 만나려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최근에는 전남대 법전원 성폭력 사건에 대응해 대자보를 게시했다.

 인터뷰어 한솔이 보기에, 〈F;act〉가 페미니즘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은 〈사회문제연구회〉, 〈용봉〉과도 꾸준히 소통해온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 말고 다른 이들을 만나는 〈F;act〉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지난 3월 말 〈F;act〉를 만나보았다.

 인터뷰어인 페미회로의 지냥이, 한솔은 회로, F;act의 인터뷰이 말리, 비탕, 승옥 님은 말리’, ‘비탕’, ‘승옥으로 표기했다. 교정은 페미회로우연, 위선희, 한솔, 희수, 발행은 페미회로의 배현주, 우연(이상 가나다순)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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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중인 승옥, 말리, 비탕님. 사진: 페미회로

 

F;act활동 전의 승옥, 말리, 비탕

 

회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승옥: 〈F;act〉에서 활동하고 있는 승옥입니다. 철학과입니다.

말리: 〈F;act〉에서 활동하고 있는 말리입니다.

비탕: 전남대학교 페미니즘 학회 〈F;act〉에서 활동하고 있는 비탕입니다.

 

회로: 반갑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동기를 소개해주세요.

승옥: 이번에 〈F;act〉 운영위원회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말리와 비탕 님이 대외활동하는 것이 색다른 경험이 될 거라고 제안해 주셔서 참여했습니다.

말리: 〈F;act〉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전남대에서는 페미니즘 이야기를 할 곳이 〈F;act〉 말고는 거의 없어서 같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사전질문지를 읽어보니 〈F;act〉가 해온 활동과 제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F;act〉 활동에 임했는지 정리할 수 있었어요.

비탕: 제가 원래 사람 만나기를 좋아해요. 페미니즘 이야기를 할 곳이 〈F;act〉밖에 없던 차에 <페미회로> 인터뷰 요청을 받았습니다. 〈F;act〉를 홍보하고 지금까지의 활동을 정리하자는 의미로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회로: 각자 페미니즘을 어떻게 만났는지 소개해주세요.

승옥: 고등학생 때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페미니즘이 수면 위로 오르면서, 인터넷에서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어요. 살면서 불합리하다고 여겼던 것이 페미니즘으로 설명되는 게 신기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인터넷에서는 싸움과 대립이 너무 심하잖아요. 역설적이지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F;act〉에 들어갈까 말까 엄청 고민했어요. 〈F;act〉에서 어느 한쪽 주장만 지나치게 할까 봐요. 그런데 〈사회문제연구회〉에 가입해 〈F;act〉에서 활동하던 말리 님께 이것저것 물어보니, 〈F;act〉가 한쪽 주장만 듣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해, 〈F;act〉도 거의 동시에 가입하게 되었어요.

〈F;act〉에 들어가기 두려웠던 이유는, 당시 제 표현으로는 페미니즘을 표방한 ‘혐오’가 걱정되어서였어요. 말리 님께는 이에 관해 슬쩍 얘기를 던져봤어요. 남성 학회원은 있는지, 소수자를 배제하지는 않는지 에둘러 물었던 것 같아요. F;act에 가입한 이유는 간단해요. 동아리의 목적인 소수자 배제 없는 페미니즘이 제 지향점이 같았고 배울 점이 많아 이곳에서 학습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말리: 고등학교 때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제가 다니던 대안학교에서도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었어요. 성폭력 사건에 학교가 제대로 대처하지 않은 점에 졸업생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있었고,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재학생들 간 성폭력 사건이 있기도 했어요.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을 접했고, 성폭력 사건을 주제로 재학생들과 이야기하면서 페미니즘에 더 관심을 갖고 공부했어요. 2017년에 대학에 들어오니 마침 〈F;act〉 회원모집 공고가 붙어있었어요. 한 학기 정도 고민하다가 들어왔어요. 대학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또 새로운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어요.

 

회로: 비탕 님의 경험도 듣고 싶어요.

비탕: 저는 1년에 제사 15번씩 지내는 집의 장손녀로 태어났어요. 살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들이 하는 차별 아닌 차별들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저는 ‘장손녀’인데 저보다 다섯 살 어린 남동생은 ‘장손’이 되거나, 제사상 준비는 여자들이 다 하는데, 막상 제사나 차례를 지낼 때는 우리는 처음에 조상님 들어오실 때와 떠나실 때만 절하던 일이 기억나요.

원래는 그런 차별에 많이 한탄했어요. ‘내가 남동생처럼 장손으로 태어났으면 달랐을까?’하는 생각에 명예남성의 길을 열심히 걸었어요. 남자처럼 행동하고 남자들과만 어울리고 여자애들 괴롭히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아무리 이 길을 걸어도 나는 결국 남자가 못 되는데 내가 진짜 남자가 될 수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고 이상했어요. 제가 노력한다고 바꿀 수 없는 문제를 제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저 자신과 남을 상처 주던 행동들이 이상했어요. 뭔가 잘못됐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죠. 나중에는 젠더 체계와 나의 성별에 이상함을 오랫동안 느꼈는데, 이건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그 뒤로는 두루두루 어울리고 ‘여성스러운’ 취미도 많이 가졌어요. 그런데 또 여자라고 무시당하기는 싫었어요. 그래서 남자들이 저를 무시하거나 얕볼 수 없게 소위 말하는 조폭 마누라, 당찬 여성, 걸크러쉬의 길을 걸었죠. 그렇게 언어가 없이 살다가, 여러 문제 겹쳐지면서 힘들어서 휴학했어요. 당시에는 페미니즘을 몰랐기 때문에 저의 행동들을 ‘걸크러쉬’나 ‘당찬 언니’같은 단어로 수식하는 것에 거부감이나 의문은 없었어요. 오히려 그런 말을 들을수록 뿌듯함을 느꼈고요.

복학할 때쯤 강남역 살인사건이 터졌고 페미니즘이라는 언어를 얻었어요. 그렇게 언어를 얻고 복학했는데 화장실에서 페미니즘 동아리가 생긴다는 공고를 봤어요. 그때 한창 미러링이 심할 때여서 처음에는 저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동아리에 들어갔더니 닭발 뜯으면서 ‘한국남자들 죽어라, 그러고 있으면 어떡하지?’ (웃음) 저는 폭력적인 상황과 혐오표현들을 불편해하거든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사람들도 다들 너무 좋고 체계화된 텍스트를 읽고 있어서 지금까지 〈F;act〉에서 활동하게 됐습니다. 〈F;act〉를 처음 만든 분은 졸업하셨어요.

 

회로: 서로 다른 사회운동 분야지라도 사람은 어느 정도 겹치곤 하는데, 다른 운동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로 페미니즘 운동에서 덕을 보기도 했나요? 다른 운동 경험이 페미니즘 운동에 도움이 된다고 느끼시나요?

비탕: 저는 중학생 때부터 인권동아리에서 활동했어요. 고등학교에서는 공부하느라 많이 활동하지는 못했지만 5.18 관련 행사에 개인으로 참여하기도 했어요. 대학에 와서는 사회운동을 꼭 해보고 싶었어요. 대학 로망처럼요.

어쩌다 보니 1학년 때 풍물패에서 활동했는데, 당시 풍물패에서는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서슴지않았어요. 이에 문제제기하면 “너는 그걸 왜 농담으로 못 받아들이냐”는 분위기였어서 풍물패 활동을 접었어요.

이렇게 사람을 많이 만나면서, 동아리나 단체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사업이 어떤 맥락으로 이어져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하는지 많이 배운 것 같긴 해요. 동아리나 학회에서 세미나를 진행할 때 어떤 흐름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알기 어려운데, 말하자면 커리큘럼 짜는 법을 배웠던 것 같아요. 제가 활동했던 풍물패는 매월 농민 연대에서 경제, 경제에서 노동 운동으로 잇는 식으로 1년 단위의 주기가 있었어요. 이런 주기를 그대로 쓰지는 않고 변형해 〈F;act〉 활동에도 잘 적용하고 있습니다.

 

회로: 말리 님의 이야기도 더 들어보고 싶어요.

말리: 〈F;act〉에 들어갈 때 거의 동시에 〈사회문제연구회〉에도 들어갔어요. 〈F;act〉와 활동이 계속 겹쳤죠. 어떤 사람들은 페미니즘이 여성만의 문제에만 관심 있다고 생각하곤 하죠. 〈F;act〉에서도 여성만의 문제를 다루지는 않지만, 경제나 노동을 공부하기에는 <F;act> 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사회문제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배운 것을 다양한 여성들의 상황에 연관 지어 분석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제 분석 틀이 넓어졌다고 느껴요. 여성문제를 다루며 부족한 논리를 〈사회문제연구회〉에서 한 공부로 메꾼 거죠. 두 활동을 병행하면서 좀 더 풍부하게 알아간다고 느꼈어요. 지금은 〈사회문제연구회〉를 졸업했지만, 사회와 떨어진 여성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공부해 나가고 있어요. 사회에서 여성들은 어떤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어떤 고통을 겪고 있을까 이런 것들을 폭넓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은 것 같아요.

 

회로: 사회문제연구회에서도 페미니즘 관련 문제를 다루기도 하나요?

말리: 네. 그런데 〈F;act〉는 활동하는 사람이 적은 동아리다 보니 대부분 사람이 계속 같이 활동해 오면서 쌓인 통일된 의견이 있는데, 〈사회문제연구회〉는 〈F;act〉에 비해 여성문제에 관해 통일된 의견이 적어, 다양한 관점과 의견을 접했어요.

 

회로: F;act사회문제연구회와 같이 세미나를 진행한 적이 있나요?

말리: 2017 전남대학교 사이다포럼(‘대학생, 사회를 이야기하다’), ‘2018 제7회 대학생 사회포럼 in 광주’ 등 2017년부터 약 2~3년 동안 연말에 합동 세미나를 진행했어요. 〈F;act〉는 성별임금격차에 관한 연구, 〈사회문제연구회〉는 플랫폼 노동자(*)에 관한 연구 등 각 학회에서 1년 동안 중점적으로 연구한 것을 발표했어요. 〈용봉〉도 합동으로 참여했어요.

승옥: 저도 비슷한 시기에 〈F;act〉와 〈사회문제연구회〉에 가입해 동시에 활동했어요. 〈사회문제연구회〉는 사회문제를 다루다 보니 여성 의제와 떨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학습하면서 모든 것이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회문제연구회〉에서 얻은 게 많아요. 최근에는 전공인 철학책을 읽는데, 여성 및 소수자는 철학과도 연결되어 있어요. 현대에 들어서서는 주체를 강조했던 근대와 달리 그것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있으니까요. 소수자 운동과 철학을 어떻게 연계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것이 흥미로워요.

 

(*) 플랫폼 노동은, “웹 사이트나 모바일 앱 같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그때그때 일감을 얻어 고용계약을 맺지 않고 일의 수행에 대해서 보수를 받는 노동”(「플랫폼노동 종사자 인권상황 실태조사」(2019))이다. 익숙한 플랫폼 노동자로는 배달앱 서비스 라이더가 있다.

대부분 플랫폼 노동자는 “자영업자로 분류된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에 노동법의 사각지대로 내몰린다.”(http://www.redian.org/archive/140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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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사이다 포럼 행사 장면. 말리가 ‘여성, 임극격차 그리고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 비탕 제공

 

회로: 어떤 철학 분야를 읽고 계세요?

승옥: 다양한 책을 읽고 있어서 정확히 이야기하기는 어려운데,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임마누엘 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은 타자에 대한 윤리성, 근대에 있었던 주체의 개념 등을 이야기해요. 그 책은 주체를 정립할 때에 타자가 있으므로 주체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하고, 타자는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때문에 주체는 주체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주장해요. 책을 읽고, 주체는 타자 없이는 주체일 수 없고, 주체 자신만으로 세계를 살아가면 자기 자신으로 돌돌 말려버리기 때문에 타자는 세계를 여는 희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현 사회랑 소수자를 어떻게 연결 지을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F;act의 활동

 

회로: 단체를 결성한 계기를 소개해주세요.

비탕: 다들 목말라 있었던 거죠. (웃음) 초대 회장은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몰랐는데 지금은 알게 된 사람.

말리: 저도 모르는 분이었어요. 초대 회장님께서 2017년도에 혼자 회원모집 포스터를 붙이고 다녔어요. 이거 할 테니까 와라, 같이 책 읽으면서 이야기하자. 15명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왔어요. 무슨 사건이 터져 우리 한번 모여보자는 건 아니었어요.

 

회로: 단체 구성이 어떻나요?

말리: 겹치는 학번이 없어요.

승옥: 인문대생이 많고, 이과는 물리학과 한 분 있어요. 인원은 4~5명 정도이고, 성비는 따지는 게 민망할 정도예요. 남성 학회원이 한 분뿐이거든요. 학번은 다양하고 학부생으로만 구성되어 있어요.

비탕: 재작년 말, 작년 초까지는 8-10명이었어요. 그분들이 다 고학번이셔서 졸업하셨는데 신입회원 유입이 없다 보니 이렇게 적은 수가 남았고요. 그때는 남성 회원도 많았어요. 8명 중에 3명 정도가 남성분이셨고, 초대 회장도 남성이세요. 지금은 학부생들만 남았지만, 대학원생분들이 활동하시기도 했거든요. 교수나 직원분들은…. 와주시면 감사합니다. (웃음) 저희가 포스터를 붙일 때 항상 “남녀노소 상관없이”라는 문구를 넣어서 홍보하거든요. 붙이면서 “교수님한테 연락 오면 어쩌지?” 이런 농담 자주 해요.

말리: 가끔 학교 바깥 분들도 오세요. 다른 대학이라던가 학교 밖 분들이 트위터를 보고 오세요.

 

회로: 비회원이 와서 일회성으로 참여하기도 하나요?

비탕: 그런 경우는 거의 없어요. 참여하는 사람 대부분 세미나나 모임에 오시면 몇 달 정도는 활동하시고요.

 

회로: 페미니즘 단체에 따라 일상에서 낙인찍히는 문제로 신원 노출을 꺼려 단체 외부인이 오는 것을 경계하기도 하는데요, F;act는 개방되어있다고 답변해 주셨어요. F;act안에서 외부인 참여를 꺼리는 목소리는 없나요?

비탕: 지금까지는 없었어요. 말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2017년과 2018년 외부행사에 마스크를 쓰고 오시는 분들이 있긴 했어요. 무서워서.

말리: 〈F;act〉가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시작했잖아요, 알음알음으로 모이지 않고. 그래서인지 당연하게 우리 원래 안전불감증? (웃음) 외부인을 경계하는 분위기는 없고요. 항상 누가 온다고 하면 “안티페미 오는 거 아니야?” 걱정하면서도 “기대된다. 무슨 얘기 할까?” 해요. 한 번도 온 적은 없지만. 크게 외부인 참여를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회로: F;act페이스북 페이지에서 보니 부스를 자주 여시더라고요. 부스와 토론회를 열면 다른 F;act외부인을 자주 만날 것 같아요. 외부인들과는 주로 어떤 얘기를 나누나요?

비탕: 기억나는 대화가 있어요. 저희가 2017년에는 낙태죄에 대해 알리고 낙태죄 폐지 여론을 만들고자 부스를 열었고, 2018년에 폐지 서명을 받으려고 학교에 부스를 열었어요. “낙태죄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포스트잇 붙이는 것도 하고, 손도장 찍는 것도 했어요. 2018년 부스에서는, 어떤 분이 포스트잇 대신 자기 연습장을 꺼내서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본인의 입장을 엄청 길게 써주신 거예요. 그분하고 이야기하고 이게 대중 지형이고 우리가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보통 부스에 들르면 응원하러 오지 반대의견을 내려고 부스에 시간을 투자하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그분은 잊을 수가 없어요. 그걸 쓰시고도 30분간 이야기를 나눴어요.

말리: 사실 그런 분들은, 자기 얘기를 하고 네 얘기를 한번 해보라고 상대방 이야기를 들어주기라도 하는 사람인데, 지나가면서 “쟤네 뭐야, 꼴페미들 아냐?”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비탕: 지나가면서 사진 찍고.

말리: 공개된 장소에서 페미니즘으로 세미나를 하면 저희 쪽으로 카메라를 돌리는 것이 느껴져요. 우리를 찍는 건지 핸드폰을 보는 건지 물어보기도 애매하고. 저희의 피해의식일까요? 보통은 〈용봉〉, 〈사회문제연구회〉, 〈F;act〉 셋이서 하는 것이 많아서, 보통은 그 두 단체에서 많이 오셔서 얘기하거든요. 그래서 외부인을 그렇게 많이 만나지는 않는 것 같아요.

 

회로: 부스는 보통 어떤 내용으로 꾸미세요?

비탕: 어떤 주제냐에 따라 많이 달라요. 낙태죄 폐지 촉구로 서명받는 부스를 연 적이 있어요. 낙태죄 헌법불합치가 작년에 결정됐잖아요. 그전에 사람들에게 이 이슈를 좀 더 알리기 위해 사람들에게 재생산권이 무엇이고, 어떻게 재생산권이 억압받는지 설명하는 부스를 열었어요. 부스 주제에 맞게 꾸미는 것 같아요. 탈코르셋에 대해서는 “탈코르셋이 개인의 의지로 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판넬을 붙여놓는다든지, 사회가 여성에게 어떻게 미(美)를 강요하는지, 경제가 여성에게 어떻게 미를 강요하는지 이런 것을 써서 붙여놓는 편이에요. 퀴즈나 빈칸 채우기도 하고.

기억에 남는 것은 손도장이에요. 현수막 천에 청테이프로 “낙태는 죄가 아니다.”라고 써놓은 다음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감으로 손도장 한 번만 찍어달라고 해요. 테이프를 떼면 다양한 색깔 속에서 글자가 나오게 만드는 활동도 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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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 지지 손도장들. 사진: 비탕 제공.

 

회로(한솔): 뉴스 클리핑을 하신다고 들었어요. 보통 학회라고 하면 책만 읽곤 하는데, 저는 시사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 활동에 관심이 가요. 최근 뉴스 클리핑한 주제들을 알려주세요.

말리: 이번 주에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1주년을 맞이해서. 낙태죄에 관한 논의들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소수자의 재생산권은 무엇이고, 어떻게 지켜지거나 압박받고 있는지 이야기했어요. 전에는 N번방 사건, 트랜스젠더 변희수 하사,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사건 등 주제를 다뤘었어요.

시사 중에서도 젠더 문제와 관련된 주제를 많이 다뤄요. 회원들에게는 아무 주제나 가져와도 젠더 문제와 연결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래도 관심 가는 주제가 다들 젠더라서 그런지 젠더 문제와 관련된 주제를 많이 가져오시는 것 같더라고요.

비탕: 가끔은 진짜 아무거나 가져오시기도 해요. (웃음) 언젠가 플랫폼 노동을 주제를 다룬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노동 문제라면 일반 노동자 남성의 문제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 안에서 여성 노동의 구조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톨게이트 수납원 해고와 관련된 뉴스를 클리핑하기도 했어요.

2019년 여름방학 때 한일 관계가 안 좋았잖아요. 위안부 문제 말고도 다양한 문제가 얽힌 것이 한일 관계인데, 한일 관계를 어떻게 페미니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을지 이야기했는데 아주 재밌었어요. 주제를 기획하신 분이 전전 회장님이었는데, 지소미아를 파기하려는 흐름이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지소미아 파기가 어떻게 전쟁과 연관되는지, 그렇다면 우리는 전쟁을 어떻게 페미니즘으로 볼 수 있을지에서, 반전(反戰) 평화 세미나로도 이어졌어요.

말리: 여성들이 주도하는 반전 평화 시위가 많은데, 여성들이 어떻게 반전 시위를 하게 되었는지, 여성과 평화, 반전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공부했어요. 여성들이 왜 반전 평화를 주장하는지, 단순히 여성이 더 평화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여성들이 피해받기 때문에, 전쟁이 소모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등등…. 사람이 죽는 문제인데 경제나 국가 논리로만 치환돼서 생명은 시야에서 사라지는 문제에 페미니즘은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뻗어갔던 것 같아요.

 

회로: 올해에는 어떤 활동들을 계획하고 있나요? 올해는 어떤 목표가 있나요?

말리: 단체 재생산을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어요. 작년에 신입회원이 많이 들어왔는데, 졸업 등으로 들어온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나갔어요. 〈F;act〉에 한 7~8명은 있으면 좋겠어요. 〈F;act〉 사람들끼리는 이미 익숙하다 보니 같은 이야기가 빙빙 돌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시각을 넓히고 싶어서 다양한 분이 들어오면 좋겠어요.

이번 1학기 세미나 주제가 퀴어와 페미니즘이에요. 지난 가을에 트랜스젠더 분들의 이야기로 핫했잖아요. 페미니즘은 그런 트랜스젠더 이슈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퀴어는 뭐지? 같이 갈 수 있나?’ 시의적절하게 나름대로 계획해봤고요. 제 목표는 모든 억압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조금이라도 공감하고 공유하는 것이에요. 나만 억압당하지 않거나 나만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을 같이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사실 요즘 트위터 페미니즘 등 넷페미니즘에서는 여성만 챙겨야 한다는 말도 많은데, 그런 건 가능하지 않다고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 싶어요.

 

회로: 회원들은 페미니즘을 어떤 이유로 시작했다고 하시나요?

비탕: 다들 비슷해요. 그저 살다 보니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졌대요. 남성분들이 이유가 더 다양한 것 같아요. 어떤 분은 군대에서 페미니즘이 필요하다고 느꼈대요. 어떤 분은 안티페미였는데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웃음) 페미 까려고 공부하다가 보니까 맞는 말 같아서 들어왔다는 분도 있고. 여성학회원들보다 남성학회원들의 이유가 더 다양한 것 같아요.

 

회로: 그럼, 책이나 뉴스 클리핑할 때 어디에 관심을 많이 가지나요? 어떤 이유로 책을 골랐다고 이야기한다던가, 주로 그럴 때 어떤 이야기가 나오나요?

말리: 요새는 성매매 혹은 탈코르셋이라는 이슈가 책이나 세미나 주제 고를 때 자주 나와요. 세미나를 할 때는 어떤 주제를 다룰지 많이 이야기하거든요. 주로 시의성을 가진 주제를 많이 이야기해요. 요즘엔 여러 사상가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알아보고 그걸 현실 세계에 적용해보자고 주제를 가져오곤 해요. 딱히 뚜렷한 주제를 가졌다기보다는 사회를 페미니즘으로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고 싶어 해요.

비탕: 제 생각에는 회원분들이 다들 잡식성이신 것 같아요. (웃음) ‘이거 꽂혔으니까 이거만 볼 거야’라기보다는, ‘이걸 보다 보니까 저것도 너무 궁금한데?’라는 느낌이에요. 과학철학에 관심 있는 분들도 계시고, 저는 페미니즘과 퀴어의 연결고리와 여성 노동에 관심이 있는데, 그 주제에 특출나게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잡식성인데 ‘여기서 좋아하는 반찬을 꼽으라면 약간 이거?’ 이런 정도에요.

 

전남대 여성주의 단체의 현주소

 

회로: 전남대에는 페미니스트 네트워크가 있나요?

비탕: 모임이 있어도 찾기 힘들어요. 저희는 홍보지를 붙여서 회원을 모집했지만, 다른 단위들은 지인 통해서 알음알음 가입하는 게 대부분인 것 같아요. 이미 있던 모임들도 많이 사라지는 추세고요. 그리고 소위 ‘래디컬’이라고 하는 단위가 교내에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런 단위와는 연락이 닿아도, 서로 생각과 길이 너무 달라 함께 활동하기는 어렵죠.

페미니즘 단위보다도 다른 것들도 하면서 여성도 다루는 단위와 교류가 많아요. 아까 말했던 〈용봉〉, 〈사회문제연구회〉처럼요. 같이 많은 사업을 하다 보니 친하기도 하고, 사람이 좀 겹치기도 하고요.

말리: 친해서 좋기는 한데, 인력이 너무 적다는 건 문제죠.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니까요.

 

회로: 전남대의 가장 큰 문제로, 교내에 여성문제를 제기할 공간이 없다는 점을 말씀해주셨어요. 인권센터는 잘 운영되고 있지 않나요?

말리: 우선 인권센터는, 학생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적어도 제게는 미지의 기구였어요. 그리고 전남대 법전원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가 인권센터에 알렸는데 인권센터가 취한 조치가 적절하거나 만족스럽지는 않았어요. 성폭력 사건을 잘 처리해주리라는 믿음 가는 공식 기관이 없어요.

비탕: 인권센터는 교수님과 학교 직원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학생들은 이런 구성보다는 학생들로 이루어진 기구에 좀 더 친밀과 신뢰를 느껴요. 그런데 전남대에는 총여학생회가 없어요. 총여학생회가 있다면 성폭력 사건에 관한 여론을 형성해야 할 때, 더 다양한 사람들에게 알리기 쉽겠죠? 총여학생회 자체가 다양한 학과의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총여학생회가 공론화해야 개인이나 동아리에서 공론화할 때 보다 각 단과대나 학생회와 연계하기도 더 쉬우리란 생각이 듭니다. 총여학생회는 회칙으로는 남아있는데, 공석인지 3~4년 됐어요.

 

(*) 강석영, 「전남대 로스쿨 성추행, 검찰과 학교는 ‘가해자 보호’에 급급했다」, 2019.11.25, 민중의소리, 링크: http://www.vop.co.kr/A00001450240.html

 

회로: 법전원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어떻게 보호받지 못했나요?

말리: 관련해서는 성명문을 준비 중이에요. 간략하게만 설명해볼게요. 우선 피해자가 인권센터에 사건을 신고했어요. 인권센터는 절차에 따라, 가해 학생에게 ‘신고가 들어왔으니, 피해자에게 할 말이 있으면 우리를 통하라’고 연락했고, 가해자는 연락받자마자 주변인에게 신고자가 누구인지 캐묻고, 술에 취한 상태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녔나 봐요. 가해자 지인들은 허위로 진술했대요.

인권센터에서 법전원 학생과에 징계 요청서를 보냈지만 학생과에서는 징계를 보류했어요. 징계가 보류되니 피해자는 가해자를 계속 마주칠 수밖에 없었죠. 피해자가 마주치지 않도록 조치해달라고 인권센터와 법전원 학생과에 요청하니, 인권센터는 징계 요청서 보냈으니 역할을 다했다고 하고, 학생과는 관련된 규정은 없다고 했어요. 피해자가 교수에게 요청해 수업에서는 가해자와 분리됐지만, 교수는 피해자의 요청을 들어주면서도 2차 가해를 하기도 했고요. 이런 점에서 피해자 보호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어떤 두 교수가 인권센터와 법전원에 피해자 보호 조치를 이행하라 요청하니, 어떤 교수는 그 두 교수를 모함하는 메일을 보내고 이 사건을 주제로 공개토론회를 열자는 말도 했어요. 1, 2학년 학생들과 교수들, 피해자, 가해자, 가해자 지인들을 모아놓고 시시비비를 가려보자는 거에요. 그러면서 허위진술을 반박한 피해자 지인들은 안 부르겠다는 거예요.

 

4

인터뷰 후 〈F;act〉 페이스북 페이지에 게시된 성명문. 출처: https://www.facebook.com/jnufeministaction/photos/a.1877614775792671/2549677091919766/?type=3&__tn__=-R

 

 

회로: 형식적으로라도 피해자를 지지할 사람들도 오게끔 하지 않았나요?

말리: 안 그랬던 것 같아요. 광주여성민우회가 법전원에 공문을 보내고, 사건이 기사화된 후에야 토론회를 무기한 연기했고 지금도 안 열렸어요.

본 사건은 2018년도 말에 일어났어요. 1년이 넘도록 피해자는 계속 가해자를 마주칠 수밖에 없고, 학교와 인권센터의 대처 방식이 소위 ‘중립적’이었어요. 그래서 피해자는 여전히 고통받고 있고요. 언론 보도 후에도 대처가 개선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F;act〉에서도 자보와 국가인권위에 탄원서를 쓰고 있어요.

비탕: 인권센터가 정말 최소한의 역할만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피해자분에게 듣기로는, 징계 요청서 전달까지 합의 기간 1달이 있었는데, 피해자분은 이를 전혀 전달받지 못했고 가해자에게만 전달됐대요. 피해자가 인권센터에 문제를 제기하니 ‘피해자에게는 알려줄 의무가 없다’고 답변했다고 하고요. 피해자를 돕는 두 교수가 받은 모함도 인권센터에 인권침해라고 신고하니, 돌아오는 답변은 ‘두 교수가 법전원과 공동체의 질서를 흩트렸기에 사과문을 써야 한다.’였어요. 두 교수님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문제를 제기하니 절차상 실수라며 그 대목을 삭제하고 다시 공문을 보내겠다고 응답했고요.

인권센터에 배정된 사람이 워낙 적다 보니 인권센터의 고충도 어느 정도는 이해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면 안 됐지”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

말리: 인권센터도 처음에는 무언가 해보려 노력했던 것 같은데, 갈수록 이해할 수 없어요.

 

회로: 총학생회는 어떻게 대응했나요?

비탕: 총학생회가 없어요. 비상대책위원회는 있는데, 어떤 의견을 냈는지 들어본 적이 없어요.

말리: 전대(전남대)에서는, 총학생회가 정치적인 의견을 내는 것을 반기지 않아요. 비상대책위원회라서 의견을 내기 더 어렵겠죠.

비탕: 몇 년 사이 많이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총학생회가 형식적으로라도 의견을 냈던 것 같은데, 학생들이 ‘학생자치기구가 마음대로 의견을 내도 돼?’라는 식으로 워낙 뭐라고 하니 의견을 못 내죠.

 

회로: 대학의 페미니스트들을 만나보면, 에브리타임(이하 에타’)에서 논의 지형을 많이 파악하더라고요. 전남대 에타 상태는 어때요?

비탕: 저희 회원들이 사실 에타를 잘 안 쓰거든요. 이번에 코로나 때문에 개강이 연기되면서 부스사업을 나갈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에타에 게시한 홍보글을 게시했는데, 게시물에 신고가 누적되어 삭제되는 일이 반복되어 지금 인터뷰하는 3명이 다 계정 정지당했어요. 삭제된 게시물에 달렸던 댓글이 진짜 가관이에요. “쿵”, “쾅,” “혹시 언냐들 뷔페미니즘 하세요?” 이런 거 진짜 많이 달리거든요.

말리: 사실 댓글은 그러려니 하는데 저희가 작성한 페미니즘 게시물이 내려가는 게 가장 아쉽죠. 계속 띄우고 홍보해야 하는데 신고 누적으로 내려가니까. 그리고 신고를 먹어서 한 달 동안 글과 댓글을 못 써요. 제대로 홍보할 수 없는 게 제일 아쉬워요.

 

회로: 학생들은 변하지 않았는데, 학생회는 누구의 눈치를 보나요?

비탕: 축제에서 경영대학 축제기획단 주막에서 메뉴판 컨셉과 음식 이름을 굉장히 선정적으로 꾸몄어요. 〈F;act〉에서 이를 두고 대자보를 썼어요. 이런 식으로 자꾸 공론화를 시키고 귀찮게 하니까 그 부분은 신경 쓰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회로: 어떤 학교에서는 새내기새로배움터나 학과에서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하기도 하는데요, 전남대는 어떤가요?

말리: 제가 새내기 때 학과에서 교육 들은 기억이 나요. 그런데 교육도 ppt로 10~20분 정도였고, 내용도 되게 별로였어요. 교육한 조교도 ppt 내용이 좀 별로라는 식으로 말했으니까요. 17년도까지만 해도 그리 효용성 있지도 여성친화적이지도 않았어요.

비탕: 저 신입생 때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아요. 페미니즘의 ‘ㅍ’자도 나오기 전이었으니까요. 학과마다 차이가 크다고 느껴요. 저희 과는 아직 아무 교육이 없어요. 같은 인문대라도 철학과나 사회과학대학의 사회학과에서는, 젠더를 이유로 느낀 불평등을 학과 임원들에게 말하면 도움 주겠다고 OT에서 말한다고 들었어요. 형식적으로든 실제로든 천천히 바뀌고는 있다고 느껴요.

 

회로: 전남대에 F;act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나요?

비탕: ‘떼쓰는 애들’? (웃음) ‘페미니즘이란 정신병에 걸린 애들’? 딱 이 정도인 것 같아요. 전남대 상대 무지개벽이라고 있어요. 대자보 핫플레이스인데, 거기에 붙인 〈F;act〉 자보를 보고 공감하고 칭찬하는 분들도 있어요. 어떤 분은 〈F;act〉 대자보를 보고 멈춰서더니 발차기를 하시더라고요. 전대 학우들이 생각보다 〈F;act〉에 많은 사랑을 보내주고 있고, 자기의 시간을 할애해준다는 것을 알았죠 (웃음). (말리: 대자보도 떼어주고.)

그리고 부스를 열면 대놓고 사진 찍고 가기도 하고요. 학생회와 같은 공식 단체에서는 눈치를 보려는 것 같아요. 그러면 학생들도 바뀌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그러지 않네요. 학생들이 수업 중 하는 발언은 달라지지 않았고, 교수들도 신경 쓰이는 말을 많이 하고요.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고, 일상적인 반응들로 분위기를 느껴요. 전 같았으면 〈F;act〉 행동에 반응이 거의 없었을 텐데, 요즘엔 〈F;act〉가 하지 않은 일도 〈F;act〉가 했다고 착각하곤 해요.

 

회로: F;act와 직접 관련된 마지막 질문일 것 같아요. F;act를 동아리로 등록하려다 좌절했다고 들었어요. 등록 과정을 알려주시겠어요?

비탕: 총동아리연합회(이하 ‘총동연’) 소속 정식 동아리가 되려면 동아리 분과회의에서 심의 후, 동아리 전체회의에서 인준받아야 해요. 〈F;act〉는 서류나 활동도 미비하지 않았지만 분과회의에서 인준안이 부결되었어요. 그 회의에서 부결된 동아리가 〈F;act〉와 영어 회화 동아리 그렇게 2개뿐이었어요. 그런데 영어 회화 동아리는 서류를 기한 안에 제출하지 못했고요. 〈F;act〉는 등록회비도 다 냈고, 서류도 제시간에 냈어요.

〈F;act〉는 분과회의 결정에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하니, 서류 내용이 미비하다는 말만 반복했어요. 그래서 전동대회(전체동아리회의)에 가서 피켓팅했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짧게 발언할 기회를 얻었어요. 동아리 등록 재심사를 하려면 전동대회에서 재심사 안건이 통과가 되어야 했는데, 회의 중간에 이미 많은 대표자가 퇴장한 상태라서 안건을 올릴 수 있는 정족수가 부족했어요. 그래서 안건을 상정할지 투표도 못 해보고 전동대회가 끝났다고 들었어요.

문제는 다음인데요, ‘총동연은 재고하라’며 구호를 외쳤는데, 〈F;act〉 회원이었던 분이 도와주러 왔다가 구호를 논란의 소지가 있는 단어로 바꿔 외친 거예요. 저희 진짜 몰랐거든요. 처음에 커뮤니티에서 이 얘기가 올라온 걸 보고 모함인 줄 알았다가, 구호 외친 분이 고백한 뒤에야 상황을 파악했으니까요. 물론 저희가 잘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요. 그 논란의 소지가 있는 단어가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어요. 에타, 페이스북 대나무숲에, ‘〈F;act〉가 이런 단어를 썼다더라’, ‘쟤네 완전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떼쓴다’는 얘기가 올라왔죠. 그때부터 떼쓰는 동아리가 됐죠. 18년 3월 얘기가 아직도 나와요.

후에도 동아리로 등록하기 위해, 부결 사유를 알려달라고 대자보도 붙이고 페이스북 메시지도 보냈어요. 처음에는 총동연 회장과 부회장이 서로 엇갈리는 의견을 주다가, 결국 온 공식 의견은 총동연은 정치적인 견해를 가진 동아리와 함께할 수 없다는 거였어요.

 

회로: 처음에 서류 미비라고 한 것과도 다른 사유네요. 분과회의에서 어떤 의견이 오갔나요?

비탕: 당시 대표가 지금은 〈F;act〉에 안 계셔서 들은 얘기를 전할게요. 분과회의에서 ppt로 동아리를 소개해야 하는데, ppt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달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구두로 발표했고, 동아리 대표자들의 질문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 질문은 〈F;act〉의 지향을 묻기보다는 “남자가 들어갈 수 있느냐?”, “페미니즘이라니 너무 여성에게 치우친 것 아니냐?”와 같은 사상검증에 가까웠어요. 〈F;act〉가 지향하는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물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마치 여성처럼 주변화되는 지역

 

회로: 광주에는 광주여성민우회가 있는데, 같이 사업을 기획하기도 하나요?

비탕: 예전 회장님이 민우회에서 열심히 활동하셨어요. 그렇게 민우회와 잠깐 연이 닿았고, 광주여성민우회 행사에 초대받기도 했었죠. 같이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고요. 대표적으로는 ’성폭력 피해에 공감하는 첫사람 프로젝트‘가 있네요. 회장님이 〈F;act〉를 나가시고 나서는 점점 같이하는 빈도수가 줄어들었고, 지금은 연결이 거의 없어요. 저희가 소극적이었나 싶기도 하고, 아쉽죠.

 

회로: 서울과 광주의 가장 큰 차이로 물리적 거리를 꼽아주셨어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말리: 물리적 거리가 문제가 된다는 것 자체가 서울 중심성을 보여주죠. 광주에서는 더 많은 내용을 보여주거나 사람을 모을 수 없어서 물리적 거리가 문제가 되죠. 광주의 여성 문제는 여성 문제라기보다도 지역의 문제로 다뤄지고요. 여성 이슈 말고 다른 이슈에서도 서울 밖 문제는 서울 밖 전체의 문제로 얘기되기도 하고요. 인적 자원도 부족하죠. 서울엔 사람도 많고, 좀 더 개인적인 도시라고 생각해요. 서울에는 타지에서 온 사람이 많은 반면, 광주에는 원래 광주 살던 사람이 많으니 다양성에 관한 고려가 조금 부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요약하면 지역은 여성들처럼 주변화되죠. 지역에서 일어난 문제는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의 문제로, 중요하지 않게 다뤄져요.

예를 들면 금호타이어 문제(*)를 두고 지역이 망한다고 하지 대한민국이 휘청거린다고 말하진 않잖아요. 점점 인구가 서울에 집중되다 보니 저부터도 지역의 일에는 관심을 덜 갖고요.

동덕여대 교수가 수업 중 성희롱 발언한 사건(**), 홍대 미대 몰카 사건(***)은 굉장히 큰 이슈가 됐잖아요. 전남대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법전원 사건 그리고 미대 몰카 사건이 있었거든요. 사건들을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서울권 사건들과는 확실히 주목도가 달랐죠. 내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듯, 뭔가 소외당하는 기분마저 느꼈어요. 이런 얘기를 하면 ’피해의식 아니냐‘, ’너도 서울로 오라‘고 얘기하기도 하고요.

인프라 차이는 퀴어퍼레이드에서 느껴요. 광주 퀴어퍼레이드 자원봉사를 간 적이 있어요. 청소년이 굉장히 많았어요. 청소년들이 서울 쿼어퍼레이드를 못 가서 지역 퀴어퍼레이드에 많이 오고, 이게 퀴어퍼레이드가 중요한 이유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이런 식으로 지역에 가려지고 지워지는 존재가 많다고 생각해요.

 

비탕: 말리 님이 본인부터 지역 일에 관심 안 갖게 된다는 말에 정말 공감해요. 법전원 사건이 2018년에 일어났어요. 그런데 제가 이 사건을 안 건 불과 3달 전이에요. 트위터 등 SNS를 통해 이슈를 접하다 보니, 크게 공론화되는, 결과적으로 서울중심적인 정보를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 지역, 학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보다도요.

 

(*) 한산, 「금호타이어 비정규직 노조 광주공장 점거…”해고 철회”」, 2019.01.07, 뉴스1. 링크: http://www.news1.kr/articles/?3518613

(**) 문예슬, 「검찰, ‘제자 성추행’ 혐의 동덕여대 하일지 교수 기소」, 2018.12.17, KBS, 링크: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096521&ref=A

(***) 손정빈, 「[종합]’홍대 미대 몰카’ 女모델 징역 10개월 선고…”피해 회복 불가”」, 2018.08.13, 뉴시스, 링크: http://newsis.com/view/?id=NISX20180813_0000389218&cID=10201&pID=10200

 

회로: 마지막으로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비탕: 건강을 잘 지키자! 페미니즘을 하다 보면 다른 이에게 공감해서 본인 정신건강에 해가 되기도 하고, 주변 시선, 댓글 하나에 상처받고 주춤하기도 하잖아요. 그럴 때마다 한편으로는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요. ‘내가 한 것도 없는데, 겨우 이런 말로 주춤해도 되나?’ 예전에는 상처받는 말들과 자괴감으로 괴로웠는데, 지금은 ‘현재의 나를 돌볼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나도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건강을 잘 지킵시다!

말리: 저도 비슷해요.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너무 상처받지 말고, 아프지 말고, 자신을 잘 돌보자고요. 세상이 바뀌지 않는 것처럼 보이죠. 동아리도 안 되는데 세상이 바뀌어? 꾸준히 균열을 만들려는 사람들 덕에 세상이 무너졌다 세워지기를 반복한다고 생각해요. 비록 그 과정이 너무 느려 안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바꾸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승옥: 저는 앞으로도 계속 공부하고 싶어요. 요즘은 과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많은 분야를 접하고 그것을 사회 변혁과 연결하고 싶기도 해요. 이렇게 하나하나가 조금이나마 연결될 때 공부하는 쾌감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 책도 많이 읽고 공부 열심히 하려고요.

 

나만 억압당하지 않거나 나만 자유로울 수는 없다.”

말리 님 말씀이 인터뷰를 정리하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넘어선 사회에 관한 인식틀이므로,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즘 외 다른 이와 다른 세계관에 무관심해서는 페미니즘이 제 역할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F;act는 이 점을 잘 이해하고 더 많은 이에게 공유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말리 님 말씀이 잊히지 않는 것은, 단지 그 말 한마디 때문이 아니다. F;act가 여성과 무관해 보이는 문제를 여성과 연관 지으려는 노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페미니스트 조직이 더 널리 주변과 소통하기를 바라며 인터뷰를 마친다.

027: 스스로 선언한 나의 정체성, 실험실 고고학자 김연화

Feminist in STEM 페미회로인터뷰 프로젝트 027: 스스로 선언한 나의 정체성, 실험실 고고학자 김연화

 

김연화 님은 화학 석사와 과학기술학 석사를 받은, 이공계와 인문학을 모두 아우르는 연구를 하는 독립연구자이다. 독립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전까지 대학원, SK 기업 연구소, KISTEP(*) 미래전략본부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의미 있는 일을 찾아 새로운 자리에 도전했다. 이후, 결혼하여 남편의 해외 포닥(**) 생활을 함께하고,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타인이 자신에게 붙여주는 이름과 정체성에 질문을 갖게 되었다. 현재는 스스로를 실험실 고고학자라고 소개하는 연화 님의 삶을 들여다보자.

인터뷰어인 페미회로의 박인아, 이슬기는 회로, 인터뷰이 김연화 님은 연화로 표기했다. 교정은 페미회로의 우연, 한솔, 발행은 페미회로의 배현주, 서주, 우연(이상 가나다순)이 맡았다.

 

(*)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1999년 과학기술기본법에 따라 설립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직속기관이며, 국가과학기술 기획, 예측, 전략수립 및 국가연구개발사업 조사, 분석 ,평가 및 예산 조정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 박사후연구원(postdoctoral researcher)을 줄여 부르는 말. 박사후연구원은 박사 학위 취득 후 연구자로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단계이다. 학계에서 교수직을 포함한 전문직을 얻기 위해서는, 이 기간 동안 학문적 능력과 프로젝트 등을 설계하고 수행할 수 있는 종합적인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회로: 안녕하세요. 인터뷰를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연화: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실은 인터뷰를 요청해주셔서 놀랐습니다. 페미회로 인터뷰를 몇 번 보았는데 현업에서 활동 중인 쟁쟁한 과학자들을 주로 인터뷰 하셔서요. 멀쩡한, 사람들이 다 아는 직장을 다니는 과학자 분들이 인터뷰하시는데, 저한테 연락이 와서 한편으로는 영광스럽기도하고,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저는 실험실 고고학자라는 타이틀을 스스로 붙인 김연화라고 합니다. 직장에 다닐 때는 남들이 붙여주는 이름에 되게 의존적이다가, 직장을 그만두고 저를 소개할 이름이 없어져서 저를 소개하기 되게 어렵더라고요. 어디에 다닌다고 하면 깔끔한데, 그게 없으니 어려워서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최근에 제가 만든 타이틀이에요.

 

회로: 먼저 연화 님의 대학원 시절 얘기부터 들어보고 싶습니다. 대학원에서 석사과정 동안 어떤 분야를 전공하셨는지, 그리고 그 분야를 연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연화: 저는 학부와 석사를 POSTECH 화학과에서 마쳤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생명이나 환경에 관심이 많았는데, 무엇을 전공할지 고민하다가 화학을 선택했어요. 잘하는 과목이기도 했고 화학이 가장 기본적이라고 생각해 화학을 전공한 뒤에는 생명이나 환경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학부 때는 분자 단위의 물질들을 기본으로, 주변의 자연물과 세상을 이해하려는 것이 재미있었고 모르는 것을 배우는 즐거움이 좋았어요. 그러다가 마침 대학원에 갈 때, 구조생물학을 연구하는 새로 오신 교수님이 있었어요. 그 교수님은 주어진 단백질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단백질 모양에서 밝혀내는 연구를 하셨어요. 그 연구가 재미있어 보였죠.

대학원에 들어가서 맡았던 프로젝트는 전사 인자(transcription factor)에 관한 연구였어요. 생명과학의 센트럴 도그마는 DNA에서 RNA를 통해 단백질을 만들고, 이것이 생명의 중심 현상들을 모두 만들어낸다는 원리인데, 전사 인자는 DNA에서 RNA로 가는, 그리고 단백질로 가는 중간 과정을 조절하는 단백질이라서 흥미로웠고,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당시 구조 생물학에서는 각 각의 단백질 구조는 많이 밝혀졌지만, 단백질이 DNA, RNA와 결합하여 만든 컴플렉스(complex. 집합체)의 구조는 잘 밝혀져 있지 않았거든요. 이 구조를 알면 전사와 유전 형질 발현 메커니즘을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거죠.

 

회로: 연화 님은 석사만 하시고 회사에 취직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러면 석사 과정에서 구조 생물학을 연구하시다가 회사에 들어가셨네요. 회사에는 왜 가셨나요? 그곳에서 하신 일은 구조 생물학과 관련이 있었나요?

연화: 석사 후에 SK연구소에서 일했어요. 처음에는 대학원에 석박통합과정으로 입학했었는데, 연구와 대학원 생활에서 좌절을 겪으며 도전적인 프로젝트는 접고, 전기화학 센싱쪽으로 연구 주제를 바꿔서 석사를 졸업하고 기업연구소에 취업했어요.

회사 연구소에 지원한 이유는 화학 전공을 살리려고요. 기초과학보다는 기초과학을 활용해서 사회에서 쓰이는 지식을 만들거나 응용할 수 있는 것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기업 연구소로 발길을 돌렸어요.

 

회로: 대학원생 때 겪은 좌절을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연화: 좀 거칠게 말하면 제가 어렸죠. 과학자를 꿈꿔서 연구중심대학에 입학했기에 당연히 대학원에 간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졸업한 POSTECH 에서는 대부분 학생이 대학원에 가니까 그냥 대학원에 갔던 것 같아요. 연구가 무엇인지 몰랐어요. 물론 연구가 무엇인지 꼭 알고 가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학원에서 연구원이 되는 법을 훈련을 받는 거니까요.

저는 크게 두 가지가 어려웠어요. 첫째는 실험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어요. ‘세포를 이용해서 원하는 단백질을 다량 생산하고, 정제하고, 타겟 DNA와 RNA를 넣어 컴플렉스를 만든 후, 컴플렉스를 결정으로 만들어 구조를 밝히면 된다’는 개념은 단순한데, 막상 실험을 시작하니 각 단계를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몰라 막히는 일 투성이더라고요. 결과만 얻으면 노벨상을 받는 연구라는데, 이제 막 대학원에 들어간 학생이 그런 연구를 한다는 게 지적으로는 도전적인 일이지만 실전에 들어가면 무척 막연한 일이었어요. 구체적인 스텝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못 찾겠더라고요. 지도교수님께서도 구체적인 지도를 하지 않는 스타일이기도 했고요.

연구에서 계속 난관에 부딪히는 와중에 선배와 교수님에게 많이 들은 말이 “삶을 다 투자하지 않아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이였어요. 그래서 ‘내가 얼마나 더 여기에 내 삶을 쏟아야 할까’라는 생각도 들고, 요령보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얘기로 흘러가니까 ‘나는 연구에 안 맞는 사람인가, 연구자로 자질이 없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한 분야에서 어느 정도 터를 닦은 분들이 그런 얘기를 하니까 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약간 우회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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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로: 화학 연구소에서 또 다른 연구를 시도하신 것인가요?

연화: 회사에서는 연구보다는 생산에 가까운 사업부서에서 공정 중간 및 생산품의 품질 분석을 맡았어요. 분석을 수행하는 테크니션들을 교육하고, 분석 기법들을 문서로 정리하고, 분석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고, 분석 결과를 해석하고 문서로 정리하는 일을 했어요. 직접 실험하지는 않고 주로 문서 작업을 많이 했어요. 의약중간품을 생산하는 부서였는데 의약품은 식약청 승인과 판매를 위해 문서작업이 중요하거든요.

 

회로: 그렇군요.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계셨던 직장은 KISTEP 이셨다고 들었는데, 기업 연구소에서 KISTEP으로 옮기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연화: 회사에서는 제가 거대한 기계의 부품 중 하나라고 느꼈어요. 월급은 받지만 학생 때와는 다르게 보람이 없었어요. 무엇보다 제가 성장한다고 느끼지 못했고, 월급을 받으며 제 시간을 제공한다고 느꼈어요. 그때 다시 고민했죠.

정책 쪽 일을 해볼까 고민해봤어요. 남미를 여행하면서 페루에 갔는데 사진으로 봤던 1970년대 우리나라 모습과 비슷해 보이는 페루가 한국전쟁 직후에 우리나라에 식량을 지원해줬대요. 그 말을 듣고 원조를 받던 한국이 어떻게 이제는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을까 고민하게 된 거죠. 지금 돌이켜보면 단순하고 순진한 생각이지만, 그때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어요. 한 나라 혹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에 과학기술이 중요하니 국가 차원에서 비전을 제시하고 효율적인 방안을 마련하는 데에 일조하고 싶었어요.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하기 위해 다시 대학원에 들어갔고 졸업하고 KISTEP에 입사했죠.

 

회로: 다시 대학원에 들어가셨군요. 두 번째 대학원에서는 어떤 연구를 하셨나요?

연화: 사실 그곳이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하는 곳은 아니었어요. 과학과 정치, 정책도 다루긴 하지만 그 분야가 중심은 아니고 과학기술에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곳이었어요. 높은 권위를 지니는 과학 지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과학 지식이 권력과 어떻게 연계되어 작동하는지, 과학 지식과 사회적이거나 자연적 질서가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 공부했어요. 그중에서도 저는 과학기술학이라는 학문을 전공했어요. 과학 지식이 생산되는 전통적인 장소인 실험실에서 과학자들이 연구 대상을 과학적 대상으로 구성하는 과정을 연구했고요.

 

회로: 그럼 과학기술학을 다시 전공하고 KISTEP에 가게 됐군요. KISTEP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미래전략본부 기술예측실에서 미래예측, 기술수준평가, 기술영향평가 업무를 맡았어요. 그 당시 KISTEP 미래전략본부에서는 사회와 기술을 연결하는 작업을 새롭게 하고자 했어요. 과거에는 ‘미래에 어떤 기술이 주목받는가’ 혹은 ‘어떤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가’와 같이 기술 중심으로 미래를 예측했어요. 그때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미래 비전을 그리고 전략을 세우기 위해 단순히 기술 발전뿐만 아니라 사회와 기술의 관계를 같이 보아야 한다는 쪽으로 방향이 변했거든요. 그때, 과학기술학 전공자로서 추천을 받아서 들어갔어요.

사실 정책 관련 일을 하고 싶었는데, 미래전략본부에 배치가 되어 다행이었어요. 정책본부나 예산본부에서는 당장 시급하게 결정해야 하는 국가 현안들을 다루다 보니, 경제적 비용과 효과를 따지고 어느 분야에 얼마의 예산을 투입해야 하는지를 분석하는 경제적 사고가 많이 필요해 보였어요. 반면 미래예측은 예산분배보다는 조금 더 느슨하게, 어떤 기술이 어느 정도 발전할 때 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바뀔까, 사회가 새 기술을 어떻게 수용하도록 할까, 기술에 의한 사회적 부작용은 무엇일까 등을 논하는 부서여서 제가 다시 전공한 부분과는 오히려 잘 맞았거든요.

미래예측에서는 기술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를 분석해서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고 미래에 필요한 기술 목록을 작성해요. 기술수준평가는, 미래기술 목록을 기반으로, 현재 우리나라의 기술을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기술과 비교해 평가해요. 미래기술 목록은 정책이나 예산을 수립할 때, 어느 기술 분야에 투자할지 판단하는 근거죠. 신기술은 때로는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를 일으키기도 해요. 긍정적 변화도 있지만, 부정적 변화도 발생해요. 새롭게 부상하는 기술이 사회에 미칠 영향을 복합적으로 평가하는 기술영향평가 업무도 진행했어요. 기술영향평가에서는 독특한 점이, 시민들에게 특정 기술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기술에 관한 의견을 청취하는 시민 포럼을 함께 진행해요. 시민 포럼은 제가 공부했던 과학기술학에서 많이 다뤄서 업무를 할 때도 재미있게 진행한 기억이 나요.

 

회로: 이공계에서 공부한 배경이 이 업무에 도움이 되었나요?

연화: 기술예측실장님이, 제가 이공계 베이스라서 저를 뽑으셨다니, 엄청 도움이 됐겠죠. 미래 예측은 기술을 기반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기술을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해요. 기술의 메커니즘이 무엇이고, 우리가 가진 과학지식으로 기술을 실현할 수 있을지 이공계 지식 없이는 판단하기는 어려워요. 저는 이공계 베이스가 있어서 기술 이해하기가 좀 더 수월했어요. 이곳은 정책기관이지만 대부분이 이공계 박사인 이유도 이 때문이죠. 과학기술이 어떻게 연구되고 진행되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미래를 그릴 수 있거든요.

 

회로: 보통 박사 출신분들 중에 자연과학계열보다 공학 계열이 많나요?

연화: 공학 계열이 많았던 것 같아요.

 

회로: 미래 예측이 타겟으로 하는 기술이 한 분야에 치중되지는 않나요? 또 한 사람이 전공과 관련된 적은 분야를 집중적으로 보는지도 궁금하네요.

연화: 자신이 전공한 분야를 중점적으로 다루기도 하지만 기술이 굉장히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분야에서 왔건 많은 분야를 봐야 해요.

 

회로: 한 사람이 여러 분야를 보는 건가요?

연화: 네. 미래 예측 프로젝트에서는 다루는 미래 기술이 200-300여 개 정도고, 그 기술 모두를 대충은 알아야 해요. 자신이 전공하지 분야의 기술은 상대적으로 덜 잘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공계 언어 안에서 기본적인 수준의 이해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어요.

 

실험실 고고학

 

회로: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연화 님께서는 대학원에서의 생화학 연구, SK 기업에서의 품질 분석, KISTEP의 미래예측업무까지 각기 다른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으셨는데요, 현재는 스스로를 소개할 때 실험실 고고학 독립연구자라고 하셨는데, ‘실험실 고고학이라는 연구 주제를 고안하게 된 배경과 이 연구가 가진 의미는 무엇인가요?

연화: 과학 실험을 좋아해서인지 중고등학생 때부터 실험실을 좋아했어요. 대학원 생활 중에도 실험에 애증은 있었지만, 실험실 공간 자체에는 여전히 매력을 느꼈고요. 그래서 두 번째로 들어간 대학원에서 실험실 연구로 석사 논문을 썼고, 이후에도 실험실에서 벌어지는 일뿐만 아니라 실험실 공간 자체에 관한 연구도 지속하고 싶었습니다.

실험실 연구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많이 이루어졌어요. 그때 진행된 연구들이 과학기술학의 중심축 하나를 이루고 있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굉장히 탄탄하게 거의 완성된 연구 분야였어요. 아카데미의 과점에서 보면, 완성된, 끝난 연구였죠. 그러다 보니 학위논문연구를 할 때도 이미 트렌드에서 벗어난 실험실 연구를 해서 어떻게 다른 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논문을 쓸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고요.

또, 당시에 “노벨상에 근접한 국가 과학자의 실험실이 아닌 실험실을 뭐하러 들여다보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어요. 당시 제가 연구하던 연구실은 서울대 물리학과의 연구실이었거든요. 그 정도면 우리나라에서 상위 연구실일 텐데도 그런 질문을 받아 당황스러웠어요. 상위권 대학들의 교수님이 모두 국가과학자(*)도 아니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학원 연구실은 국가과학자의 실험실이 아니거든요. 연구실마다 환경이 달라 어느 곳을 평균적인 혹은 일반적인 연구실이라고 집어서 부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과학 연구자 대다수가 국가과학자가 아닌 상황에서 국가과학자의 실험실을 관찰하고, “과학 연구실은 이렇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과학기술학자들은 실험실 연구가 70~80년대에 끝났다고 말하기도 해요. 그런데 그 연구들은 미국과 유럽 중심으로 잘 나가는 실험실 위주로 진행되었다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유명한 실험실 연구 중 하나가 소크 연구소(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에서 진행한 과학기술학자 부르노 라투르(Bruno Latour)의 실험실 연구인데, 해당 실험실은 라투르의 연구 저서 『실험실 생활 Laboratory Life이 나오기 전에 노벨상을 받았거든요. 그 시기 우리나라에는 과학이랄 것도, 연구실이랄 것도 없는 정도였으니, 분명 그 당시 서구에서 했던 실험실 연구와 현재 우리나라 실험실 연구는 다르겠다고 생각했어요.

 

(*) 국가과학자란 세계적 수준의 연구성과를 내는 과학자를 선정해 매년 15억 원씩 최장 10년동안 지원하는 사업이다.
참고:
https://www.nrf.re.kr/biz/info/info/view?menu_no=378&biz_no=142

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9144&pageFlag=&sitePage=1-2-1

 

회로: 실험실 고고학이라는 이름은 어떤 뜻으로 지으셨나요?

연화: 연구를 구상하며 재현 방식도 고민했어요. ‘학계의 트렌드를 따라야 하는 부담이 있는데도 꼭 학문의 언어로 써야만 할까?’, ‘다른 방식으로 썼을 때 실험실의 더 다양한 면모를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었어요. 이 고민들이 모두 연결되어서 실험실 고고학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 이름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어요.

첫 번째로, 실험실 연구라는 주제가 과학기술학에서는 이미 끝나서 묻혀 버렸다는 의미가 있고요. 두 번째는, 기존 아카데믹한 연구에서는 벗어나, 실험실이라는 현장에서 장비들을 발굴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과학 연구’는 최첨단 장비를 떠올리게 하지만, 실험실에 들어가 보면 의외로 오래된 장비가 많아요. 특히 신생 연구실은 초기 자본(연구비)이 적은 상황에서 실험하기 위해 중고장비를 들여오기도 하고요. 제가 있던 실험실은 신생연구실임에도 은퇴하는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낡은 장비가 많았는데, 연구원들은 이들 중 돌아가는 장비를 발굴하고, 부품을 교체하거나 수리하면서 장비의 성능을 높이려 시도하고 있어요. 이 모습이 마치 유물을 발굴하는 느낌이 들어서 실험실 고고학이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또, 실험실 고고학이라고 하면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엄연한 학문은 아니니까 살짝 비껴가겠다는 의미도 있어요. 각 실험실과 실험 장비들을 학문적으로만 대하지는 않겠다는 뜻이죠. 재미있는 게, 장비를 보면 재물 조사를 하면서 한 장비에 붙은 스티커가 엄청 많아요. 많은 스티커를 보면서 ‘이 장비에 나름의 역사가 있겠구나’ 하고 느꼈죠. 저는 각 장비가 어떤 실험실을 거쳐서 현재 실험실에 도달했는지, 어떤 실험들을 했고, 어떤 연구자들을 만나서 어떤 결과들을 만들었는지 등 장비를 중심에 둔 연구를 하고 있어요. 신생 연구실에 들어와 재구축되는 장비의 재발견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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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하는 연구자의 실험실에서 가져온 해체된 장비의 부품들. 새로운 장비를 제작할 때 사용할 예정이다. (2019. 5) 사진: 김연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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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량분석 장비 중 하나인 QTRAP. 2004년부터 2018년까지 학교 재물조사 스티커가 빼곡하게 붙어 있다. POSTECH 연구센터에서 쓰다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 폐기처분될 운명이었던 장비가 2019년 6월에 연화 님이 연구하는 실험실로 옮겨왔다. (2019. 6) 사진: 김연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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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에서 가장 신형 장비다. 이마저도 리퍼비시(refurbished) 제품이다. 이 실험실에서 가장 핵심적인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2019. 6) 사진: 김연화 제공.

 

회로: 실험 장비의 자서전 같은 느낌이네요.

연화: 네. 맞아요. 실험 장비를 공장에서 생산한 어떤 모델 중 하나가 아니라, 이 실험실에 온 역사성을 품은 하나의 개체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다 보니 논문이 아닌 사진이나 동영상 등의 다른 방식의 재현을 고민하고 있어요.

 

회로: 저도 어떤 메시지를 누구에게 던지고 싶은지에 따라서 표현방식이 꼭 논문일 필요는 없는 데에 동감해요. 실험실 고고학을 통해 무엇을 보고 싶으신가요? 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으신가요?

연화: 실험 장비의 목적은 실험 수행과 분석이고, 장비가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려면 도움의 손길을 많이 필요로 해요. 장비의 이용자인 연구자나 장비를 수리하는 엔지니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죠. 저는 이렇듯 장비가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사람들이 어떻게 장비를 돌보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장비 돌봄과 유사하게, 실험실이라는 공간 또한 실험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 청소부터 시작해서 안전 관리 등 다양한 돌봄을 필요로 해요. 돌봄은 연구 외적이라고 치부되지만, 사실 실험실이라는 공간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데에 필수죠. 그런 면에서 장비 돌봄과 연구실 돌봄과 같은 ‘돌봄’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요.

 

회로: 돌봄 노동이 가족이나 단체에서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실험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점이 생각할 거리를 던지네요.

 

독립연구자, 정체성을 말하다.

 

회로 : 다음으로는 결혼 후 임신출산을 겪는 과정과 독립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질문하겠습니다. 먼저,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과 함께 외국으로 나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연화: 결혼할 때에 저는 직장인이었고, 제 배우자는 포닥(**)이었어요. 배우자는 교수가 되기를 원했는데 그러려면 해외로 포닥을 다녀와야 했죠. 함께 있으면 안정감이 느껴지고 잘 맞는다는 생각에 결혼을 결심했는데, 떨어져 산다면 결혼하는 의미가 없는 것 같았어요. 시댁도 저 혼자 감당해야 하고(웃음). 우리 둘은 결혼하면 같이 살기로 합의하고 어디서 같이 살까를 고민했죠.

한국에 머문다면 저는 직장에 계속 다니겠지만 배우자는 교수가 아닌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할 테고, 해외로 간다면 배우자는 포닥을 할 수 있지만 저는 직장을 더 다닐 수 없었어요. 저는 제 직장을 좋아했다기보다 제가 하던 일이 좋았어요.

앞서 과학정책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공부하고 일하면서 그게 꼭 정부 기관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정부 기관에서는 제 연구 결과가 바로 정책에 반영될 수 있는 확률이 높지만, 정부의 기조에 맞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해야 하는 한계가 있었거든요. 직장을 그만둬도 비슷한 일을 개인적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관련 공부를 하면서 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집에서 배우자를 서포트하면서 내 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순진하게 생각했죠.

 

회로: 독일에 계실 때 KISTEP의 외주 업무를 맡으셨다고 들었는데요, 그 당시 맡으셨던 일을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연화: KISTEP에서는 국가별 과학기술 정책 동향을 발간하는데, 그중 유럽 파트를 제게 맡겨 주셨어요. EU와 독일, 영국 정부가 어떤 과학기술정책을 수립하고 배포하는지 조사를 하고 정리하여 보고했어요. 우리나라에서 독일과 영국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중간중간에는 KISTEP에서 원하는 이슈가 있으면 조금 더 자세하게 이슈 중심으로 보고서를 써서 보내기도 했고, 다른 정책기관에서도 의뢰를 받아 독일의 국가 혁신 정책을 조사하고 분석해서 보내기도 했어요. 독일어를 조금 할 줄 알아서 독일어 자료 접근성이 높았거든요. 독일 내 뉴스들을 보면서 정부의 관점뿐만 아니라 정책이나 이슈에 대한 여론의 반응도 파악할 수 있으니 독일 정부의 정책 자료들이 국민들에게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더 잘 보이더라고요.

페미회로와도 접점이 있을 수 있는데, 스탠포드 대학교의 론다 쉬빙거 교수가 주도한 젠더 혁신(gender innovation) 프로젝트에 관한 짧은 보고서를 써달라는 의뢰를 받기도 했어요. 과학기술 혁신 방안 중 하나로 젠더적 관점을 통해 연구 혁신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죠.

 

회로: 영국이나 독일의 과학정책들을 조사하면서 어떤 점이 흥미로웠나요?

연화: 독일에 가기 전에도 독일의 과학기술정책에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KISTEP에서 맡았던 기술영향평가 업무는 시민참여를 중시하는데, 시민참여 행사를 가장 잘하는 나라가 독일이거든요. 독일에서는 정책을 수립할 때 시민과의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정책은 정부가 주도하는 것 같지만 결국 정책의 성패는 사회가 얼마나 받아들이고 함께 참여하느냐에 달렸어요. 그래서 독일에는 전문가들이 정책을 수립하지만, 수립 과정에서 시민 워크숍이나 시민 포럼 등의 행사를 통해서 시민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민들은 정부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려 하는지 자연스럽게 습득하기도 하죠.

제가 독일에 있으면서 연방교육연구부(BMBF, Bundesministerium für Bildung und Forschung)에서 하는 미래포럼(Zukunftsnacht)에도 참여해봤는데, 제가 참여했던 주제가 미래의 의료기술이었어요. 홀 중앙을 무대처럼 꾸며서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과 장관이 같이 앉아서 원탁 토론을 했어요. 그 주변은 마치 칵테일 파티처럼 테이블이 배치되어 초청받은 시민들이 자리를 잡고 토론을 듣고, 즉석에서 청중이 전문가나 장관에게 질문하기도 하고, 이슈와 관련된 질문에 청중 설문을 하기도 하더라고요. 딱딱한 분위기만도 아니어서 중간에는 래퍼가 나와서 미래의료와 미래 사회의 모습을 담아 랩 공연을 하기도 했어요. 단순히 어떤 정책이나 비전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사람들에게 더 친화적으로 다가가려는 표현방법도 다각적으로 고민하는 모습이 보였죠. 그런 모습들이 인상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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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미래포럼에서 원탁에 앉아 토론하는 전문가들과 이를 둘러싼 청중들. 요한나 방카(Johanna Wanka) 연방교육연구부 장관이 청중이 한 질문에 즉석에서 답하고 있다. 사진: 김연화 제공.

또, 제가 미래예측 부서에 있었다 보니 그쪽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는데, 독일에서는 미래 예측 보고서를 굉장히 잘 만들기로 유명해요. 기술과 사회의 발전 양상이 10-20년 뒤에 가져올 변화와 영향에 방점을 두고 전문가들이 연구를 진행해서 미래에 당면할 과제와 기회가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서술해요. 동시에 관련 이슈에 관해 시민참여 형태의 미래워크숍을 진행하면서 시민들은 그런 변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변화가 가져올 모습을 미래 시나리오로 작성하고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고, 미래 예측 보고서와 연계한 행사로 미래 기술 영화제(Foresight Filmfestival)도 매년 열고 시민 출품을 받는 등, 시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요.

또 매년 연방연구교육부에서 매년 주제를 하나를 정해 한 해 동안 그와 관련된 전시나 연구 행사인 과학해(Wissenschaftsjahr)를 진행해요. ‘과학호(MS Wissenschaft)’라는 커다란 배가 독일의 남쪽에서 북쪽까지 큰 강을 따라 운행하면서 도시마다 며칠씩 정박하면서 관련 전시를 해요. 몇 년 전 주제가 ‘도시의 소리’였는데 전국의 시민들에게 자신의 주변에서 녹음한 소리를 웹사이트에 올리게 했어요. 그리고는 수집된 자료를 이용하여 독일 전국의 소리 지도를 만들더라고요. 소음/소리와 관련된 전문가의 연구도 함께 진행되고요. 일종의 시민참여 과학연구였죠. 그게 실제로 연구 논문으로까지 연결되었어요. 이처럼, 사람들이 흥미를 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그것을 정책에 반영하려고 방법들이 인상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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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사진과 이어지는 사진) 거대한 홀을 가득 매운 청중도 마찬가지로 원탁에 앉아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과 즉석에서 논의할 수 있다. 정책입안자와 전문가들의 발표는 5분 미만의 짧은 동영상 발표로 마치고, 바로 각론을 토론한다. 사진: 김연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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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장 밖 공간에는 간단한 음료와 스낵이 준비되어 있어 사람들은 계속 교류와 토론을 이어갈 수 있다. 사진: 김연화 제공.

회로: 독일은 시민들과의 소통이 매우 활발하네요. 한국은 어떤가요? KISTEP에는 작게라도 그런 행사가 있나요?

연화: 한국도 정책을 발표할 때 공청회를 많이 해요. 공청회에서 정책 최종안을 시민들에게 발표하는데, 시민이 많이 오는 편은 아니에요. 홍보도 부족하고, 사실 온다고 해도 시민들의 의견이 정책안에 반영되기도 어려운 상황이고요. 우리나라는 오히려 시민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정부에 요구하기 위해 집회 등의 방식을 더 많이 사용하는 편이죠. 이런 이유로 공청회도 대개 수립된 정책을 발표하는 사후 공청회고요. 정책 수립 과정에서 어떻게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KISTEP에서는 기술영향평가에서 시민포럼을 진행하는 게 거의 유일한 시민참여였던 것 같아요. 선정 기술에 관한 신문기사나 관련된 이슈를 다루는 대중서, 알기 쉽게 설명한 글과 같이 일반인도 이해하기 쉬운 기술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고, 기술 및 관련 이슈에 대한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진 전문가 강연도 제공하면서, 포럼에 참여한 시민들이 기술에 대해 이해하고 서로 토론하게 해 시민들의 의견을 담아요.  최종 보고서에는 전문가 의견과 시민들의 의견이 함께 들어가 있어요. 이런 기술이 나왔을 때 어떤 방식으로 시민사회에 활용된다거나 어떤 식으로 기술 사용을 제한하면 좋겠다는 등의 제안이 같이 발간되기도 해요.

 

회로: 그렇군요. 이렇게 KISTEP의 외주 업무를 맡는 등 여러 활동을 하는 동시에, 배우자의 해외 포닥 기간 동안 주로 집에서 살림을 도맡고 보조자로서 역할도 하셨을 것 같아요. 이 과정에서 본인의 정체성에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연화: 배우자가 집안일을 많이 해서 살림을 도맡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살림에 책임감이 제게 더 크긴 했죠. 해외에 나간 첫해는 결혼하고 첫 집이라 집을 꾸미는 일이 재미있기도 했고, 독일어를 배우고 대학원 재학시절 진행했던 실험실 연구 논문을 쓰느라 바빠서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두 번째 해부터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조급해지더라고요. 둘이 같이 머무는 공간이니 집안일은 같이 해야 한다는 점에는 합의했는데, 주로 집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점점 더 집안일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집안일은 해도 별로 티는 안 나면서 은근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요. 청소 좀 하고 뭐 하면 제 일을 할 시간이 없더라고요. 집에서 포닥인 배우자를 서포트하면서 여유롭게 공부도 하고 개인 프로젝트도 진행하겠다는 계획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깨달았죠.

당시에 저는 스스로 전업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면서도 집에 있는 사람이, 일하고 들어오는 이에게 안락함을 제공하는 전통적인 아내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압박을 스스로에게 준 것 같아요. 집안일을 할 때는 내가 나의 커리어를 팽개쳐도 되나 싶고, 일이나 공부 중에는 배우자를 따라서 와서 도움은 주지는 못하고 이렇게 한량처럼 살아도 되나 싶더라고요. 집안일도 제 커리어 개발도 제대로 못 하는 상황에 매우 스트레스 받았었어요.

 

회로: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일이라고 하면 수입을 얻는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특히 집안일은 일이어도 불구하고 명함을 낼 수 없다 보니 고민이 되었을 것 같네요. 한국에 돌아오실 때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결론을 못 내리고 돌아오신 것인가요?

연화: 한국에 돌아왔을 때 엄청 우울했어요. 독일에서 이런저런 활동은 많이 했는데 어쨌든 이력서에는 몇 년이 비었으니까요. 독일로 떠나기 전에, 배우자도 서포트하고 나도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고 여러 사람에게 이야기했는데, 내세울 만한 나의 커리어가 없으니 배우자 따라 편하게 해외생활 하다 온 사람이 되더라고요.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미국에 있는 지인 부부를 만났는데 그 부부는 부인이 학업을 계속하고 남편이 아이를 키우며 부인을 서포트하는 부부였어요. 그 남편은 “저는 홈 메이킹(살림)해요.” 라고 당당하게 말을 하더라고요. 그때, 좀 다시 생각해보았어요. ‘이 남편분은 본인이 전업주부라는 것을 긍정하는데, 나는 왜 그것을 못 했을까?’ 어쩌면 주부 역할은 아내가, 경제활동은 남편이라는 전통적 성역할이 우리 사회에 있다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여성 가정주부는 전통적인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이 되어 별로 대단하지 일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역할이 바뀌어 남자가 주부 역할을 하면 대단하고 진보적인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 같았어요. 같은 일인데도 남자가 하느냐, 여자가 하느냐에 따라서 개인적, 사회적 인식이 다른 거죠.

당당하게 홈 메이킹을 한다고 말하는 지인 부부를 만나고 나서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홈 메이킹’을 달리 생각했어요. “내가 있어서 남편이 해외 포닥 생활에서 좋은 연구 결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요. 남편은, 제 덕에 해외 포닥을 나갈 수 있었고, 외로울 수 있는 해외 생활을 저와 함께해 안정감도 얻었으니까요. 해외에서 혼자 살면 한국어로 시원하게 의사소통하고 싶을 때가 간혹 있거든요. 특히 남편은 독일어를 못 해서 그런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제가 연구소에서의 고충을 들어주기도 했고, 반대로 제가 남편에게 전해준 독일 뉴스를 주제로 남편이 연구소에서 그와 관련하여 사람들과 대화할 수도 있었어요.

또 같은 화학전공자다보니 남편의 논문이나 발표에서 스토리를 리뷰해주기도 했어요. 실험스킬이나 자료 검토에서도, 세세한 내용은 잘 모르고 오히려 학부 수준의 화학 지식을 가진 사람이 봤을 때, 논문이나 발표가 연구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지, 연구 의의가 무엇인지 명료하게 드러나는지, 전체적인 논리가 납득할만한지 평가해 줄 수 있거든요.

당시 유행했던 게임인 포켓몬고(Pokemon Go)에서 빌려 와 저 스스로를 남편몬 트레이너라고도 불렀지요. 그동안 이런 지원의 가치가 인정되지 않아 아쉬워, 저라도 계속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제 덕에 배우자가 교수가 되었다고요.

 

회로: 유명한 과학자 중에 가족, 특히 아내의 역할을 다루는 책들이 있어요. 아인슈타인의 그림자 : 밀레바 마리치의 비극적 삶숙녀들의 수첩: 수학이 여자의 것이었을 때같은 책이요. 이런 책을 읽다보면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가족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돌아봐야 한다고 느껴요.

 다음으로, 한국에 돌아와 임신출산육아를 겪으시며 학업이나 직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해요. 아이가 없는 신혼부부에서 아이가 있는 가족이 되었는데, 삶이 어떻게 변했나요?

연화: 임신과 출산이 가져오는 변화는 가족 구성원 한 명이 늘어나는 것을 넘어서더라고요. 특히 임신과 출산을 하는 주체인 여성에게 가장 큰 변화가 나타나요. 크게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회적인 부분이에요.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 ‘임산부는 이래야 한다,’ ‘태교를 위해 동화책은 읽냐’ 등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고 강요되는 규범들이 있어요. 사회적 통념에 따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다가도, 제 고집 때문에 정말 아이가 안 좋은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기도 해요.

두 번째는 육체적으로 정말 많이 변해요. 배가 부르고 입덧하는 것을 넘어서서 모든 감각이 변해요. 한 예로 임신 전에는 향긋한 커피 한 잔에도 행복했는데, 임신하니 커피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려서 더 이상 작은 행복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체온이 살짝 높아지면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잘 집중하지 못하기도 하고요. 임신 전까지 제가 가장 익숙하게 사용했던 도구인 제 몸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었죠.

출산한 후로는 바깥에 잘 나갈 수 없게 되었어요. 저는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집순이’였어요.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결혼의 최대 단점이 남편과 계속 붙어 있어야 하는 점이라 생각할 만큼요. 지금은 24시간 눈을 떼지 않고 돌봐야 하는 아기가 있으니 잠시도 혼자 있을 수 없어 힘들어요. 게다가 고등의 언어를 쓸 수 없는 존재와 하루종일 함께하다 보니 언어와 사고가 단순해지는 것도 견디기 힘들고요. 그러다보니 학업과 연구는 전혀 못 하죠. 그나마 임신했을 때는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실험실에 출근해서 자료를 남기고, 장비들이 정비되는 것을 함께 관찰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마저도 못해요. 실험실은 계속 변하고 계속 움직이는데, 제 관찰은 이렇게 중단되어 있어 아쉬워요.

 

회로: 아이가 태어나면 활동에 얼마나 제약이 오나요?

연화: 사람마다 많이 다를 것 같아요. 어린이집에 100일 만에 맡기시기도 하고, 휴직했으면 1년 만에 복귀하시는 분이 많으니까요. 저는 프리랜서니까 직장을 다니는 분들처럼 육아를 전담하는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아요. 만약 기한이 정해져 있었다면 그 기간 동안 육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텐데, 육아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몰라 가끔 우울해요.

 

회로: 연화 님께서 느끼셨을 우울함에 정말 공감이 갑니다. 또 다른 질문으로는, 학부를 졸업하고 석사까지 마치신 대학(POSTECH)으로 돌아와서 학교의 내·외부자로서 본 학교의 혹은 한국의 전반적인 과학자 사회와 문화는 어땠나요? 문제의식을 갖게 된 부분이나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 있을까요?

연화: 처음에 돌아왔을 때는 좋았어요. POSTECH이 사실 예쁜 학교예요. 학생들은 입학식과 동시에 학교의 예쁜 풍경을 잊는데, 학부생이 아닌 특히 대학원생이 아닌 입장에서 보면 예쁘고 한적하고 좋아요. 건물보다 나무가 더 많은 베를린과도 비슷한 느낌이고요.

그런데 교수님들을 다시 뵈니까 대학원생일 때의 답답했던 감정이 확 되살아나더라고요. 제 배우자와 같이 한 교수님께 인사드렸는데, 교수님이 갑자기 제게 “너도 공부 잘했잖아, 그치?”라고 하시더라고요. 공부를 잘했는지는 둘째치고, 대학을 졸업한 지 꽤 지났는데 갑자기 대학교 때 성적이 소환되고, 저는 ‘공부 잘했던 학생’이거나 ‘못 했던 학생’이 되어야 했어요. 오랜만에 만난 제자와 접점을 찾고, 옛날 저를 좋게 기억해주시려 한 말씀이겠지만, 한편으로는 대학교 이후 제 삶은 지워지고 20대 초반의 학생으로, 다른 것도 아니고 성적으로 다루어져 불편했어요.

또 한 번은 교수님들께서 대화하시면서 ‘걔는 과학고를 졸업하고 똘똘해서 교수가 될 줄 알았어’라고 하시더라고요. 대학생 때에도 과학고 출신 학생과 일반고 출신 학생을 다르게 대하는 교수님이 많아 상처받았는데, 교수님들이 보는 관점은 여전히 좋은 학교 또는 특목고를 나왔는지, 학점이 좋은지, 연구에 매진했는지로 사람을 평가하시더라고요. 또 POSTECH이 소수정예라서, 교수님들이 학생들의 개인적인 부분까지 알게 되는데 개인적인 부분들도 모두 연구 활동과 연결해 평가해요. 답답하기도 하고 ‘내가 대학원생 때 이래서 힘들었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연구를 열심히 한다, 안 한다 평가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POSTECH처럼 연구와 생활이 분리되지 않고, 많은 학생이 가족과 떨어져 교내에 사는 환경에서, 그런 식으로만 평가된다면, 사람으로서의 다른 모든 특성은 지워져요. 그러니 연구 결과가 잘 나오지 않으면 스스로 인생이 루저라고 생각해버려요. 사실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요. 그래서 대학원생들이 우울해하기도 해요. 정말 문제에요.

 

회로: (인아)도 대학원에 와서 느낀 것이 있어요. 처음은 무슨 연구를 하는지를 묻다가도, 결국에는 그 연구를 어느 저널에 투고할지 묻고, 그 저널이 아는 저널이 아니라면 저널의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가 얼마인지를 물어보는 경우가 정말 많았어요. 연구 주제를 이해해보려 노력하기보다는 얼마나 유명하고 인정받는 연구인지에만 관심 가지는 것 같아요.

연화: 그래요. 제가 만난 대부분 과학자가 가장 기뻐할 때가 무슨 연구 하냐고 물었을 때였어요. 자신이 무슨 연구를 하는지, 자신이 어떻게 그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실험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얘기할 때 연구자의 얼굴은 정말 빛이 나요. 그리고 그런 연구 얘기하면서 서로 협력해 연구할 수 있을지, 혹은 문제를 다르게 접근할 수 있을 지 실마리가 나오기도 하더라고요. 평가 말고도 이야기할 주제가 더 많을 텐데 안타까워요.

 

(*) 임팩트 팩터는, 정해진 기간(보통 수 년)동안 해당 학술지의 논문들이 평균적으로 얼마나 자주 인용이 되었는지 나타내는 수치다. 임팩트 팩터를 기준으로 학술지의 중요도가 판단되거나 순위가 정해지기도 한다. 임팩트 팩터가 높은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은 많은 연구자에게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는 논문으로 여겨진다. 연구자를 평가하는 데에도, 임팩트 팩터가 높은 저널에 게재된 논문의 유무 및 편수가 중요하다.

 

회로: 상대방 그 자체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훨씬 좋은 것 같아요. 모르면 다시 물어봐도 좋고요.

연화: 그리고 POSTECH은 가족친화적인 면이 부족한 것 같아요. POSTECH 연구자 중 대다수가 포항이라는 타지에 와서 생활하잖아요. 연구자의 가족도 함께 타지에 와 있는데 가족들을 배려하지 않아요. 최근 과학자 혹은 연구자의 기본형으로 남성을 생각한다는 점이 지적되면서, 이를 개선하려 노력하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과학자를 미혼(혹은 비혼) 개인으로만 상정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연구에 삶을 다 바치라는 말이 나오죠. 그러면 그 과학자의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하죠? 반대로 가정을 꾸린 과학자는? 양육할 아이 등 돌봄이 필요한 가족이 있는 과학자는요? 이런 면에서 연구자 가족을 가족들을 배려하지 않아요.

 

회로(인아): 한국과학상자, 한국공학자상 시상식 일화를 들은 적이 있어요. 수상자 모두가 나이가 좀 있는 남자 교수님이었는데, 수상소감에서 모두가 아내에게 고맙다고,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집에서 도와주어서 고맙다고 말했어요. 사람들은 감동하는 분위기였지만, 전형적으로 남자는 나가서 개인적으로 사회활동하고 학문에 기여하지만, 여자는 집에서 도와준다는 모습이 짙게 보이더라고요.

회로(슬기): 학회가 가족 친화적인 면이 부족한가요?

회로(인아): 가족 친화적인 것이 거의 없다고 봐야죠. 학회를 리조트 같은 휴양지에서 할 때는 가족과 같이 가기도 해요. 그래도 엄마와 아이들은 따로 스키를 타러 간다거나 학회장에 애들을 데려갈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에요. 분위기도 그렇고요. 또 교수들은 저녁에 같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고 학술 교류를 중요시하다 보니까 같이 가도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는 어려워요.

연화: 말씀하신 것처럼 저녁이 문제예요. 가족 친화적이라는 건 단순히 가족을 동반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나머지 가족을 책임져줄 다른 가족이 있는, 주로 아내겠죠, 환경이 되지 않는 연구자는, 예를 들어 여성이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연구자는 학회 활동이 굉장히 제한돼요. 그런 면에서 가족친화적인 학회를 추구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열렸던 한 학회에서는 아이 돌봄 서비스가 함께 제공되었다고 들었어요. 마침 학회장 옆에 베이비페어가 있어서 인프라가 있기에 가능했다고는 들었지만요. 이런 배려가 늘어야 돌봐야 할 가족이 있더라도 마음 놓고 학회에 같이 가서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현재 육아와 동시에 독립연구자의 길을 걷기 위해 진행 혹은 계획 중인 일이 있는지 궁금해요. 그리고 계획을 실행할 때 어려운 점이 있으신가요?

연화: 지금은 육아만 하고 있고, 출산 전 기록들과 틈틈이 모은 자료를 인터넷에 올려보려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시간이 정말 안 나서 고민이에요. 아기가 잘 때 잠깐씩 시간이 나는데, 그 시간을 활용해서 밥을 먹고 씻다 보면 사용할 수 있는 자투리가 별로 없더라고요.

게다가 제 연구는 실험실에 가서 관찰하는 것이 주된 일이에요. 연구자들이 장비를 어떻게 다루는지, 실험을 어떻게 하는지를 직접 보면서 이야기를 들어야 해서 슬슬 아기와 함께 실험실에 가보려고요. 제가 보고 있는 실험실이 배우자의 실험실이다 보니 몇 번 데려가는 연습을 했는데, 아직은 아기를 수시로 보살펴야 하니 실험실에 가도 온전히 연구에 집중하기는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아이와 함께 실험실 관찰하는 방법을 찾고 있어요.

 

회로: POSTECH에서 일하거나 공부하며 육아하는 사람들에게 좋거나 나쁜 환경이 있나요?

연화: 좋은 점은 POSTECH 어린이집이 생긴 점이요. 만 1세부터 4세까지 입학할 수 있고, 오후 7시 30분까지 아이들을 돌봐 준다고 하더라고요. 어린이집이 끝난 후에는 연구할 수 없어 아쉬워하시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POSTECH 어린이집에 입학 인원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경쟁률이 엄청나요. 다자녀, 한 부모가 우선이고 그다음이 맞벌이, 외벌이 부부예요. 저는 독립 연구를 진행하다보니, 어딘가에 재직한 상태가 아니라 맞벌이에 해당하지 않아요. 딜레마예요. 재직 상태가 아닌 양육자는 아이를 맡기고 다른 일을 하기 어렵고, 우선순위에 들려 아이를 더 낳아야 한다니! (웃음)

또, 앞서 말한 연구자를 비혼인 개인으로 간주하다보니 교내에 아기나 엄마를 위한 공간이 전혀 없어요. 연구실에 아이를 데려가면 아기 기저귀를 교체할 수 있는 공간이나 모유수유실이 없어요. 미국에는 모유수유실이 없는 대학이 거의 없다더라고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대학을 목표로 하는 POSTECH이 이런 기본적인 시설도 없다다니 좀 충격이에요.

우리나라의 문제도 아닌 것 같아요. 요즘은 대부분 직장에 모유수유실 설치가 권고돼요. 심지어 고속도로 휴게소에도 모유수유실이 있어요. POSTECH은 학교면서 직장이잖아요. 덧붙이자면 POSTECH 캠퍼스는, 학교와 학생 및 교수의 주거공간이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교수아파트와 학생 기혼자 아파트도 있는데, 아이들과 가족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회로: 여기까지가 저희가 준비한 인터뷰 질문인데요, 마지막으로 오늘 인터뷰에 함께하신 소감과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연화: 최근에는 육아에 전념하다 보니 배우자와 아이가 어땠는지 이야기하는 것이 대화의 전부였었는데, 아이가 아닌 저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오랜만이라 너무 좋았습니다. 소중한 시간 만들어주셔 정말 감사드려요. 이번 인터뷰를 통해서 예전에 했던 일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정리하고 생각할 수 있었어요.

올해 계획은 실험실 고고학의 연구 결과물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 과정을 아이와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지, 동행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 볼 계획이고요.

연구실에 아기를 데려가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이렇게 학교와 연구실에 아이가 올 수 있을 더 많은 사람이 본다면,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너비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저만해도 학교 다닐 때는 학교에 아이가 있는 것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으니까요. 의식적으로 아이를 데리고 다니려고도 노력하고, 결국 아이와 ‘함께’ 제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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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전날 다른 곳에서 옮겨온 장비로 가득한 실험실에서. (2019. 6) 사진: 김연화 제공.

 

아이와 함께연구를 지속하고자 노력하겠다는 연화 님. 함께함의 가치를 아는 연구자로서, 자신의 연구를 소개하는 연화 님의 눈은 누구보다 반짝였다. 흔쾌히 자신의 세상을 공유해주신 연화 님으로부터 삶에서 온 배움을 우리의 세상에도 비추어볼 수 있었다. 연화 님이 선보일 실험실 고고학이 우리에게 또 어떤 세상을 보여줄지 기대해본다.

026: 학교를 바꾸다, 이리여고 폴라리스

Feminist in STEM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 026: 학교를 바꾸다, 이리여고 <폴라리스>

 

페미니즘 단체로 시민단체 혹은 20대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는 조직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10대 혹은 그보다 어린 사람 중에도 페미니스트는 있고, 나름의 조직도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 소개할 페미니스트 모임은 전북 익산 이리여고의 인권동아리 <폴라리스>. <폴라리스>는 원래 2016년부터 <미스리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작년 2019년 이름을 바꿨다.

<폴라리스>는 학교에 장애인 인권 수업 개설을 건의하고 축제에서 인권 부스를 내는 등 활동을 해왔다. <폴라리스>는 이리여고에서 어떤 문제를 느끼고 해결해왔는지 들어보았다.

 

인터뷰어인 <페미회로>의 한솔은 한솔, 인터뷰이 익산 이리여고 <폴라리스>의 이가영, 이다은, 캐슈너트 님은 가영’, ‘다은’, ‘캐슈너트로 표기했다. 교정은 <페미회로>의 우연, 발행은 <페미회로>의 배현주, 우연(이상 가나다순)이 맡았다.

 

회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다은: 이리여고 2학년 올해 2019년 〈폴라리스〉 기장 이다은입니다. 관심사는 페미니즘과 환경입니다.

캐슈너트: 이리여고 1학년입니다. 동물, 환경, 인권에 관심이 많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관심 갖고 있습니다.

가영: 페미니즘을 포함한 모든 권리에 관심이 있는, 이리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인 이가영입니다.

 

회로: 인터뷰에 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캐슈너트: 가영 님 권유로 인터뷰에 참여했어요.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에도 인권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이 있다고 알리고 싶어요.

가영: 페미회로와 〈폴라리스〉가 페미니즘을 주제로 모여 생각을 공유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외부 활동을 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다은: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였어요.

 

회로: 폴라리스에서 활동하기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폴라리스활동 전 동아리 활동이나 SNS에서 읽은 글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가영: 〈폴라리스〉가 작년 2018년까지는 <미쓰리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이름을 바꿨어요. 저는 〈미쓰리딩〉에서도 활동했는데요, 활동 전에는 같은 생각과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서로 이야기하고 정보를 주고받고 활동하며 연대할 기회가 드물었어요. 독서 동아리가 아니면, 친구들끼리 모여 독서 토론 등 단체 활동을 하기 어렵잖아요. 그런데 〈미쓰리딩〉에서 책을 읽고 점심시간마다 모여서 토론하고, 토론이 아니어도 간식도 먹으면서 서로 힘들었던 얘기나, 이건 진짜 빻았다 싶은 일들을 얘기하고 그랬어요.

〈미쓰리딩〉이 인권 동아리인 만큼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에서 모든 일을 진행했어요. 『인권 교문을 넘다』라는 학교 인권 침해 사례로 이루어진 책을 읽고 이야기도 나누었어요. 익산청소년문화축제의 청소년 인문학 읽기대회라는 행사에서는, 『소년소녀, 정치하라』라는 책을 읽고 녹색당 신지예 씨와 토론하기도 했어요. 사실 대화 중 책 내용보다도 각자의 경험과 각자 인상 깊었던 대목을 나누어서 특별하고 인상 깊었던 것 같아요.

다은: 고등학교 입학 전에는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었어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트위터를 시작하면서 여러 글을 접했어요. 임신한 여성에 관한 글이 기억나요. 글쓴이는 임신이 신기하지 않대요. 오히려 인류 과학이 발전해 사람이 달에 가는 시대에 임신 중 입덧과 생리통을 없애는 약이 없다는 게 더 신기하대요. 여기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어요. 이후 강남역 살인사건, 몰카 등 여성혐오 범죄들을 접하고, 여성인권이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한 뒤 〈미쓰리딩〉에 가입하고 차차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캐슈너트: 초등학교 6학년 때 인터넷에서 한 작가분의 강연을 들었어요. 연사가 자신이 페미니스트고, ‘여자는 무엇을 해야 한다’, ‘된장녀’, ‘김치녀’ 등 여성에 대한 편견과 성차별을 알려주고, 성소수자가 존재한다는 것, 성소수자들을 혐오하면 안 된다고 말했어요. 이 강연을 듣고 충격을 받아 인권에 관심을 가졌어요.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서울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평소에는 성소수자 관련 굿즈를 접할 기회가 드문데, 많은 부스에서 각종 퀴어 굿즈를 접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또, 닷페이스의 고백 부스(*)에서 자신의 부모님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실을 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가장 재밌었던 건 퍼레이드였는데,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서 재밌게 행진하고, 퍼레이드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퍼레이드하는 사람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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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서울 문화축제에서 사람들이 퍼레이드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오른쪽 위로 익산청소년인권연합 깃발이 보인다. 사진: 캐슈너트

 

<폴라리스> 소개

회로: ‘미쓰리딩에서 폴라리스로 이름을 바꾼 이유가 무엇인가요?

다은: ‘미쓰리딩’이란 이름으로 활동할 때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가입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싫어서 ‘폴라리스’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개명하고 ‘미쓰리딩’이란 이름은 이리여고 〈미쓰리딩〉에서 활동하던 졸업생들과 담당선생님이 가져갔어요. 〈미쓰리딩〉이 이리여고의 동아리일 때는 학교 밖으로도 활동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미쓰리딩〉에서 활동하던 분들에게 배우고 많이 도움받고 있어요.

저희가 고등학생이라는 한계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적어요. 지금은 졸업한 〈미쓰리딩〉 분들에게 행사 소식을 듣기고 하고, 학교에 정보를 요구할 때는 〈미쓰리딩〉 담당선생님에게 도움을 받곤 해요. 이번 학기 초에 교칙이 개정되었어요. 개정 과정에 관련된 공문서를 보려 했어요. 그런데 어느 학교가, 재학생이 요구한다고 공문서를 보여주겠어요. 그래서 작년 2018년까지 이리여고에서 〈미쓰리딩〉을 담당하셨던 선생님께서 공문서를 구하는 데 도움을 주셨어요.

가영: 동아리 이름을 바꾼 뒤 도움을 많이 받았던 동아리실도 사라졌어요. 동아리실이 큰 역할을 한 건 사실이다 보니 활동이 거의 반 토막 났어요. 〈미쓰리딩〉이 동아리방에 매 점심시간과 방과 후에 모였지만〈폴라리스〉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나요. 동아리가 추구하는 모습과 가치는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여전히 학교 내에서 보장되고 있지 않은 권리를 지켜야하고 인권 친화적인 학교를 만들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회로: 미쓰리딩에게 받는 도움을 좀 더 소개해주세요.

다은: 어떤 활동을 할지 아이디어를 받아요. 제가 기장이니까 학기 초에 어떤 활동을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그때 독서회를 해보라고 도움받았고, 축제 부스에서 어떤 내용 다룰지도 아이디어도 들은 적이 있어요.

외부에서 페미니즘 혹은 청소년 인권 연합이 생기면 알려주시기도 하고요. 촛불청소년연대가 학생의 날을 맞이해, 전국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인권실태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미쓰리딩〉 분들이 저희가 그 설문지 참여할 수 있도록 링크를 공유해주신 적이 있어요.

 

회로: 동아리 활동에 어려운 점이 있나요?

다은: 〈폴라리스〉에는 배정된 동아리방이 없어서 동아리 활동할 때마다 빈 공간을 찾아다녀야 해요. 자율 동아리와 본 동아리가 있는데, 자율 동아리에는 동아리방과 활동비도 안 나와요. 〈폴라리스〉는 자율 동아리고, 본 동아리가 되려면 자율 동아리로 1년 이상 활동해야 하는데, 〈폴라리스〉는 아직 1년이 안 됐어요. 본 동아리 비중이 더 크고, 모든 학생이 본 동아리 하나에는 반드시 들어야 해요. 학교에서 본 동아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는 점도 아쉬워요.

 

회로: 회비만으로 단체를 운영하기는 어렵지 않나요?

다은: 모자라지는 않아요. 전라북도 교육청에서 도내 인권 동아리를 지원하는 사업이 있어서 그 사업에서 활동비를 받거든요. 연 200만 원을 받아 활동하니 회비가 부족했던 적은 한 번도 없고, 항상 기획을 못 해 아쉽죠. 작년에 〈미쓰리딩〉도 지원받았다고 들었어요. 15명 이상의 회원, 1년 계획을 내야 해요. 인권 신장을 위해 홍보 등 동아리 밖으로 향하는 사업도 포함해야 했어요. 그래서 학교 축제에 부스를 내기로 계획하고 이번 달에 부스를 냈어요.

축제 부스에서는, 전라북도학생인권조례의 취지를 퀴즈로 내서 맞추면 책을 주는 식으로 진행했어요. 영화 「82년생 김지영」과 관련해 포스트잇 적기 활동도 했고요. 인권 영역을 나눠, 장애인 인권 존중의식 테스트, 성소수자 인권 영역에서는 LGBT+(*)를 간단히 설명하고, 성소수자 혐오발언에 일침 같은 걸 적어두기도 했어요.

전라북도학생인권조례에 관한 퀴즈에서는 학생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만 추려서 적었어요. 예를 들면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을 설명하고, 상황을 제시한 다음에 이 상황에서 어떤 권리가 침해되고 있는지 맞추는 퀴즈를 냈어요. 한 학기 학생인권 교육이 몇 회 이루어져야 하는지 맞추는 퀴즈도 냈고요. 예를 들면, 용의 복장 규정을 지키겠다는 서약서 작성을 강요받은 상황과 핸드폰을 압수당한 상황이요.

XX년생 XX 방명록 포스트잇에서는, ‘여성들이 발소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밤길을 만들고 싶다’, ‘(몰카 없는)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고 싶다’, 명절 잔소리를 그만 듣고 싶다, ‘명절에 남자도 일 좀 해라’와 같은 얘기가 많이 나왔어요.

가영: 회비가 남아서 문제에요. 더 알뜰하게 돈 팍팍 다 쓸 걸 하면서 아쉽기는 해요.

(*)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 등 성소수자를 묶어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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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부스에 냈던 퀴즈 행사. 사진: 〈폴라리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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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부스에 냈던 포스트잇 방명록. 사진: 〈폴라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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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부스에 참여하는 학생들 모습. 사진: 〈폴라리스〉

 

회로: 폴라리스를 소개해주세요. 동아리에서 같이 얽었던 책과 본 영화도 소개해주세요.

다은: 1학년 3명, 2학년 8명이에요. 실제로 활동하는 분들만 세자면 4명이에요. 그리고 선생님 1명이요. 「가타카」라고 유전자 조작으로 아이를 낳는 세상을 다룬 영화, 「82년생 김지영」, 「서프러제트」를 봤어요. 책은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인권연대의 청소년 인권 특강』, 『아동 인권』을 읽었어요. 책을 선정할 때는, 포털 사이트에 ‘인권’이라고 검색해서 나오는 결과 책 40종 각 2권씩 샀어요. 산 40권 중 몇 권을 보고 괜찮다 싶은 몇 권을 골라 책을 읽고 토론했어요.

 

가영: 다들 학업에 벅차다 보니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2학년 친구들은 거의 〈미쓰리딩〉 회원들이고, 1학년 친구들은, 익산인권동아리연합(이하 ‘익인동’)에서 이리여고에 진학해 가입한 친구들이거나, 가입하고 얼굴 한 번 못 본 친구들이에요. 다들 권리에 목이 말라서 찾아왔을 거라 생각해요. 더 배우고 알아가야 하니까요.

여성 인권, 학생 인권, 성 소수자 인권, 장애인 인권, 동물권까지도 모든 분야에 발을 들여보자고 시작했어요. 동아리를 만든다고 신청서를 낼 때 많이 걱정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미쓰리딩‘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시작하는데 잘 할 수 있을까?’. ‘〈미쓰리딩〉 선생님으로 활동하다 다른 학교로 가신 선생님 없이 잘 할 수 있을까?’ 하면서요.

저희가 만든 저희의 뜻이 담긴 동아리니까 열심히 하자 우리끼리라도 뭐라도 하자면서 매주 모였어요. 학교에 인권 동아리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시작했더니 벌써 학년 말이네요! 교내 인권 침해 사례도 제보받고, 연대하는 동아리에요.

『인권연대의 청소년 인권 특강』이라는 책을 읽고 선생님과 감명 깊은 대목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어요. 이 책은 장애인 인권과 페미니즘 등 저희가 공부하려는 내용을 다양하게 포함해서 어느 부분을 읽어도 이야기를 나누기 좋았어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지만, 페미니즘과 관련된 이야기만 꼽자면, 혐오는 꼭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만이 혐오가 아니고, 미소지니misogyny(*)의 어원과 여성 숭배는 혐오라는 이야기를 나눴어요.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도 같이 읽었어요. 저는 이 책을 〈폴라리스〉에서 읽기 오래전에도 읽었는데, 계속 기억나던 내용이 있어요. 꼭 웃지 않아도 된다고요. 제가 평소에 그런 말을 많이 들어왔거든요, 좀 웃으라고 정색하고 있다고, ‘여자애가 애교가 있고 웃는 맛이 좀 있어야 한다’ 둥 이런 말들이 있잖아요. 저도 모르게 스트레스를 주던 말이어서, 웃을 필요가 없다는 구절을 늘 기억하고 다녔어요.

 

(*) 한국어로는 여성혐오로 번역되는 원어.

 

이리여고에서 활동하기

 

회로: 제가 학교에 다닐 때는, 두발과 복장 규제도 무척 답답했어요. 지금 이리여고 교칙은 어떤가요?

가영: 교칙이 2019년에 개정되었어요. 2018년 이전에는 두발은 거의 자유였고 복장 단속도 심하지 않아서 교복과 사복을 자유롭게 입을 수 있었고, 복장 색상을 제한하지 않았어요. 간단한 동의서만 내면 핸드폰도 내지 않아도 되었고, 화장도 단속하지 않는 다른 학교들에 비해 자유로운 교칙이었어요. 그런데, 올해 교칙을 갑자기 개정한다는 소문이 들려오더니 저희 의견 수렴하지 않고 교칙을 통보받았어요. 복장은 교복 혹은 검정~남색계열만 입을 수 있게 되었고, 외투도 밝은색은 입을 수 없게 되었어요. 화장하면 복도를 지나다가도 잡히고, 쉬는 시간에 핸드폰을 해도 뺏기게 되었고요.

각 학년과 반마다 제한하는 규정이 모두 달라서 학년과 반마다 학생끼리의 분열이 생기기까지 했어요. 그래서 대자보도 붙였죠. 선생님들은 교칙 위반은 바로 생기부에 기록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면서 많이 협박하세요. 이번 학기가 너무 힘들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다시 개정한다고 해요. 설문조사도 시작했고요. 어떻게 교칙이 어떻게 개정되어도 분명 학생 인권을 침해하리라고 생각해요. 학생 인권이 보장하게끔 교칙이 개정되면 좋겠습니다.

 

다은: 내년 2020년에 다시 개정할 예정이지만, 지금 교칙을 말씀드릴게요. 2019년 교칙은 ‘학생다움’, ‘단정함’과 같은 표현을 포함해요. 전북학생인권조례에 나와 있듯 이런 표현은 학생을 틀 안에 가두고 개성을 실현할 권리를 제한하는 표현이에요. 그래서 이런 표현이 빠지면 좋겠고, 더 나아가 용의 복장 규정 자체가 사라지면 좋겠어요. 우리 학교에서는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지만, 옷의 색과 재질을 제한해요. 예를 들면, 남색, 회색, 검은색만 입도록 해요.

 

회로: 학생들이 교칙 개정에 참여할 수 있나요?

다은: 교칙 상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하지만, 학교가 기회를 충분히 부여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교칙 개정을 위해 열렸던 공청회에도 일반 학생이 참여하지 않았고 공청회에 생활규정에 대한 의견을 모으기 위해 학급 회의를 진행하게 했는데 회의를 한 학급도 있고 안 한 학급도 있고요. 그래도 2020년 교칙 개정은 2019년보다 나아질 것 같다고 생각한 게 12월 16일에 생활규정 개정 1차 의견 수렴을 위해 교직원, 학생, 학부모를 대상으로 해서 인터넷 설문조사를 진행했거든요. 제대로 된 의견 수렴 절차를 진행했다는 점에서 나아졌다고 보았어요.

가영: 교칙에 따르면, 학부모, 교사 대표, 학생 대표가 모여 공청회를 진행하고 교칙을 개정해야 해요. 그런데 이리여고 교칙 개정에 있어서 학생이 참여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공청회가 열리지도 않았고, 교칙 개정 결과를 통보받기만 했어요,

 

회로: 82년생 김지영 보러 갈 때 폴라리스회원이 아닌 이리여고 구성원도 함께 봤나요?

가영: 동아리 비가 많이 남기도 했고, 특정 부원 말곤 활동 참여가 너무 저조해서, 영화라도 보자는 생각에 친한 친구들 부르고, 〈폴라리스〉에 관심은 있지만, 학교 눈치 때문에 가입하지 못한 친구들과 함께 갔어요.

다들 너무 공감했던 장면이나, 책을 영화로 잘 풀어내었다는 이야기, 엄마, 할머니 이야기 등 먹먹한 이야기를 했어요. 김지영의 어머니가 가족 식사 자리에서 김지영에게 막 나대라는 장면이 너무 좋았다는 친구도 있었고, 아들 보약만 지어온 아버지께 화내는 어머니의 연기가 너무 좋았고 눈물이 났다는 친구, 그리고 저는 저희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저를 낳고 하지 못한 일들이 많은 우리 엄마. 그리고 친하긴 했지만, 페미니즘에 관해선 이야기를 잘 나누지 않던 친구가 “이 영화 내 인생 영화가 된 것 같다”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 괜히 슬프고 고마웠습니다.

 

다은: 교사 중에는 오지 않았고, 회원 친구인 2학년 2명이 같이 보고 오긴 했어요. 영화 보고 나서는 영화에서 어느 부분이 슬펐다는 감상도 얘기하고, 자기 경험과 연관 지어 얘기 나누기도 했어요. 〈폴라리스〉를 담당하는 남자 선생님은 자신의 가족들 얘기를 영화에 연관 지어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회로: 이리여고에서 교사와 학생들은 폴라리스를 두고 어떤 이야기를 주로 하나요?

캐슈너트: 학기 초에 〈폴라리스〉에 가입하려는 제게, ‘〈폴라리스〉는 좀 이상한 동아리라고,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떠냐’는 식으로 말씀하셨어요. 작년에 〈폴라리스〉에 관련된 안 좋은 일이 많았다면서 안 좋은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다은: 〈폴라리스〉는 인권을 공부하기 위해서 만든 독서 토론의 목적이 큰데, 〈미쓰리딩〉 당시 교내 인권 침해를 문제 삼고는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편해하는 거죠. 캐슈너트 님이 어떤 선생님을 말하려는지 알 것 같은데, 이 선생님뿐만 아니에요. 장애인 인권 교육에 관해 교장선생님께 건의하러 간 적이 있어요. 교장선생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나면, ‘나도 인권 좋아한다. 그런데, 대자보를 하든 무엇을 하든 나에게 먼저 말해주고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저희 활동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교사가 안 그런 교사보다 훨씬 많아요.

학생들 의견은, 가입 홍보, 축제 부스에서 들을 기회가 있었어요. 〈폴라리스〉 활동도 좋고 들고는 싶은데, 생활기록부 쓸 때 유리한 동아리 들고 싶어서 다른 동아리에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자율 동아리가 있고 본 동아리가 있는데, 〈폴라리스〉는 자율 동아리고, 자율 동아리는 1개밖에 들 수 없거든요.

 

가영: 〈폴라리스〉는 〈미쓰리딩〉만큼 파급력이 크거나 반감을 사지는 않아요, 아는 사람만 아는 동아리죠. 근데 〈미쓰리딩〉은 정말이지 모두가 싫어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너 〈미쓰리딩〉이니?’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요. 〈미쓰리딩〉이 5년 정도 활동했지만 저는 1년만 활동했는데도, 제가 〈미쓰리딩〉인 걸 모두가 알고, 모든 선생님이 약간 눈치를 줬어요. 따로 불러서 이야기할 정도로요. 사실 그게 스트레스였지만, 저는 그 상황에서 활동을 포기하면 제가 지는 것 같고, 학생 인권이 보장되면 교권은 추락한다는 말에 동의하는 것 같아서 계속 따가운 시선을 받아도 좋다고 생각하며 활동했어요.

하지만 이제 〈미쓰리딩〉은 이리여고에서는 역사 속 동아리가 되었고 〈폴라리스〉라는 인권 동아리가 생겼잖아요? ‘다들 냅둬 쟤네 원래 그래~’하며 포기했는지 아니면 이제 이해하기로 했는지, 전처럼 눈치를 주거나 싫어하진 않아요. 제가 면역이 생겨서 둔해진 걸 수도 있지만요. 다들 교내에서 인권 침해를 당했을 때, 빻은 말 듣고 화났을 때 저한테 와서 이야기하고, 같이 화내기도 해요. 인권 좀 챙기겠다는데 당연한 거 보장받지 못하면서 사니까 만든 동아린데 왜 눈치를 주고, 제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에요. 계속 활동해야죠. 계속.

 

회로: 여성주의를 주제로, 가족과 친구 등 주변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면 어떻게 대처하나요?

캐슈너트: 수학 학원 선생님과 일이 있었어요. 선생님이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다.’, ‘여자는 서로 질투해서 승진 못 한다’는 얘기를 하니, 저와 친구가 불편하다고 말을 했더니, ‘이런 얘기를 하면 꼭 이런 애들이 있다’며 이상한 애들로 취급했어요. 학교 선생님들은 워낙 사례가 많아서 따로 말하기도 힘들고요.

다은: 2학년 어느 선생님은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굉장히 많이 하세요. 여성 인물이 주제가 될 때마다 출산 관련된 얘기를 많이 하세요. 예를 들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치가 심했고 아이를 못 낳았다’는 식으로요. 다른 선생님은 ‘너희가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말씀하세요. 듣고는 ‘저희 결혼 안 해요, 애 안 낳아요’라고 대꾸하니, ‘꼭 저런 애들이 먼저 결혼하고 애 낳더라’는 식으로 반응하시더라고요. 정말 일반적인 분들이에요.

 

가영: 학교 밖에서는 여성주의를 주제로 이야기할 일이 거의 없고, 학교와 집이 일상이기 때문에 학교 안의 일이 전부에요. 학교 안에서, 모두가 같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의견 차이, 생각 차이는 분명히 있어요. 저는 1학년 때 반 친구 한 명이, ‘페미는 메갈이다’, 산이 노래를 들으며 산이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도, 여태 살아오면서 차별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텐데 그런 말을 하는 게 너무 속상하더라고요. 그래서 큰소리로 ‘그럼 내가 메갈 하겠다, 문제 있냐’면서 그 친구와의 사이는 막을 내렸던 기억이 나네요.

그 상황에서 반 아이들은 다들 저를 보며, 저건 좀 아닌 것 같다고. 한 친구는 ‘너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해보라’면서 반이 떠들썩했던 기억이 나요. 다들 큰 행동으로 보여줄 순 없어도 속으로는 페미니즘에 관심이 가득하다는 걸 느꼈어요. 여자 고등학교에서 다같이 생활하며 몸 부딪히며 살아가는데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아닐 수 있을까 싶었어요.

제가 동급생과 의견 충돌이 있던 건 이 일뿐이고, 보통 선생님과 의견 차이가 생겨요. 수업 시간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선생님들이 계시기 때문에. 좀 편안하게 대해주시는 선생님께는 그건 좀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것 같아요.

woman holding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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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로: 교사들도 문제 발언을 하나요?

캐슈너트: 정말 많이 해요. ‘성소수자가 많이 입양하는데, 자기들은 그게 좋은 줄 안다’, ‘여자는 나이가 어릴 때 화장하면 천하고, 나이 들어 화장하면 추하다. 그래서 내 딸에게 화장 좀 하라는 얘기를 했다.’, ‘그렇게 섹시한 자세로 앉아 있지 말라’, ‘다리 두꺼우니 치마 입지 말라’,’너 예쁘다‘, ’못생겼다‘ 평가도 자주 하고요. ‘나는 성소수자 지지 안 한다. 그건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 싫어한다’.

학년으로 차별도 하시는데요 ‘2학년은 1학년에 비해서 되게 말을 안 듣는다’, 3학년 선배가 서울대에 합격한 소식을 1, 2학년이 모인 자리에서 전하며 1학년에게만 기대한다고 표현하시기도 했어요. 어떤 선생님은, ’임신은 할 만하다. 여성은 임신하고 나면 더 강해진다. 꼭 한번 해봐라‘는 식으로도 말씀하셨고요.

다은: 학년 초에, ‘정신교육’이라고 교사들이 2학년 학생들을 강당에 모은 적이 있어요. 용의 복장 규정에 불만이 있다면 모두 말해보래서, 누가 치마 길이와 관련된 규정을 문제 삼았어요. 그러자 어떤 선생님이, ’보는 사람이 불편할 정도만 아니면 된다. 입는 꼬라지가 너무 사람 불편하게 한다.‘

가영: 우선, 트위터에 ‘이리여고 명언봇’ 이라는 계정이 있어요. 계정이 소개하듯, 선생님들이 모든 권리를 다양하게 침해하는 빻은 말을 하십니다. 계정에 올라온 말이 다가 아니고요. 제가 모르는 사이에 더 많은 말이 오가겠죠. 다른 반 친구에게 작년 일을 들었어요,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자신도 ’00년생 000‘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겠다는 남자 선생님이 계셨어요. 그분보다 더한 분이 학교에 많아요. ‘여자애들이~‘ 로 시작하는 말도 많이 하시고 학생다움을 많이 강조하시곤 해요. ‘공부 못해도 남자 잘 만나서 결혼하라’는 선생님도 계시고. ‘여자애들이 이러면 안 되고, 학생다워야 한다’는 둥 학교 안팎에서 말도 안 되는 많은 요구를 받아요.

 

회로: 교사들이 적절한 제재를 받기도 하나요?

다은: 제재는 없는 것 같아요. 선생님이 있다는 것 자체로 학생들은 할 말도 못하고, 갈등 안 만들려 하죠.

 

회로: 학생들과는 어떤가요?

다은: 학생들은 다양해요. 여성주의에 무관심한 친구도 있고, 안티페미에 가까운 친구도 있고요. 여성 연예인이 이슈가 되면 의견이 많이 갈리는데, 면대면으로 얘기해 본 적은 없어요. 속으로만 ‘쟤 왜 또 저래’라고 생각하죠.

 

회로: 여고, 남고, 남녀공학 학교의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있어요. 학교 밖에서 느끼기에는 어떤가요?

캐슈너트: 남학생들은 막말을 정말 많이 해요. ‘여자를 만났는데 엄청 뚱뚱하다. 돼지x이다.‘, 술 마시고 담배 피웠다는 얘기도 크게 말하고요.

 

회로: 이리여고라서 좋은 점과 안 좋은 점이 있나요?

캐슈너트: 가장 좋은 건 복장이 자유로운 거죠. 많은 학교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사복이 허용되거든요. 장애인 친구들이 있어서, 편견과 차별을 극복할 기회가 있어요. 안 좋은 점은, 선생님들이 고쳤으면 하는 점을 말할 곳이 없어요. 선생님들의 장애인 인권 의식도 없고 학교에서 장애인 인권이 바닥임에도, 해결하려는 노력도 없고요.

다은: 저도 비슷해요. 저희 학교에서는 장애인 학생과 비장애인 학생이 같이 수업을 들어요. 엘리베이터도 있어, 시설 면에서는 장애인 학생들을 존중해준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시설만 좋을 뿐 의식은 바닥이에요. 전라북도학생인권조례에 따르면 학교마다 인권 교육을 연 2회 실시해야 해요. 이런 이유로 시행하는 교육도 다분히 형식적이고, 학생들이 자습하는 시간 정도로만 여겨요.

가영: 공립 학교이기 때문에, 신고나, 건의 사항이 사립 학교보다 빠르게 수용된다는 점이 그나마 좋네요. 하지만 저희는 졸업 전까지는 이리여고 학생이니까 다른 학교와 비교하는 게 의미가 없잖아요? 저희가 사는 세상이 힘든데 누구랑 비교하면서 위안을 얻는다는 것도 이상하고. 아직 선생님들께서 숱한 빻은 말들을 하세요, 교칙도 제대로 개정이 되지 않았고요.

 

회로: 인권 교육 내용은 무엇인가요?

다은: 강의마다 내용은 달라요. 장애 인권을 다루기도 하고요. 올해는 1학기에 전문가분을 불러, 노동 인권 강연과 장애인 인권 강연을 들었어요. 장애인 인권 교육은 반마다 그저 영상물을 틀어주고 말았어요. 애들이 보고 있겠어요. 그 시간에 자습하죠.

캐슈너트: 노동 인권 교육 때는 강당에 모여서 같이 교육을 들었는데요, 선생님이 사진만 찍고 끝내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다은: 이 두 교육 외에, 저와 가영이가 교장 선생님께 건의해 강사분을 불러 장애인 인권 교육을 또 하기도 했어요. 이 교육은 2학년 장애 학생이 있는 학급만 들었어요. 사고로 장애를 얻은 분을 초청했었는데, 적은 학생만 인권 교육에 참여시키니 훨씬 잘 집중하더라고요. 다만 수업 내용으로는 할 말이 많아요. 교장선생님께 건의한 취지는, 학생들이 장애인 비하 발언을 함부로 일삼는 행동에 문제를 느끼고 이를 고치려는 목적이었어요. 강의를 비하할 의도는 없지만, 그 강의 내용은 안전 교육과 크게 다르지 않은 후천적 장애를 얻지 않는 방법이 주였어요.

 

회로: 학생 간 장애인 인식이 다른가요?

다은: 선생님들이 학생에게 아예 관심 없고 신경을 안 쓰세요. 장애 학생들은 4교시까지만 수업을 듣고, 이후 수업은 장애 학생들만 모인 통합반이라는 곳에서 수업을 들어요. 많은 선생님께서 장애 학생들을 ’4교시까지 수업 듣고 갈 애들‘이라고만 생각해요.

사례를 들자면, 조별 활동을 하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장애 학생은 조를 안 짜서 수업에 오셨어요. 그러니 장애 학생들은 어디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선생님은 나 몰라라 하셨어요. 수업에서 배제하는 일도 직접 봤고, 듣기로는 수업에서 조는 학생에게 ’특수 학생(장애 학생)도 그렇게는 안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선생님도 있대요.

가영: 작년 저희 반에도 통합반 친구가 있었어요. 제가 ‘장애인 같다’, ‘병신’ 이런 비하 발언 자체를 쓰지 말자고 자주 말하고, 많이 싸워서인지, 장애 인식이 낮은 반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모든 반이 그러지 않고, 통합반 친구들이 있는 자리든 없는 자리든 비하하는 의미가 담긴 말을 많이 쓰는 반도 있다고 해요. 장애 학생 친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친구들끼리 있는 자리에서, ‘너 장애인 같다~’라는 말을 한다든지, 지금 지금은 제 학급에 장애인 친구가 없지만, 반에서 장애인 비하 발언이 정말 난무해요. ‘장애인’을 비하하는 뜻으로 말하는 게 잘못인지 모르는 친구들이 꽤 많아요.

캐슈너트: 학생들이 장애 학생들을 엄청 무시하죠. 학생들이 장애 학생을 폭행한 적이 있어, 담임 선생님께 건의드렸어요. 선생님이 폭행당한 장애 학생에 좀 더 관심을 가지기는 했지만, 그 장애 학생이 괴롭힘당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어요. 제가 가해 학생을 알려주지 않아서인지, 가해 학생이 처벌받지는 않았어요. 제가 담임선생님에게 폭행 사건을 말씀드리기 전까지, 장애 학생이 본인 학생이라는 생각을 전혀 안 하셨대요. 아마 통합반 담임선생님이 따로 계시니, 비통합반 담임선생님들은 자기 반 학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회로: 교내 페미니즘 이슈를 소개해주세요.

다은: 학교와 관련된 이슈는 아니지만, 학교 친구들과 얘기하는 이슈는 있어요. 최근에 연예인들이 악플로 안타까운 선택을 한 사건이 많았잖아요. 누구는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하고, 어떤 애들은 누구의 악성 댓글 때문에 죽었는지 대화하더라고요. 진솔이라는 아이돌이 인스타그램에 ’짧거나 달라붙는 의상으로 활동하는 영상으로 만든 짤 좀 그만 올리라‘고 올린 글(*)이 요즘 학교의 페미니즘 이슈에요.

가영: 여자 영어 선생님이 나눠준 지문의 주제가 여성 인권이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여성에 관한 지문이었어요. 그분 수업에서 최초의 여성 마라토너 이야기, 그리고 그 본문으로 영상 제작을 하고, 여성 투표권의 역사도 배우고. 그리고 페미니즘, 여성 인권, 여성 인물에 대해 발표하는 학생들이 많아졌어요. 여자 선생님들께서는 모두 페미니즘에 좋은 응원을 보내주세요. 영화 「82년생 김지영」 이야기도 나누고요.

(*) 전혜민, 「성희롱성 게시물에 에이프릴 진솔 “그만 올려라” 호소」, 2019.12.25, 여성신문

 

회로: 익산에는 다른 인권 동아리는 없나요?

다은: 주변 여러 학교 학생이 익인동 톡방에 계시긴 해요. 그런데 그분들이 졸업하시면서 소식을 더 듣지는 못했어요.

가영: 익인동은 작년에 서울 퀴어문화축제로 캠프를 다녀온 후로 특별하게 모인 활동이 없어요. 다시 살려보자고 회원을 모집했지만, 올해 익인동 활동 역시 저조했기에 새로 들어온 회원도 없어요. 〈미쓰리딩〉은 졸업한 분들이 대학가로 나가셔서 활동하고 계세요 〈폴라리스〉와 〈미쓰리딩〉은 학교 교칙 문제로 모이기도 하고, 이번에 페미니즘 독서 토론 모집을 하는 것 같더라고요. 모두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회로: 마지막으로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캐슈너트: 다들 학교생활만으로도 바쁠 텐데, 각종 이슈를 고민하고 현실을 개선하는 데에 집중하는 게 대단하고 앞으로도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요.

다은: 항상 여성 청소년으로 살아가는 데에 한 점 부끄럼이 없습니다.

가영: 학교 안에서의 활동이 열악한 건 사실이에요. 우리 활동에 있어서 명확한 답이란 건 없는 것 같아요. 함께 연대하면 뭐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2년간 동아리 활동을 하며 느낀 것은, 안 바뀌고 계속 제자리 걸음일 것 같은 것도 어떤 점에서는 분명히 바뀌고, 분명히 바뀔 거에요.

 

사회는 많은 유무형의 규칙으로 유지된다. 그 중 어떤 규칙은 불필요하고도 억압적이다. 지나가는 학창시절로 다뤄지기만 하는 초중고등학교 사회는 일반 사회와는 좀 더 특수하다. 일반 사회에서는 누구든 그 자체로 독립된 존재로 다뤄지는 반면, 초중고등학교의 구성원인 학생은 독립되었다기보다도 보호자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도움받아야하는 존재로 여기는 이유에는 학생이 시민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범할 수 있는 여러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기 위함도 있다. 반면 학생은 단지 보호자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고 여긴다면, 시민이 공동체의 문제와 규칙을 두고 다른 시만과 직접 만나 해결하는 상상력을 기르기는 어렵다.

많은 이가 학창 시절을 답답한 시절로 기억할 것이다. 모두 두발 규제와 복장 단속, 핸드폰 압수 등 온갖 불필요한 규칙에 답답했다. 그러나 잘못된 규칙을 개선하기 위해 누구를 만나 무엇을 제안해야하는지는 상상이라도 해본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규칙은 주어진 것이고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 이도 많을 것이다. 반면 폴라리스에서는 학교를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구성원들을 만나고 활동해왔다.

폴라리스가 주변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직접 규칙을 바꿔내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과 상상력을 가질 수 있다. 용기 있게 직접 다른 시민을 만나온 모습이 폴라리스의 활동이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지길 바라는 이유다.

025: 베를린에서 다시 첫 발을 내딛다, 김무아

Feminist in STEM 페미회로인터뷰 프로젝트 025: 베를린에서 다시 첫 발을 내딛다, 김무아

2020년 페미회로의 첫 개인 인터뷰이는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부에서 석사를 졸업하고 베를린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하는 김무아 님이다. 김무아 님은 학부생 때 교환 학생으로 독일에 간 것을 계기로 페미니즘에 눈떴고, 친구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페스코 채식을 하게 된 페스코 베지테리언 페미니스트이다. 또한 베를린에서 갓 시작한 박사 과정에서는 전자공학과 머신 러닝을 접목한 연구를 시작하려고 하는 새내기 유학생이기도 하다. 무아 님이 베를린으로 떠나기 며칠 전인 201911, 두근거림과 기분 좋은 에너지로 가득 찬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어인 페미회로의 희수는 회로, 인터뷰이 김무아 님은 무아로 표기했다. 교정은 페미회로의 한솔, 발행은 페미회로의 배현주, 우연(이상 가나다순)이 맡았다.

 

(사진 중 일부와 무아 님의 마지막 답변은 베를린 유학 생활 중 보충되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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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여행을 즐기는 무아 님. 김무아 제공

 

회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무아: 안녕하세요, 저는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부에서 석사로 졸업하고, 2020년부터 베를린 공대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하게 된 김무아라고 합니다.

 

회로: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요청받았을 때 응할지 고민하셨나요? 어떤 이유로 인터뷰하게 되었는지도 궁금합니다.

무아: 처음에 인터뷰를 요청받았을 때는, ’제가 최고의 페미니스트도, 최고의 실력을 갖춘 연구원도 아닌데 감히 인터뷰해도 되나?’라는 생각에 고민했어요. 같은 분야 사람이 이 인터뷰를 보고 ‘얘가 뭔데 인터뷰를 해?’라고 생각할까 봐요. (웃음) 그렇지만, 제가 외롭고 힘들 때 페미니스트들의 인터뷰에서 많이 도움받았기 때문에, 저도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싶어서 인터뷰에 응했어요. 또, 독일에 유학 가는 사례가 드물어, 독일 유학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기도 했고요.

 

회로: KAIST 학부 때는 물리학과에서 전기 및 전자공학부로 전과하셨다고 들었어요. 원래 물리학과를 선택하셨던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무아: 어릴 때 자주 과학 잡지 『뉴턴(Newton)』을 봤고, 천문 캠프에 가서 별 보기를 좋아했어요. 자연스레 장래에는 천문학자가 되기를 꿈꾸었어요. 천문학자를 ‘우주의 신비’를 밝혀내는 멋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저에게 선생님이 물리학과에 가야 천문학을 공부할 수 있다고 해서 물리학과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교에 진학해서 공부해보니, 물리학과에 진학한다고 우주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실제로는 천문학자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적다는 것도 알았고,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이 제가 꿈꿨던 천문학과는 멀었어요.

 

회로: KAIST 물리학과에 원래 천문학 수업이 있나요?

무아: 없어요. 그래서 원래는 서울대 천문물리학부에 가고 싶었는데, 고등학교 선생님께서 ‘천문학자들은 보통 물리학과 나와서 천문학자가 되니까 물리학과에 가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KAIST에서는 장학금을 많이 주니까, 저도 그 점에 좀 더 이끌리기도 했고요.

하지만 학교에서 천문학 수업을 듣지 못하고 물리학과의 다른 수업만 듣다 보니 흥미를 잃었어요. 전과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어떤 과로 전과할까 고민하다 보니 전기 및 전자공학부가 잘 맞겠다고 생각했어요.

 

회로: 전기 및 전자공학부가 잘 맞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무아: 제가 별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신비한 것의 원리를 알고 싶다는 궁금증에서 시작했어요. 그래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신기한 전자 통신 기술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전기 및 전자공학부로 전과했어요. 수업을 들어보니 저에게 잘 맞기도 했고요.

 

회로: 그렇군요. 전기 및 전자공학부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석사 때는 정보 이론과 그 응용에 관해서 연구하셨는데, 이 분야를 간단히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무아: 정보 이론은 정보를 정확하고 안전하게, 효율적으로 통신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분야예요. 주어진 환경에서 부호가 달성할 수 있는 최적의 정보 전달 성능을 분석하고, 고성능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부호 체계를 고안해요.

성능에는 여러 척도가 있어요. 오류를 많이 정정할수록, 정확도가 같다면 전력과 채널 사용 횟수 등 자원을 적게 사용할수록, 고성능의 부호 체계라고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정보를 전달할 때 신호가 벽이나 장애물을 만나게 되면, 그 신호 중 일부분이 잘못 전달되거나 사라지는 오류가 생길 수 있어요. 오류를 많이 정정할수록, 정보가 도청되었을 때 정보를 많이 보호할수록 부호 체계가 고성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정보 보안을 위해 데이터를 전송할 때에, 입력된 정보를 그대로 보내지 않고 바꾸어서 보내기 때문에 도청되더라도 데이터가 그대로 드러나지는 않거든요.

 

회로: 그렇군요. 혹시 석사 때 하셨던 연구를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예시가 있으면 조금 더 이해하기 편할 것 같아요.

무아: 통신을 할 때,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그리고 그 둘을 중계하는 채널(channel)이 있어요. 우리가 컴퓨터나 휴대폰 메모리에 정보를 저장하는 사례에서는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메모리라는 채널을 통해 정보를 전달한다고 할 수 있어요. 통신 중 여러 가지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배터리가 방전되거나 저장소에 전류가 흘러들어와 저장된 정보에 오류가 생길 수 있겠죠. 이게 통신 과정 중 채널에서 발생하는 오류예요. 채널에서 정보에 오류가 생기는 다른 예시로는 USB 메모리를 떨어뜨려서 저장된 정보가 날아가거나 화장실에서 전화할 때 신호가 끊기는 일 등이 있어요.

저는 석사과정 동안 방금 설명한 부호 체계에 관한 이론을 분산컴퓨팅이라는 분야에 적용하는 연구를 했어요. 분산컴퓨팅 환경에는 일을 다른 컴퓨터들에 나눠서 시키는 마스터(master) 컴퓨터와 분배받은 일을 수행하는 워커(worker) 컴퓨터들이 있어요. 만약에 모든 워커에게 똑같은 양의 일을 서로 겹치지 않게 분배하면, 우리가 최종 결과를 받기 위해 모든 워커가 일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그런데 워커마다 마스터와의 거리나 자신의 하드웨어 성능에 따라 능력이 달라요. 각각의 워커가 일을 마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고 확률적으로 바뀌기도 하고요. 그런데 워커마다 일을 마치는 시간이 달라서 전체 과제를 마치는 수행 시간이 길어지는 걸 방지하고 싶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워커들에 일을 조금씩 겹치게 나누어주면 일부 워커가 일을 끝내지 않았더라도 전체 과제는 완성할 수 있어요. 일을 못 끝낸 워커를 오류가 일어나서 사라진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사라진 부분을 복원해 오류를 잘 정정할 수 있는 부호 체계가 있다면, 일부 워커가 일을 끝내지 못해도 전체 값을 얻을 수 있죠.

 

회로: 정리하자면 컴퓨터에게 일을 잘 시키는 방법을 연구하셨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무아: 네. 분산컴퓨팅에 오류를 정정할 수 있는 부호 체계를 적용하여 계산 속도를 최적화하는 연구라고 할 수 있겠네요.

 

회로: 그렇군요. 처음에 이 분야를 연구하겠다고 결심하신 계기가 있나요? 전기 및 전자공학부에도 다양한 연구 분야가 있을 텐데, 왜 이 분야를 선택했는지 궁금해요.

무아: 학부 때 들은 통신과 정보 이론 관련 수업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왜냐하면, 정보 이론은 하드웨어를 직접 다루기보다는 수학적인 모델을 다뤄요. 이론을 다루다 보니 실험 데이터를 다루는 분야보다는 결과가 명확하게 딱 떨어지는 분야라서 좀 더 흥미를 느꼈던 것 같아요.

학부 때 회로 설계 수업을 들었는데요. 저희 실험조가 디자인해온 회로도대로 회로를 만들어도, 저희가 예상한 결과랑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회로가 잘 작동하지 않아도 그 이유조차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게 저는 너무 답답했어요. (웃음) 그래서 이론적 해석을 적용해서 연구하면서도, 이론을 실용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연구실을 선택했어요.

 

회로: 전기 및 전자공학부라고 하셔서 아주 실용적인 연구를 하셨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론적인 분야에 가깝다는 말이군요?

무아: 네, 사실 전기 및 전자공학부가 취업이 잘 된다고 하긴 하는데, 제가 선택한 분야는 전자과에서도 이론적인 분야라 취업과 직접 연계가 되는 분야는 아니긴 해요.

 

회로: 물리학과에서 전기 및 전자공학부로 가셨는데도. (웃음)

무아: 네, 제 버릇 남 못 주고 (웃음) 흥미를 좇아가게 되었네요.

 

회로: 정보 이론 분야를 연구하면서 연구 안팎으로 힘들었던 점이 있나요?

무아: 실험하는 연구는 아니다 보니 다른 사람과 일정을 맞춰서 실험해야 하거나 꼭 연구실에 출근해야 한다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이 없는 점은 좋았어요. 실험 연구실에 다니는 친구들이 겪기 마련인 연구실 동료와의 생활에서 오는 문제도 거의 없었고요.

다만 처음에는 제가 생각한 통신 시스템 모델이 합리적이고 실제를 잘 반영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게 쓸모없는 연구일까 불안하기도 했어요. 그런 생각을 자꾸 하다 보면 동기 부여가 잘 안 되기도 하고요.

 

회로: 그렇군요. 박사 과정에서 하는 연구는 석사 과정에서 했던 연구와 관련이 있나요?

무아: 어떻게 보면 분야를 바꿔서 간다고 할 수도 있어요. 머신러닝이라는 새로운 도구로 정보통신의 보안을 강화하는 연구를 할 계획이에요. 머신러닝은 정확도를 잘 높이니까, 부호 설계에 머신러닝을 도입해서 보안을 강화하는 방안을 알아내고 싶어요. 정보 이론이라는 큰 주제는 가져가되, 사용하는 도구가 달라졌다고 할 수 있어요.

 

무아의 독일 박사 도전기

 

회로: 박사 유학을 준비하는 동안에 인턴을 독일로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어떤 계기로 인턴을 떠나게 되었나요?

무아: 제가 박사 유학 갈 때 생각했던 주제가 ‘정보 이론에 머신러닝을 도입해 얻을 수 있는 효과’이다 보니까, 유학 준비 기간에 머신러닝과 관련된 실무 경험을 쌓고 싶었어요. 학교에서 머신러닝 프로젝트 수업을 듣긴 했지만, 수업에서 배운 것을 실제로 써보는 경험을 하고 싶었거든요. 박사 유학을 준비 중이었으니까 준비 기간 6개월 정도 단기간에 프로그래밍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인턴 자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마침 독일에서 할 수 있는 하프 타임 인턴 중에 저에게 잘 맞는 자리를 찾았어요. 하프타임이니 박사 준비에 시간을 쓸 수 있는 인턴 자리이기도 했고요. 독일에서 인턴을 하면, 한국에 있는 것보다는 더 편한 교통과 마음가짐으로 유럽 대륙 대학원의 박사 인터뷰를 볼 수 있다는 점도 이점이었고요.

 

회로: 인턴 때는 어떤 일을 했나요?

무아: 인턴 중에는 머신러닝을 환경 분야에 적용하는 일을 했어요. 주어진 물질에 독성이 있는지 없는지 직접 실험하지 않고, 머신러닝으로 물질의 분자구조에서 독성을 예측하는 프로그램과 관련된 연구를 했어요. 직접 프로그래밍하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기존의 프로그램에 새로운 구조를 적용해 성능을 올릴 수 있을지 고민하기도 했고요. 아직은 머신러닝을 사용한 독성 예측 연구가 초기 단계라서 정확성이 높지는 않지만, 연구가 계속되어서 좋은 성과를 내면 직접 실험하지 않고도 독성을 예측하는 방법이 생기는 거예요.

 

회로: 그러면 많은 실험동물을 살릴 수 있겠네요! 아주 뜻깊은 연구네요. 무아 님은 곧 독일로 박사 과정 유학 가시는데요. 국내에서 공부를 이어갈 수도 있을 텐데 박사를 해외로 가야겠다고 생각하신 이유가 있나요?

무아: 아마 제가 한국에서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면, 높은 확률로 석사 과정 때와 같은 연구실에서 박사 공부를 했을 거예요. 저는 저희 연구실에 아주 만족해서, 좋은 교수님과 동료들과 함께 안정적인 환경에서 많은 지원을 받으면서 연구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부 학생들이 박사 졸업 후에 좋은 직장에 취직한다는 점도 장점이고요.

한국에서 KAIST 대학원생은 사회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아요. 저는 제가 놓인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렇게 안정적인 환경에서는 제가 그냥 현실에 안주할 것 같았어요. 물론 그런 환경에서도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저에게 좀 더 자극을 줄 환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해외 대학원을 고려했어요.

독일에 있는 대학원에 지원한 이유는, 독일의 대학원생 지원이 안정적이기 때문이었어요. 독일 대학원에서는 대부분 처음에 계약 기간과 월급을 포함하는 계약서를 쓰고 대학원 생활을 시작해요. 중간에 대학원에서 쫓겨나거나 월급이 변할 우려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점이 좋았고요.

또, 제가 페스코 채식을 하고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있으니 한국에서보다 독일에서 좀 더 자유롭겠다는 기대도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한국에서는 페스코 채식을 하면 사회 생활하기가 힘들고, KAIST는 워낙 작은 사회이다 보니 제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데 제약을 많이 느꼈거든요.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해외로 박사 진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페스코 채식: 육류는 먹지 않지만, 유제품과 동물의 알, 해산물은 먹는 유형의 채식

 

회로: 그렇군요. 그런데 해외로 박사를 진학하겠다는 생각이 쉬운 생각은 아니잖아요. 저만 해도 주변 친구들이 유학 가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해외 유학이라는 선택지를 꿈꿔보지도 않았거든요. 어릴 때부터, 또는 대학원을 진학하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해외 유학을 고려했던 건가요?

무아: 3년 전에 독일에 교환학생을 다녀왔는데, 그때 경험이 저에게 큰 충격을 줬어요. 그때 봤던 자료는 한국인과 독일인의 평균 노동 시간을 비교하는 자료였는데요. 비유하자면 한국인이 8월까지 일하는 시간과 독일인이 1년간 일하는 시간이 같다는 자료였어요(*).

제가 한국 연구실에서 박사로 졸업하면 높은 확률로 한국 기업에 취업할 텐데, 그러면 어떤 삶을 살지 눈앞에 그려졌죠. 독일에서 일하더라도 한국과는 다른 이유로 힘들겠지만, 그래도 독일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 생각을 처음 했을 때는 학사 졸업 직전이라 영어 성적이나 서류가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유학은 그냥 꿈이지’ 생각하고 자대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본격적으로 유학을 준비한 때는 석사 1년 차 끝날 때였어요. 익숙한 환경에서 1년 정도 대학원생으로 생활하다 보니, 현실에 안주하고 연구에 동기 부여도 잘 안 되던 상황이었어요. 또 이 즈음 페미니즘이나 채식과 관련해서 저의 사고방식이 많이 변해서,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물론 제 독일 교환학생 경험도 제가 유학을 선택하는 장벽을 낮췄던 건 분명해요. 확실히 대학교 생활 동안에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것이 졸업 후 자신의 미래를 상상의 폭을 많이 넓혀주는 것 같아요.

(*) 2014년 OECD의 ‘1인당 평균 실제 연간 근로시간’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 취업자들의 근로시간은 OECD 평균의 1.2배였고, 이는 근로시간이 가장 적은 독일의 1.6배에 이른다.

김윤구, 「韓 근로시간 OECD 2위…독일보다 연간 4개월 더 일한다(종합)」, 2015.11.02., 연합뉴스, 링크: https://www.yna.co.kr/view/AKR2015103104695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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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 반, 모두 떠나고 불이 꺼진 무아 님의 베를린 연구실. 한국의 다른 연구실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김무아 제공

 

회로: 그럼 박사 유학을 1~2년 정도 준비했다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식으로 준비했는지 궁금해요.

무아: 저는 미국과 유럽 대학으로 해외 박사를 같이 준비했어요. 대학마다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다르니까 서류 말고 제가 따로 준비했던 걸 말해볼게요. 해외에 박사를 지원할 때에는 조교 활동도 이력서에 쓸 수 있어서 전보다 조교 활동에 활발히 참여했어요. 대학원생 대상으로 아헨 공대에서 서머스쿨을 열곤 하는데, 그 활동에 참여하는 등 해외 대외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고요.

아헨 공대에서 열렸던 서머스쿨은 IDEA League라는 대학 연합에서 주최하는 연례행사고, 그해 주제는 future urban mobility(미래 도시를 위한 교통)였어요. 현재 산업체와 학계에서 보는 미래 도시 교통수단의 발전 방향과 풀어야 할 주요 과제 등을 주제로 한 강의를 듣고, 기업과 연구소를 직접 방문하여 현재 기술 수준을 체험했어요. 서머스쿨 마지막에는 일주일간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주요 과제 해결을 위한 솔루션을 제안하는 학제 간의 조별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제가 만약에 국내 대학원에 진학한다면, 출신 대학의 ‘수준’이 사실 많이 반영돼요. 또 저는 자대 대학원에 진학했으니까 자대 진학에서 오는 이점도 있었을 거고요. 그런데 해외 대학원에 진학하려면 이런 이점이 많이 줄어요.

그래서 객관적인 성과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해서, 대학원 진학 시기에 맞춰서 학회에 제출할 수 있도록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어요. 결과적으로는 미국 대학원 지원 시기에 맞추는 데는 실패했지만, (웃음) 나중에 유럽에 있는 대학원에 지원할 때에는 그 결과를 갖고 지원할 수 있었어요. 저널에 낸 논문은 아니었고 학회에 낸 논문이긴 했지만, 그래도 제 능력과 관심사를 보여줄 수 있는 객관적인 성과를 갖고 있다는 게 합격에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페스코 베지테리언 페미니스트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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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무아 님과의 만남. 사진: 페미회로 제공.

 

회로: 무아 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해외 박사 지원에 채식과 페미니즘도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어떤 계기로 채식과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페미니즘에 관해 먼저 이야기 나눠볼까요?

무아: 저한테는 독일 교환학생이 정말 큰 계기였어요. 제가 교환학생을 다녀온 게 2016년이었거든요. 2016년은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리부트되었다고 할 정도로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던 해잖아요. 예전에도 여성으로서의 삶에 뭔가 불편함을 느끼곤 했지만, 그때는 그게 저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016년을 거치면서 제가 갖고 있던 불편한 감정에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죠. 독일에서 새로운 환경 아래 교환학생으로 지내다 보니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할 때와는 다른 점들을 느꼈어요. 한국 캠퍼스에서는 여학생들이 꾸며야 한다는 압박이 있고, ‘인기 많은 여학생’이 소비되는 방식이 있어요. 겉으로는 ‘인기 많은 여학생’을 높이 사주는 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깎아내리는 식으로요. 그런 게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공대니까, 남초 사회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환경에서는 그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가 느끼던 문제점이 어떤 환경에서는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저와 제 주변도 달라질 수도 있겠다고 느끼니까 페미니즘에 좀 더 관심을 가졌어요.

또 제가 다닌 KAIST는 워낙 좁은 사회여서 SNS에 글을 쓰는 것도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야 했어요. 페이스북에 글을 쓰고 밖에 나가면 제 페이스북 친구들을 마주쳐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독일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는 동안은 저를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은 사회에 있으니 SNS에 글을 쓰는 것도 훨씬 자유롭고 부담도 덜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독일에 있을 때는 페이스북에 자주 페미니즘 글을 공유하거나 제 생각을 쓰곤 했어요. 예를 들어 데이트 폭력 피해 경험을 공유했을 때 안전하지 않은 이별을 자신도 경험한 적이 있다고 여러 친구가 공감해주기도 했어요. 제가 올린 글에 친구들이 댓글을 달아주면 ‘역시 나의 경험이 단순히 나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많은 여자가 겪는 일이구나’라는 생각에 페미니즘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죠

 

회로: 그렇군요.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해서 많이 공감돼요. 저도 무아 님과 비슷하게 외부와 교류가 적은 공대에서 학부를 졸업했는데, 학교에서 생활하는 동안은 SNS 활동도 자유롭지 않았고 내 생각을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드러내기 쉽지 않았어요. 2016년은 많은 변화가 일어난 해이자 갈등이 첨예하게 치닫던 때이기도 해서, 공개적으로 내 의견을 드러내기엔 용기가 필요했던 때였어요.

 저도 페미니즘에 관해 자유롭게 드러내어 이야기하기까지 변곡점이 몇 번 있었어요. 휴학했거나 교환학생을 가서 제가 기존의 인간관계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좀 더 용기 내서 말할 수 있었어요. 한 번 그렇게 용기를 내고 나면 아무래도 좀 더 자신감을 갖고 말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내가 어느 공간에 놓여있느냐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무아: 맞아요. 그래서 저한테는 그 시간이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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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쌀국수를 먹는 무아와 베를린의 다양한 비건 친환경 제품들. 사진: 김무아 제공

회로: 채식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저도 주변에 채식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무아 님이 페스코 채식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무아: 저도 주변에 채식하는 친구 덕분에 채식에 관심을 갖고 시작했어요.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채식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좋게든 나쁘게든 채식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어요. 그 친구를 보고 ‘채식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어요. 그 친구와 시간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제 식생활도 돌아봤어요. 저도 예전에는 고기를 즐겨 먹었지만 고기를 생산하는 방식을 알고 나니까 동물을 착취하면서까지 고기를 먹고 싶지는 않았어요. ‘안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하고 처음 시도하고 나니까 저에게 잘 맞았고, 자연스럽게 페스코 채식을 시작했어요.

 

회로: 그렇군요. 비장하다기보다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시작하신 것 같아서 저도 페스코 채식을 시작해보고 싶네요. 페미니즘이나 채식과 관련해 활동하기도 했나요?

무아: 처음에 채식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제 생각이 정립되지 않아서 어떤 활동이나 운동에 참여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처음 세웠던 기준은 “내가 이 식재료를 직접 가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동물은 직접 도축할 수 없을 것 같았고, 생선은 손질하면서는 큰 거리낌을 못 느껴서 페스코 채식을 선택했죠.

 

회로: 그것도 운동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무아: 그렇죠?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저보다 먼저 페미니즘이나 채식에 관심을 가진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제 생각을 정리하거나, 추천받은 책을 읽기도 했어요. 이슈가 있으면 기사를 찾아보고 공유하면서 제 생각을 SNS에 쓰기도 했고요.

그런데 페미니즘에 관한 글을 쓰면 페미니즘과 관련 없는 글에 비해 반응이 현저하게 적고, 대다수 사람은 제 생각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가끔은 ‘이게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전혀 의미 없지는 않았던 게, 주변 친구들이 제 SNS에 반응을 직접 남기지는 않더라도 나중에 연락해 ‘네가 올리는 페미니즘 글을 관심 있게 봤다’고 말하곤 했어요. 어떤 친구들은 자신의 경험을 나눠주면서 저에게 힘을 주기도 했고요.

제가 이렇게 드러내놓고 SNS에 글을 쓰다 보니까 카이스트 여성주의 연구회 〈마고〉(*)에서 활동하는 친구가 〈마고〉를 소개해주기도 했어요. 주로 페미니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라면서요. 저도 석사 공부 중에 활동에 참여했어요. 대학원생이 시간을 내어 그런 모임에 참여하기 쉽지 않지만, 저 혼자 책이나 기사를 읽고 생각하는 것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채우고 싶어서 참여했어요. 페미니즘 이슈와 관련해서 마음 편히 이야기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책을 읽고 의견을 교류하는 활동 말고도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고, KAIST 인권 주간에 참여했어요. 또 〈마고〉 회원들과 2018년에 열렸던 혜화역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나 낙태죄 폐지 시위 〈낙태죄, 여기서 끝내자〉(***)에 참여하기도 했고요.

대부분 시위가 서울에서 열리다 보니 대전에서 학교에 다니면서 그런 시위에 가기 쉽지는 않았어요. 2019년에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왔을 때는 정말 뛸 듯이 기쁘고 자랑스러웠어요. 낙태죄 폐지 시위에 참여했지만 낙태죄가 폐지되리라고 확신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실제로 헌법불합치 판결이 났고, 저의 시위 참여와 목소리를 높여 외친 구호가 판결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자랑스러웠죠.

(*) 카이스트 여성주의 연구회 〈마고〉는 KAIST의 여성주의 단체이며, 페미회로와도 연대를 맺고 있다.

(**) 2018년 5월부터 12월까지 총 여섯 차례 열려 사회에 만연한 여성 대상 범죄를 규탄한 시위.

(***) ‘모두를 위한 낙태죄폐지 공동행동’이 주최해 2018년 7월 7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시위.

 

회로: 대전에서 공부하면서 서울의 시위에 참여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이건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이 느낄 것 같아요. 저도 지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니는데, 서울과 지역의 인프라 차이가 너무 심해서 깜짝 놀랐거든요. 제가 지역에서 살 때에는 내가 서울의 페미니즘 이슈를 따라가는데 허덕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지역에는 지역만의 이슈가 있는데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을 모으기엔 서울처럼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지 않아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요.

무아: 그렇죠. 2016년 이후에 페미니즘 이슈로 열린 대부분의 시위도 서울에서 열렸어요. 서울에서는 지하철이나 버스만 잠깐 타고 가면 들을 수 있는 페미니즘 강연이 많지만 지방에서는 강연도 자주 열리지 않고요. 페미니스트가 모일만한, 페미니즘 이슈를 수용할만한 공간도 많지 않고요.

그러나 대전에는 대전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 문화기획자 모임 〈보슈(BOSHU)〉(*)가 있어서 큰 힘이 돼요. 〈보슈〉는 정말 대전의 빛과 소금이라고 할 수 있죠. 저는 〈보슈〉에서 여는 페미니즘 강연에 참석하기도 하고, 주짓수 원데이 클래스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보슈〉와 〈마고〉가 함께 진행하는 여자 축구팀 <FC우먼스플레잉>에서 여성들과 함께 축구를 하기도 했고요. 저는 〈보슈〉에서 열었던 많은 행사나 기획에 정말 열심히 참여했기 때문에, 석사 졸업하고 서울 집에 돌아왔을 때는 오히려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 대전의 페미니스트 문화기획자 모임 〈보슈(BOSHU)〉는 동명의 페미니즘 잡지를 펴내고 있으며 그 외에도 여성 주짓수팀을 운영하고 페미니즘 글쓰기 강의, 여성 운동회, 여성 연기 원데이 클래스 등을 주최했다. 지난 2018년 12월에는 〈페미회로〉가 〈보슈〉와 〈마고〉가 함께 운영하는 여자 축구팀 〈FC우먼스플레잉〉의 인터뷰를 발행하기도 했다.

 

회로: 페미니즘과 관련해 요즘 관심을 가진 주제가 있으신가요?

무아: 최근에 영화 <82년생 김지영>과 <벌새>를 봤어요. <벌새>에서 주인공 가족은 엄마, 아빠, 세 남매로 이루어진 평범한 정상가족인데, 너무나 일반적이지만 사실은 폭력적인 언행이 많은 가족이에요. 정말 서로를 아껴서 가족인 것이 아니라, 가족이 되었으니까 관계에 문제가 생겨도 그냥 계속 같이 살아가는 모습이었어요. 제가 꾸리고 싶은 가족은 이런 모습은 아니어서 가부장제 아래 정상가족 문화의 대안은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몇 년 안에 저도 ‘결혼 적령기’에 들어갈 텐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꿈꾸는 미래가 꼭 결혼이어야 하는지, 저는 어떤 가족을 꾸릴지 고민이에요.

 

회로: 저도 두 영화를 모두 봤는데요. 말씀하신 것처럼 두 영화의 절묘함은 그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이 사실 최악의 가족이 아닌 평범한 가족이라는 데에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점에서는 부러워할 만한 가족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런 평범한가족이 사실 어떤 구성원에게는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 그렇게 가족 내 폭력이 개인을 잠식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그 두 영화가 잘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무아: 저는 그 두 영화를 보면서, 사회가 견고하게 맞춰 들어간 구형 퍼즐과 같다고 생각했어요. 한 조각 한 조각이 너무 견고하게 맞춰져 있어서 한 조각을 빼면 모든 것이 다 무너져버리는 퍼즐이요. 사회가 한 조각 한 조각이 다 맞물려 있다 보니 잘못된 점을 발견하더라도 그걸 지적하거나 거부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회로: 이제 인터뷰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네요. 무아 님의 인터뷰에서 공감되는 점이 많았어요. 페미니스트로서 마주하는 현실이 늘 행복하지만은 않지만 우리는 자신의 일상을 소중히 잘 꾸려나가고 싶잖아요. 페미니스트가 자신의 삶을 즐겁게 꾸려가려면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요. 무아 님은 주변 사람들과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시는 편인지 궁금해요.

무아: 제가 2017년부터 SNS에 페미니즘을 비롯해 제 생각을 자유롭게 밝히고 난 후에는 기존의 인간관계가 한 번 완전히 끊겼어요. 그러다가 마음 맞는 사람이 하나둘 모이면서 인간관계가 완전히 새로워졌는데, 지금은 제 주변에는 저와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이 남았어요. 구체적인 이슈에는 각자의 입장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원론적인 문제의식은 대체로 저와 같아요.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아는 사람 누구를 만나더라도 20~30분 정도만 지나면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웃음)

또, 저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을 처음으로 말하기 시작했을 때는 저와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적극적으로 설득하려고 하거나, 친구들을 만나서 페미니즘 이슈로 많이 이야기했어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니까 제가 설득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과거 저 자신을 되돌아보면, 지금은 제 생각이 달라지기도 했으니, 제 생각이 반드시 옳다고 여기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요. 변화를 만들려 현실에 부딪칠 때는 자신의 신념에 확신을 가져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내가 종종 틀릴 수 있다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지속 가능한 페미니즘 운동을 하려면, 꾸준히 이야기하는 페미니스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인터뷰 며칠 뒤, 예정대로 무아 님은 베를린으로 떠났다. 무아 님이 베를린에서 유학 생활한지 세 달 정도가 흐른 뒤, 무아 님이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인터뷰 끝인사를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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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님의 베를린 연구실 출근 첫날, 무아를 반기는 메시지. 사진: 김무아 제공

 

회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주세요.

무아: 제가 유학을 준비할 때, 선배나 교수님들이 ‘가장 중요한 건 연구이니까 유명한 학자가 있고 랭킹이 높은 학교에 가야 한다’고 많이 조언해주셨어요. 그런데 사실 저한테는 연구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니었어요. 연구 실적이 좋은 학교에 가면 저도 좋겠지만, 저에게는 연구 말고도 근로 문화나 지역 사회의 분위기 등도 중요했거든요. ‘연구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 중에는 제가 유학을 원하는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도 많았어요. 더 유명하고 랭킹이 높은 학교로 가지 않으면 그냥 KAIST에서 계속 박사를 하는 게 나을 거라고요. 그래서 계속 스스로를 의심했던 것 같아요. ‘내가 괜히 헛바람이 들어서 시간이랑 돈을 낭비하는 건 아닐까? 어딜 가나 다른 방식으로 문제가 있는데 도피하듯이 유학 가는 건 아닐까?’하고요.

그때 “그 사람들이 네 인생을 대신 살아줄 것 아니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결정해”라는 친구의 말이 참 용기가 되었어요. 저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한테 조언을 받을 때는 그 조언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느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사실 그분들도 각자의 가치관이 있는 개인이더라고요. 저와 가치관이 다르면 아무리 대단한 분의 조언이라도 와닿지 않고요. 그때 무엇보다 힘이 되었던 건 많은 사람이 가지는 않는 자기만의 길을 가는데도 잘 지내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었어요. 저도 베를린에서의 박사 생활이 전반적으로 만족스럽고 후회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 인터뷰도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그런 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이후 꽤 시간이 흘렀지만 무아와 나눈 이야기는 계속해서 힘이 되어 주었다. 그와의 인터뷰 이후 서툴게나마 페스코 채식을 시작했고, 다른 곳에서 나의 삶을 꿈꿔보는 일도 잦아졌다. 그가 주변에서 힘을 얻어 조금씩 변화했듯이, 나 또한 변화했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변화의 씨앗이 될 것이다. 누군가를 변화하게 만드는 선한 영향력이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인터뷰 내내 그에게 감돌았던 따뜻하고 희망찬 에너지가 그에게 가득하길 바라며, 베를린에서 첫발을 내디딘 그를 힘차게 응원을 보낸다.

 

024: 부산의 페미니스트들, 부산대 여성주의 실천 동아리 〈여명〉

Feminist in STEM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 024: 부산의 페미니스트들,  부산대 여성주의 실천 동아리<여명>

 

부산대 여성주의 실천 동아리 <여명> 부산에서 강남역 사건 추모하는 활동으로 결성된 여성주의 모임이다.

<여명>은 부산대에서 몰래카메라 탐지 사업을 벌이고, 2018년 부산대학교 성평등 네트워크 제3차 심포지엄 시대를 넘어, 페미니스트를 만나다에 참여해 현 시대에 부산대 여성주의 운동을 소개하기도 했다.

인터뷰어인 <페미회로>의 변서현, 한솔은 회로, 인터뷰이 부산대 여성주의 실천 동아리 <여명>의 보경, 재윤, 해인 님은 보경’, ‘재윤’, ‘해인으로 표기했다. 교정은 <페미회로>의 우연, 발행은 <페미회로>의 배현주, 우연 (이상 가나다순)이 맡았다.

(인터뷰이 재윤은 개인 사정으로 본 인터뷰에는 참여하지 못 하고, 재윤의 응답은 보경과 해인의 인터뷰에 서면으로 보충하는 식으로 받았음을 밝혀둔다.)

 

<여명>을 알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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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각각 보경과 해인. 사진: 페미회로

회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해인: <여명> 운영위원 해인입니다. 부산대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하고 있고, 교육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또 과에서 영화, 책 등을 다루는 비평 동아리의 장을 맡고 있어고 있어요. 전에는 동아리에서 주로 교육 관련 작품을 다뤘는데, 이제는 여성 영화나 여성주의와 퀴어리즘을 다루는 작품을 많이 접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제가 올해 장을 맡으면서 분위기가 좀 바뀌고 있어요.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이 장이 되는 바람에요. 매년 신입생을 대상으로 오픈 비평 행사를 하는데, 이 행사에서 퀴어 소설이나 여성주의 영화로 이야기 나누려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보경: 저는 19학번 휴학생 불어불문학과 소심한 <여명> 회장 전보경이에요. 순수 미술에 관심이 많습니다.

재윤: 2017년 3월 <여명>을 만들었고, 현재는 <여명> 활동을 쉬고있는 국어국문학과 14학번 김재윤입니다.

 

회로: 인터뷰에 응한 동기를 소개해주세요.

해인: 사실 인터뷰에 응한 아주 큰 동기는 없어요. 저는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요. 사실은 페미니즘 판에서 제가 활동하는 게 맞는지도 모를 만큼 엄청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분들을 많이 뵈었어요. 그분들은 정말 많은 것을 걸고 포기하고 활동하시는데, 저는 그렇지는 않거든요. 저는 사범대에서 교사를 목표로 공부하고 있고, 조그마한 동아리에서 운영위원을 맡고 있을 뿐이에요. 그렇지만 내가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무언가를 하고 있으니까 거기에 의미를 두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하자’고 생각해서 인터뷰에 응했어요.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보경: 저는 솔직히 말하면, <페미회로>에서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인터뷰 대상자가 3명 정도 되면 좋겠다고 하셔서 인터뷰에 응했어요. ‘내가 아니면 누가 해’라는 생각에서요. 해인님처럼 신념이 있는 건 아니에요.

재윤: 다른 페미니스트에게 힘이 될 수 있는 활동이라면 무엇이든 참여하고 말하고 싶어요. 제 경험을 나누고 싶고, 페미니스트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요. 그리고 우리가 말하기 시작하면 조금씩 바뀐다고, 대단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회로: <여명>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요?

보경: 재윤님과 예전 <여명> 회장님이 〈여명〉의 불법촬영감지 활동 후 한 인터뷰를 봤어요. 제가 부산대에 입학하기로 결정한 뒤에 본 인터뷰라, ‘나는 여기에 뼈를 묻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회로: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고등학교때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보경: 네. 제가 중고등학교 때 굉장히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자친구랑 사귄 적이 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가스라이팅(*)도 많이 당했어요. ‘나중에 만약 결혼한다면 여성이 집안일은 물론이고 일도 병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상대방에 맞춰 ‘개념녀’가 되기 위해 굉장히 애썼어요. 처음엔 그래도 남자가 집안일을 ‘도와’줘야하지 않냐는 약간만 빻은(잘못된) 생각을 했었는데, 그 상대와 연애하다보니 나중엔 여성이 집안일을 하는 게 어쩔 수 없고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죠.

그리고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때 저는 강남역 살인사건이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아니라 묻지마 살인에 가깝다고 생각했어요. 가부장적인 남자친구와 사회의 영향 때문에 그런 빻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던 제게, 친구들이 “너도 이제 페미 할 때 안됐냐?”라고 물으며 제게 페미니즘 영업했어요.

그때마저도 저는 ‘여성이 여성을 어떻게 혐오해’라는 둥 빻은 말 대잔치를 했었어요. 친구들이 많이 답답해 하면서도 정말 고맙게도 잘 알려줬어요. 도대체 페미니즘이 뭐길래 쟤들이 저러나 싶어서 책도 찾아보고 내가 생각한 게 맞는지 물어보곤 했어요. 그렇게 페미니즘에 눈뜨고, 고3 때는 페미니스트라고 광고하고 다녔어요. 제가 부산대에 입학하기로 결정하고는, 친구들이 부산대에 <여명>이 있다고 영상을 보내줬어요. 이미 주변에 메갈들이 많았죠(웃음).

해인: 저는 재수하던 스무 살 때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졌어요. 재수 공부하느라 오가는 지하철에서 할 일이 없으니까, 여성 미디어 ‘핀치’랑 오마이뉴스 칼럼을 많이 읽었어요. 그러면서 한두 달이 지나고, 강남역 사건이 터졌어요. 그때부터 마음 먹고 책을 조금씩 읽었어요.

입학하고 <여명> 포스터를 보고 가입해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가장 큰 계기는 제1회 부산퀴어문화축제에요. 거기서 <여명> 깃발이 흔들리는 걸 봤어요. 그래서 ‘내가 저 동아리에 들어가면 깃발을 흔드는 실천을 할 수 있겠구나.’고 느꼈어요. ‘다른 곳은 몰라도 여기에서는 내가 두발로 뛸 수 있는 곳이구나.’고 생각해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 정신적 학대의 일종으로,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해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 (출처: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828307.html)

 

회로: 회원들은 주로 포스터를 보고 <여명?에 가입하나요?

해인: 가입 경로는 엄청 다양해요. 포스터 보고 오는 사람, 지인 추천, 트위터 보고 오는 사람… 원래 활동했던 사람이 다시 오기도 하고. 저희 동아리가 학교에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어요. 악명이 높다고 할까. 저희 동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그래서 다들 원래부터 <여명>을 알고는 있다가, 고민하다 들어오는 것 같아요.

 

회로: 핀치가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들에게 유명한 매체는 아닌데, 주변에서 누군가 권했나요?

해인: 누가 권해준 건 아니에요. 제가 트위터에 일기를 썼는데, 페미니즘 말고도 사회이슈에 관심이 많았어요. 저와 관심이 비슷한 계정들을 팔로우하니 자연스럽게 핀치 글이 타임라인에 보이더라고요. 그때 좋은 정보, 칼럼, 매체를 많이 알았어요.

 

회로: 핀치에서 어떤 글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나요?

해인: 성매매 여성이 직접 쓴 글(*)이요. 본인이 ‘창녀’라고 불리는 길을 걷기 시작한 이유와 성매매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비판, 사회적으로 규정하는 ‘창녀’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 이야기했어요. 일단 그분이 자신이 성노동을 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했었는데, 아버지가 항상 ‘너 그렇게 살면 창녀 밖에 안된다.’고 이야기했대요.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서 ‘창녀’는 여성이 몰락할 수 있는 최저점으로 인식되잖아요. 그래서 글쓴이는 자기가 최저점으로 굴러 떨어지길 원해서, ‘창녀’ 일을 시작했대요. 그 여성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가출청소년이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아예 없던 사람이 아니라, 본인 신변을 보호할 수 있는 고학력 여성이었어요. 그런데도 ‘창녀’가 되기를 선택했어요. 그리고 자신이 성매매를 직업으로 삼아서 어떻게 살아 왔는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상세한 내용이 많았어요. 그 때 처음으로 성노동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요즘은 성노동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때는 그렇지 않아서 더 충격적이었어요.

(*) 이로아, 『창녀됨의 기록』(https://thepin.ch/think/m5fu/being-a-sex-worker-1)

 

회로: 페미니즘을 만나고 삶에서 어떤 부분이 바뀌었나요?

보경: 일단 미디어를 보는 시선이 많이 바뀌었죠. ‘저거 좀 빻지 않았나?’고 생각하고, 불편해지는 게 많아졌어요. 그리고 제 생각이나 말을 자꾸 스스로 검열해요. 그래서 활동하면서도 좀 겁나는 게 생겼어요. 내가 빻은 말을 했을 때 뭔가 사람들에게 지탄받지 않을까. 단어에 성별이 있는 불어로 쓰인 문학을 공부하니, (해인: 교수 등 지위를 나타내는 단어는 여성형이 아예 없어요.) 남성형 인칭대명사가 항상 먼저 나오는 게 눈에 거슬려요. ‘신사숙녀 여러분‘처럼요. 거의 모든 일상에서 ‘이거 페미니즘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고등학생 때 친구들과 모퉁이극장이라는 독립영화관에서 『멋진 인생』이라는 흑백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저는 그 영화를 보고 굉장히 행복하기만 했는데, 한 친구는 불편했다고 하더라고요. 주인공 부부 중 남편이 부인을 때렸는데 부인이 저항하지 못하고 맞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또 두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여자 주인공 대사에는 존댓말로, 남자 주인공 대사에는 반말로 자막이 달려있었고요. 너무 신기했죠. 이런 시각도 있구나 하면서요.

친구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서 제가 페미니즘을 영업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친구들이 싫어해요. 자기는 그것을 잘 모르는데 자꾸 제 이야기만 강요하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이제 그 친구들에게는 영업을 못해요. 그러면서 이제 메갈인 친구끼리 친해지고, 누가 메갈인 것 같으면 친해지고 싶어요.

 

회로: 해인 님은 어땠나요?

해인: 저는 제 전공에 많은 회의를 느꼈어요. 제 전공이 교육인데, 교사양성과정에서 성평등 교육이 필수가 아니에요. 젠더 교육이 들어가지 않은 교사 양성과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교사양성과정 자체가 엄청나게 잘못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교수들도 남교수가 대부분이고, 양성과정에서 배우는 내용도 이상해요.

‘남녀 화법’이라고 의사소통에서 남성과 여성이 아예 다르다고 배워요. 예를 들면, ‘여성은 톤이 높고 의성어와 의태어를 많이 사용하고 부드러운 어조이며 멀티태스킹을 더 잘 하는 반면, 남성은 사투리를 더 많이 강조하는 경향이 있으며 여성에 비해 공감을 잘 못한다’와 같은 내용을 배워요. 또 그 화법에는 남성과 여성밖에 없어요. 그걸 공부하고 시험 봐요. 그걸 심지어 여러 수업에서 배우고요.

문학에서의 남성적/여성적 어조도 아직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나와요. 제가 그저께 학원 알바로 이 내용도 수업해서 기억해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예로 들면, ‘김소월이 여성적 어조를 빌려서 표현했다. 왜냐하면 한이라는 정서는 여성으로서 더 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요. 저도 어쩔 수 없이 교육과정대로 가르치느라 좀 많이 힘드네요.

보경: 저도 경험했던 건데, ‘「나그네와 나룻배」에서 기다리는 쪽은 여성일까, 남성일까?‘ 라고 물어봐요. ‘요즘은 남자가 기다리는 경우가 많으니까 남성적 어조요!’라고 이야기하면 혼나요. ‘여성적 어조이지 않을까?’고 하는 분도 있고, ‘이건 여성적 어조야.’고 이야기하는 분도 계시고.

 

회로: 해인 님은 중고등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많을 것 같은데, 중고등학생들은 분위기가 어떤가요?

해인: 저는 알바도 학원에서나 과외로 해요. 학원에선, 제가 정식이 아닌 보조 강사니까 애들이 제 말을 잘 안 들어요. 중고등학생들이 엄청난 혐오 발언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쏟아내거든요. ‘게이 새끼야’, ‘정신병자야’ 등등. 그럼 제가 하지 말라고 화내는데, 안 들어요. 제가 교사도 아니니까.

보경: 이것도 남학생과 여학생이 엄청 많이 달라요. 여학생은 그런 말을 잘 쓰지도 않고, 제가 말하면 알아들어요. 그런데 남학생은, 제가 ‘여성적 어조 이런 거 요즘도 학교에서 가르쳐? 요즘에 이런 거 사회적으로 말 많잖아.’라고 말하면 ‘그래요?’라고 답해요. 페미니즘 리부트가 된지 몇 년이 되었는데, 걔네는 페미니즘이 뭔지도 몰라요.

학교 종류마다 차이가 커요. 여고 학생과 남고 학생이 달라요. 그래서 가끔 엄청난 좌절하곤 해요. 남녀공학에서는,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에 관심이 있어 여학생들 눈치를 봐서 그러는지, 남학생들도 자제하려는 것 같고요.

 

<여명>이 밝다

 

회로: <여명> 결성 과정을 소개해주세요.

재윤: 2016년 3월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저와 친구 두세 명이 함께 책모임을 만들고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그때 모두가 자신의 삶에서 여성혐오가 얼마나 위협적인지를 체감했죠. 추모 활동을 진행하던 중, 일베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말 그대로 ‘깽판’을 쳤어요. 그 때는 공식적인 활동을 할 엄두가 안 났죠. 겨우 두세 명뿐이었으니까. 그래서 같이 책모임을 하던 친구들과 동아리를 만들자고 결심했어요.

‘여명’이란 이름은 여성들의 혁명의 줄임말이고, 부산대 여성주의의 어두운 밤에 새벽을 열자는 뜻이기도 해요.

해인: 17년에는 중앙동아리에 등록했어요. 결성을 먼저 했는데 중앙동아리 등록이 거절당했어요. 16년 5월부터 두세 명이 활동을 하다가, 너무 심리적, 신체적 위협을 느껴서 함께할 사람을 모아서 동아리를 만들자고 생각했어요. 두세 명이 포스트잇을 붙일 공간을 만들고 운영하기에는 리스크가 엄청나잖아요. 그해에 활동을 하다가 공간 마련을 위해서 동아리 신청서를 냈는데 거절당했어요.

그 이유가 ‘남자 회원이 없어서, 성비가 불균등하다’였어요. 그래서 항의서를 냈어요. 젠더 개념 등을 설명하면서요. 동아리연합회 회칙에 성비 관련 규정이 없고, 미식축구 동아리도 성비가 안 맞고, 여자축구부도 있는데 왜 우리만 가지고 그러냐고 주장해 2017년에 허가가 났어요.

 

회로: (서현)가 활동하는 <포스텍 페미니즘>은 동아리연합회나 총학생회의 통제를 받는 것이 싫어서 등록을 안했어요. 그리고 대학원생은 등록 인원에 포함이 안되는데 저희는 대학원생이 더 많고 학부생이 적다 보니 일부러 등록하지 않았어요. 혹시 등록을 결심한 계기가 있을까요? 등록에 리스크가 있을 수 있고, 통제받아야 하기도 하고요. 물론 등록하지 않는 데에도 단점도 있죠.

재윤: 학교의 공식 동아리가 된다는 게 굉장히 상징적이라고 생각했어요. ‘부산대 페미니즘, 아직 안 죽었다! 너네들 이제 눈치 좀 봐라’는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고요. 사실 등록한 가장 큰 이유는 동아리방이에요. 페미니스트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 안전한 공간이 굉장히 절실했거든요.

해인: 제가 듣기로, 다음 이유는 중앙동아리라는 지위가 있어야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어요. 중앙동아리라는 지위가 엄청난 권력이에요. 저희가 중앙동아리 자격을 가져야, 신입회원 모집 포스터, 행사 플랜카드 등 오프라인 홍보를 할 수 있어요. 게시물에는 학교 도장이 필요한데, 중앙동아리연합회 통해 쉽게 도장을 받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여명>이 중앙동아리기 때문에 밖에서 태클이 덜 들어온다고 생각해요.

보경: 이번 학기에도 어떤 안티페미가 저희를 중앙동아리에서 끌어내리고 징계를 내리라고 엄청 요구했어요. 그 사람은 <여명>의 어떤 표현이 혐오표현이라면서 ‘<여명>을 중앙동아리에서 끌어내려라, 동아리연합회칙이 잘못되었다’고 말했고, 동아리연합회에서 입장문을 밝혀 앞에 나섰어요. 그래서 보호받는다고, 바리케이트가 하나 생겼다고 느꼈어요.

해인: ‘<여명>이 왜 중앙 동아리냐’는 항의가 매년 들어와요. ‘페미니즘을 다루는 동아리는 중앙동아리가 될 수 없다’, ‘중앙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학생이 많아요. 그러기에 더더욱 ‘우리는 중앙동아리로 존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희는 학부생 비율이 훨씬 높기도 하구요. 대학원생은 한두 명 정도?

 

회로: 회원들간에 관심사가 다르지는 않나요? 사회 이슈 등등.

보경: 동물권에 관심 있는 분도 계시고, 그래서 비건인 분도 계시고.

해인: 개인적인 관심사는 방학에 많이 보여주는 편이에요. 동아리가 회원 참여가 엄청나게 활발한 편이 아니라서, 학기 시작할 때 커리큘럼을 짠 대로 진행해요. 학내 이슈가 끊임없이 생겨, 대응하기도 바빠서요.

때에 맞는 활동을 기획하려고 노력해요. 퀴어문화축제가 있는 달에는 퀴어리즘을 끌어오고, 무슨무슨 가시화의 날이 있는 달에는 그 주제를 다루고요. 매 학기 첫 달에는 회원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행사를 많이 진행해요. 저희는 학기 별로 목표를 새로 세워서 다양하게 하려고 노력해요.

보경: 회원들의 의견을 많이 받으려고 회원 총회를 하기도 해요. 방학 때 두 번 회원들 모아서 저번 학기엔 어땠는지, 다음학기에는 무슨 책을 했으면 좋겠는지 정해요. 민주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회로: 총회에서는 어떤 의견이 많이 나오나요?

해인: 친목하자는 의견이 많이 나왔어요. 우리 <여명> 회원들이 좀더 가깝고 친밀해져서 모임이 좀더 즐거워지면 다 많이 참여하리란 생각에, 친목을 다지고 더 전문적인 일을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요.

보경: 그래서 마니또도 기획했어요.

해인: 이번에 엠티도 기획하고, 소품도 기획했는데, 힘드네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소풍을 기획하면 소풍을 안 오고! 엠티를 기획하면 엠티를 안와요…

보경: 오는 사람이 정해져 있어요. 이미 친한 사람들.

 

회로: 주로 어떤 강연과 책을 읽나요?

보경: 권김현영 선생님의 부산 ‘OO소사이어티’ 강연을 같이 듣고 왔어요.

해인: 부산에는 강연이 아주 많지는 않아요. 저희가 참여하기 가장 좋은 강연은, 부산대학교 안에서 진행되는 여성주의학회에요. 부산대 여성연구소장 교수님이 학기마다 심포지움도 열어주시고요.

보경: 책은 회원 총회에서 정해 읽어요. 회원 총회에서 읽고 싶은 책 목록이 나오면, 운영위원회에서 분량, 난이도, 편파성을 기준으로 판단해 일부만 후보로 내 투표로 정해요. 지금은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를 읽고 있어요. 전에는 한 학기 두 권도 읽었다는데, 지금은 한 권으로 줄였어요.

해인: 읽는 분량을 줄여서, 회원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좋아해요. 지금은 한 학기에 책 한 권, 영상 한 편 보고 있어요.

 

회로: 학기마다 목표를 새로 잡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번 학기에는 어떤 목표를 잡았나요?

해인: 작년 말, 우리가 너무 소진되고 있다고 느꼈어요. 우리가 계획대로 못 했다고 해서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저번 학기 목표를 완료를 못했는데, 너무 낙심하지 말고 이번 학기에 이어서 하기로 했어요. 그 내용이 여성건강권이에요. 생리공결제 도입나 생리대 자판기 설치가 예시겠네요. 그리고 좀 있으면 총학생회 선거를 해요. 선거운동본부에 질의서를 보내기로 했고, 서명운동을 해서 300명 정도 서명 받는 거를 목표로 설문지 작업 등을 진행하고 있어요.

 

회로: 그 동안은 부산대에서는 생리공결제나 생리대자판기 이슈는 제기되지 않았나요?

해인: 지금까지도 언급이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설문조사, 부스 등 여러 시도로 이슈를 만들려 해요. 우리 학교에 생리공결제 등 여성건강권 관련 제도 현황을 잘 아는지, 여성건강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필요하거나 필요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설문을 진행했어요. 부스에서 역시 많은 사람이 설문조사에 응하도록 독려코자 게임과 상품 등을 활용해서 이목을 끌었어요.

 

회로: 회원 간 이견이나 갈등이 있을 때는 어떻게 대처하나요?

해인: 저희들은 약간, 이견이 생겨도 말로 풀려 해요.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니, 이견이 있다는 걸 생각하고 들어오시는 것 같아요. 얼마전에도 제가 누구와 갈등을 빚었는데, 그냥 얘기할 수 있는데 까지만 얘기하고 다음 번에 다시 이야기하자, 사과를 주고 받고, 자기 생각이 바뀔 수 있다고 인정하는 당연한 과정을 거쳤어요. 사실은 지금 4년차까지 그렇게까지 이견이 있었던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애당초 활동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해요. 익숙한 사람끼리 활동하다 보면 의견 합일이 잘 되기 때문에요. 이게 장점인 것 같진 않아요. 치고 박고 싸우지는 않더라도 다양한 의견이 나와야 좋을 텐데.

<여명>이 운이 좋았죠. 다른 단체에서는 행사 중 일이 크게 있었던 적도 있고요. 회원 몇 분이 싸움을 하시다가 일방적으로 할 말만 하고 단톡방을 나가신 적도 있고. 저희 동아리는 아직은 그런 일은 없어서 드릴 말씀이 많지는 않네요. <여명>에서는, 새 회원이 가입할 때마다 모든 혐오를, 소수자혐오를 지양한다는 회칙을 설명하기 때문에 더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요.

 

부산과 부산대 속 <여명>

 

회로: 외부 단체를 찾아 가기도 하나요? 부산여성회라든가.

해인: 외부 단체에서 많이 지원받지는 않아요. 지금은 사라진 부산대 총여학생회 출신 졸업생분들과 연락하기는 해요. 그분들 중 몇 분은 부산대 여성주의 단체 활동 내력을 모으기도 하고요. 아니면 교수님들이 연대해주세요. 바깥 단체에서 많은 도움을 받지는 않는 것 같아요.

 

회로: 지자체나 진흥원에서 시민 단체에 재정 지원 사업을 벌이기도 하는데요, 알아보신 적이 있나요?

해인: 한두 번 해봤는데, 모두 떨어졌어요. 부산, 경남이라 그런가봐요. 물론 떨어진 이유를 말해주지는 않죠. 그런데, 저희 생각에는 여성 모임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청년 사업은 많이 봤는데, 여성 사업은 못 봤어요.

보경: 부산외국어대학교 여성주의 동아리 <여세>가 부산 지역 여성주의 모임 지도를 만들겠다고 인터뷰를 왔어요. 거기는 지원을 받아 지도를 만드는 것 같았어요.

해인: <여세>는 청년에 좀 더 초점을 맞췄다고 기억해요. 사업 지원을 받는 데에 주제로는 타협하고 싶지 않아요.

 

회로: 그럼 회원들에게 걷은 회비로만 행사를 진행하나요?

해인: 네, 회비 안에서만 행사를 하고 있어요. 교내 동아리라 교내에서 하면 돈이 크게 들지도 않고, 동아리방에서 행사를 진행할 수도 있고요. 동아리방이 있어서 매주 정기 집회(*)에도 장소 값이 안 나가죠.

보경: 동아리방에서 신입생 OT도 진행했어요. 무료로 대관할 수 있는 부산콘텐츠 코리아랩도 있고, 강의실을 이용하기도 하고요.

(*) 동아리 정기 모임. 부산대에서는 정기 집회라고 부른다.

 

회로: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는 장단점을 소개해주세요.

해인: 정말 말할 장점이 없네요. 부산의 특징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에요. 서울만 가도 의식이 많이 깨어 있죠. 반면 부산에서는, 이번 부산퀴어문화축제도 장소 문제로 취소되었고요. 그래서 항상 이 도시 전체가 여성과 퀴어를 온몸으로 거부한다고 느껴요. 원래는 이 도시에 별 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이번에 퀴어문화축제가 취소되는 상황을 보고, 이 도시가 내 존재를 거부한다고 크게 느꼈어요.

 

회로: 캠페미 네트워크를 소개해주세요. 캠페미 네트워크가 다른 단체와 교류할 때도 도움이 되나요? 캠페미 네트워크 활동을 보며 자극을 받기도 하나요?

해인: 캠페미 네트워크에는 부산 지역 대학 여성주의 모임이 소속된 단체에요. <여명>도 소속되어 있고요. 교류에 도움이 되죠. 작년에 캠페미 네트워크가 끝장집회라는 집회를 꾸준히 열었는데, 정당 등 여러 단체에서 같이 연대해주었죠.

재윤: 캠페미네트워크는 부산이라는 공간,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페미니스트가 연대해 더 큰 활동을 벌여보자, 싶어서 결성하게 된 연합체에요. 현재 동아대학교 <더치페미>, 신라대학교 <링크>, 부경대학교 <페미실린>, 부산외국어대학교 <여세>, 부산대학교 <여명> 및 단체가 아닌 개인으로 참여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아무래도 서로 고민들이 비슷하니까 서로 조언을 나누기도 하고, 다른 단체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을때면 자극도 많이 받죠. 서로의 행사에 서로가 꼭 가고 서로 만나는 경험들이 굉장히 힘이 많이 되고 응원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회로: 학교에서 사건이 벌어지면 주로 어디를 많이 찾아가세요?

해인: 일단은 교내 인권센터에 많이 찾아가요. 인권센터가 잘 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어요. 저희가 인권센터를 많이 규탄하기도 했죠. 그래도 인권센터에서 저희랑 연대를 많이 해주세요. 저희는 일개 동아리이기 때문에, 학교 차원에서 일을 하려면 인권센터를 거치지 않고서는 안되는 것 같아요.

 

회로: <여명>에서 연 행사들 소개해 주시겠어요?

해인: 제일 최근에 연 행사가 ‘페미니즘 무비 나잇’입니다. 「더페이버릿」이라는 영화를 상영했어요. 곧 ‘페미톡’이라는 페미니즘 잡담회를 열 거에요. <여명> 단독으로 주최하는 행사는 이렇게 두 개예요. 비정기적으로는, 그때그때 이슈에 맞춰서 정문에서 피켓시위를 하기도 하고 교내 집회를 하기도 하고 대자보를 쓰기도 해요.

보경: 이 두 개가 대중사업인데, 대중사업은 중앙동아리 자격에 따르는 의무에요.

해인: 제가 이 활동 때 <여명>에 있지는 않았지만 몰카 탐지 사업이 <여명>의 가장 큰 활동이라고 들었어요. 이 활동으로 <여명>의 ‘악명’이 생겼죠. 활동 뒤에 악플러와 관심, 그리고 응원도 많아졌어요. 그래도 화장실마다 비명감지기가 설치되었어요.

재윤: 부산대 화장실 몰카 탐지 사업하던 때를 다시 생각하니, 정말 그걸 어떻게 했나 싶네요. 2017년 8월 쯤에 여자화장실 내 불법촬영 문제가 이슈가 되었죠. 그러면서 동아리원들이 학교에도 있지 않을까 두렵다는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리고 학교 대나무숲에도 이 이야기가 나왔고요. 그래서 정말 있는지 없는지 우리가 한번 직접 탐지 활동을 해보자고 계획했어요. 탐지기를 금정경찰서에서 빌렸는데, 굉장히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금정경찰서에서는 ‘탐지기로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으니 빌려주지 않겠다’는 게 첫 대답이었거든요. 그래서 부산여성회 선배에게 연락해서 공문서를 경찰에 보내 압박했죠.

그러니까 ‘경찰을 대동하면 빌려주겠다’고 태도가 바뀌었어요. 탐지기를 빌려서 학내 화장실을 돌았는데, 그 경찰분이 ‘어차피 학교에는 안 나올거다. 학교엔 휴대폰으로 찍는 사람이 더 많다’면서 ‘나오지도 않을텐데 왜 고생을 하냐’고 계속 면박 줬어요. 그래서 저희는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고, 이 공포에 응답하는 사람이 누구 한 명은 있어야 한다. 그게 경찰의 임무다.’라고 맞받아치면서 서로 계속 으르렁거리면서 탐지활동을 했어요. 어떤 회원분은 ‘우리가 피해자일지도 모르는데, 잠재적 피해자가 이렇게 화장실을 탐지한다는 게 너무 화나고 슬프다’고도 하셨어요.

탐지를 마친 화장실에는 혹시 또 다른 구멍이 생기고 불안할 수 있으니 구멍을 막을 수 있도록 스티커를 배부하고, 탐지를 마친 화장실이라는 걸 알리는 종이를 붙였어요. 이 활동으로 많은 여학우들이 <여명>을 알고 감사도 표현하셨어요. 물론 어떤 분들은 ‘남자화장실은 왜 탐지 안하냐’셨지만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남자화장실을 들어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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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의 행사가 적힌 캘린더. 사진 촬영: 페미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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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이 지금까지 해온 행사의 포스터들. 사진 촬영: 페미회로

 

회로: 페미니즘 무비나잇이나 페미톡에 참여하는 비회원들과도 많이 대화하나요?

해인: 외부에서 많이 오지는 않아요. 포스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플러스 친구, 에브리타임 등 많은 방면으로 홍보했는데도요. 홍보에 어려움이 많아요. 우선 돈이 부족하고 포스터를 붙여도 잘 안 보고요. 온라인으로 그렇게 많이 홍보한 뒤에, 꼭대기에서 정문까지 다 붙였어요. 그런데 하루 지나니 포스터는 뜯기고, 에브리타임 게시물은 신고를 많이 받았는지 내려갔어요. 한편으로는 이런 모습 때문에 행사에 신청하기 꺼리는 것 같기도 해요.

수도권과 분위기가 달라요. 참여를 꺼리는 것과는 별개로 이 문제에 관심 없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여학우, 남학우 구분 없이요. 외부 인원이 적은 점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회로: 포스텍도 비슷한 상황이에요. 회원 모집 포스터가 뜯긴 적이 있고, 페미니즘이 드러나는 행사에서는 확실히 외부인이 적게 와요. 반면에 페미니즘을 드러내지 않은 채 기록을 위해 진행하는 여성 경험, 커리어, 연애를 주제로 한 강연과 세미나에는 많이 와요. 인터뷰 시작 전에, 대학에서 심각한 여성 문제로 여성들의 롤모델이 없다는 점을 꼽아주셨어요.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해인: 복학생들의 연대가 있겠죠. 부산대 국어교육과에는 교육청에서 일이 많이 들어와요. 교육청에서 들어오는 일거리는 편하고 안전할텐데, 여학생들은 교육청에서 일거리가 온다는 사실을 전혀 몰라요. 저는 과CC를 하고 있었어서 알게 되었어요. 조교가 복학생 중 한 명을 소위 대표로 정해서, 일이 들어올 때마다 대표에게 전달하고, 대표는 일에 참여할 다른 복학생들을 알아보는 식으로 참여자를 모아요. 복학생이 모두 안 되면 미필들에게 물어보고요.

조교가 정한다는 그 대표는 학생 전체 대표가 아니라 군필자들의 대표에요. 다른 한편으로는, 학과 사무실에서는 남학생들에게 ppt 만들기같은 무급 노동을 시켜요. 남학생들은 학과 사무실에 화내기보다는 여자애들을 원망하고 ‘너희는 과사 일도 안 하니까 우리가 교육청 일을 가져가는 건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어교육과에는 여자가 훨씬 많고 남학생은 소수였어요. 그래서 국어교육과남자모임이 있었어요. 매 학번 신고식을 치렀고 다음에 여학우들 얼평해서 1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우는 게 전통이었대요. 제 학번부터 사라졌대요.

보경: 동아리 전체 회의나, 분과 회의에 나가면 전부 남학생이에요.

 

회로: 정말 남성 커뮤니티가 만들어져있군요.

해인: 맞아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깨졌어요. 그래도 지금은 지금 조교가 여자고, 생각 있는 페미니스트 남학생이 대표가 되어 많이 달라졌어요. 이 남학생이 다른 남학생에게 대표 자리 넘길 때에도 카르텔이 끊기도록 잘 넘기길 기대해요.

 

회로: 아까 여성심포지움이 매학기 열린다고 하셨는데요, 여성심포지움에 여러 번 참여하셨나요?

해인: 네, <여명> 회원이 발제자로 참여하지 않아도 <여명>에서 매번 들으러가요.

재윤: 부산대 사회학과 김영 교수님의 제안으로 부산대학교 성평등 네트워크 심포지움에 참여해 발제했습니다. 당시 심포지엄 주제가 ‘페미니스트, 만나다’였는데 80년대부터 여학생운동을 하셨던 선배들과 현재 학내의 페미니스트가 만나는 자리였죠. 그래서 저는 <여명>의 활동에 대해서, 부산대학교와 부산의 페미니즘 활동들을 소개했어요.

 

회로: 교수님 도움을 어떻게 받나요?

해인: 행사 기획, 장소 대관에 도움을 주세요. 학생도 강의실을 빌릴 수는 있지만, 조건이 까다롭고 학과마다 대관 기준이 다 달라요. 그런데 교수님이 과사에 한 마디하면 간단히 빌릴 수 있죠. 사회대 여성교수님들이 모두 여성연구소 소속이라서 행사를 많이 기획해주세요. 영화 상영회를 2번 했는데, 그 행사도 앞장서서 기획해주셨고, 저희 행사에도 많이 참여해주세요. 작년 회장님, 재윤님은 교수님들과 가깝게 지내요.

보경: 학생이 직접 빌릴 때도, 뭔가 잘못되면 우리 탓이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빌려줘요.

재윤: 여성학에 관심이 있는 교수님들께 ‘<여명>에서 활동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더니 굉장히 저를 반겨주시더라구요. 교류라기보단 예쁨받았죠. 해인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강의실을 대여하거나, 행사를 기획할 때 원고를 봐주시기도 하세요.

 

회로: 교수나 전에 부산대에 활동하던 졸업생 등 선배 활동가들에게 언제 지지받는다고 느끼시나요?

해인: 항상 느껴요. 아까 말했듯이, 작년말부터 <여명> 회원들이 소진되지 않는 방향으로 바꾼 것도 그 분들의 ‘망해도 괜찮아’, ‘할 수 있는만큼만 해도 괜찮아’라는 말을 들은 뒤였어요.

재윤: 선배들이 저희를 처음 만났을 때 저희가 하는 활동들을 항상 다 지켜보고 계셨다고 하셨어요. 그 뒤로 항상 뭘 할 때마다 따스한 눈빛을 받는 느낌이 들고 허리가 저절로 쫙 펴지더라구요.

 

회로: 부산대에서 있었던 젠더 이슈 중 하나를 꼽아, 부산대 안팎의 여러 여성주의 단체가 어떻게 호응해주었는지 소개해주세요.

해인: 가장 큰 이슈는 미투를 꼽아야겠죠. 부산대 안에서는 교수님과 저희가, 포스트잇 액선, 피켓 시위, 자보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어요. 부산대의 인권센터, 다른 여성주의 단위와도 서로 연대했고요. 사건이 워낙 컸던지라 인터뷰 요청도 많이 왔어요.

 

회로: 사회학과 여성주의 모임 <보스>, 부산대 여성주의 대모임 <해쳐>와는 어떻게 교류하고 계시나요?

보경: 같이 어떤 활동을 할 수 있을까 많이 고민해요. ‘Not My PNU’라는 연합세미나도 같이 했어요.

해인: 세미나 주제가 통일되지는 않았고, 각 단체에서 여러 주제로 준비했어요. <여명>에서는 미투를 주제로 준비해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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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My PNU’ 행사 포스터. 이미지 제공: 여명

 

회로: 학교에서 페미니즘에 대표성을 부여받은 듯한 시선을 받기도 하나요? 그럴 때는 어떤 생각을 하나요? 주변에서 넌 페미니스트니까, 이것에 너의 의견을 말해봐라는 식의 말을 듣는 사람도 많이 봤어요.

해인: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그렇게 <여명>을 찾아요. ‘이런 사건이 있는데, <여명> 뭐 하냐’는 식으로요. 개인적으로는 본인들이 직접 행동하라고 대응하곤 했는데, 이젠 일일이 대응하지 않아요. 답하지 않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여명>이 뭔가 행동한 사건에도 <여명> 뭐하냐고 하기도 하고요.

 

회로: 포스텍과 카이스트에는 페미니즘 모임이 하나뿐이고 학교가 작아서, 낙인찍힐까 두려워하는 회원이 많아요.

해인: <여명>에도 그런 회원이 많아요. 아직 활동을 숨기는 분도 있고요. 저는 안 느끼더라도 회원들은 느낀다고 해요.

재윤: 사실,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내세우는 게 쉽지 않죠. 쉽지는 않겠지만,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드러냈을 때 어떻게 변하는지 눈으로 지켜보는 건 꽤나 흥미롭다고 생각해요. 어떤 분이 술자리에서 ‘게이샷’, ‘레즈샷’을 외치니까 그 옆에 계시는 분이 ‘지금 <여명> 회장님 계시는데 뭐하는 짓이냐!’며 면박을 주며 말리시더라구요. 진짜 웃겼어요. 저 한 명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술자리의 분위기가 변한다는 게.

해인: 저도 학과 대표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많이 조심해요. 저는 페미니스트 티를 팍팍 내거든요. 그것도 제가 할 수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해서요. 적어도 제 존재를 기억하죠. 저는 제 대표성을 활용하고자 해요.

 

회로: 대학교에서 인권이 의제로 떠오르지 않는 현상황을 어떻게 보시나요?

해인: 세상이 변해간다는 사실은 저희 세대 안에서는 잘 못 느껴요. 저희와는 다른 학생이 워낙 많으니까요. 제가 아까도 말했 듯, 저는 고등학생들 접할 기회가 많잖아요. 고등학교는 분위기가 달라요. 저 고3 때와 지금이 겨우 몇 년 차이인데,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고 느낄 수 있어요. 대학교에서는 여학우들끼리 있어도 실망할 일뿐이에요. 제 영역 안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많이 실망하고 제 활동에 많은 회의가 들어요. 그럴 때마다 저보다 어린 세대를 보면서, 세상이 확실히 달라지고 있다고 위안 삼아요. 어린 세대를 보며, 제가 교단에 서서 더 많은 것을 바꾸겠다고 다짐해요. 그래도 비율로는, 저희 과에는 저희 같은 사람이 학교 전체보다 많아요. 교육과기때문인지 여학생이 더 많고, 페미니즘 담론에 관심있는 여학우도 많고, 응원을 보내주는 여학우도 있어요. 16학번에서 19학번 학생들이 교단에 설 때 교사들이 많이 바뀌리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그때는 전체 대학생 중 30%는 페미니스트가 아닐까요?

 

회로: 인터뷰가 거의 막바지네요. 어떤 때 <여명>에서 활동하기 잘 했다고 생각이 드나요?

해인: 활동하는 모든 순간에요. 제가 지금은 쉬고 있지만, 운영위원으로 꾸준히 참여해왔어요. 그러면 행사에 많이 참여하게 돼요. 참여할 때마다, ‘내 목표대로, 계획한대로, 내가 할 수 있는만큼 하고 있구나,’ 하고 느끼죠. 사소한 활동이라도 참여할 때마다 가입하길 잘 했다고 느껴요.

제가 외모 강박이 심했어요. 아는 사람 만날 것 같으면 도망가고, 엘리베이터도 못 탔어요. 엘리베이터에 거울이 너무 많은데, 제가 제 얼굴을 못 쳐다봐서요. 그런데 <여명>에 가입하고, 외모 강박이 사라졌어요. 저는 탈코르셋 운동(*)이,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예시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여명> 회원들이 생얼로 잘 다니는 걸 보고, ‘나도 저렇게 해도 되겠다. 나도 저 사람들과 같은 무리잖아’라고 생각했죠. 지금은 많이 자유로워졌습니다.

보경: 고민을 나눌 공간이 생겼고,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생각 맞는 사람도 많이 만났고요.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가입했는데, 실제로 뼈를 묻게 생겼네요. 솔직히 활동이 힘들어요. 인력도 부족하고, 소수 운영위원이 대부분의 일을 처리해야해서요. 지금처럼 인터뷰같은 행사가 생겨 받아 회원들에게 알려도, 대부분 운영위원만 참여하고요.

(*) 탈코르셋 운동. 가부장제가 강요한 ‘여성적 취향’을 코르셋에 비유하고, 코르셋을 적극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운동.

 

회로: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주세요.

해인: 인터뷰 요청 감사합니다. 말을 많이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보경: 이 인터뷰를 보는 분들은, ‘쟤도 하니까 나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어요. 활동하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활동할 수 있어요.

재윤: 페미니스트들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어요. 용기 내지 않아도 괜찮아요. 용기낼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도 괜찮아요. 당신이 제일 소중해요.

 

여명인터뷰에서는, 보경 님, 재윤 님, 해인 님의 다양한 경험을 들을 수 있었다. 또 몰래카메라 탐지, 여성 건강권 등 여성 이슈를 발굴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돋보였다. 여성학자와 여학생회 선배 등 이전 세대와도 드물지만 꾸준히 교류하는 모습 보았다.

여명이 들려준 많은 이야기 중 가장 관심 갔던 이야기는, 여명이 동아리로 등록했다는 이야기였다. 인터뷰에도 직접 언급했지만, 이공계 중점 대학의 페미니스트 모임들은 회원들이 일상에 위협을 느껴 동아리 등록을 꺼리곤 한다. 하지만 여명이 들려준 동아리 등록 계기는 예상 외였다. 오히려 동아리연합회가 방파제가 되어 주기도 했으며, 대중 사업 의무도 동아리에 꾸준히 활동력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023: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원자력 및 양자공학 전공자 위선희

Feminist in STEM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 023: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위선희

 

 2019년 페미회로의 마지막 인터뷰이는 카이스트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에서 의료영상과 의학물리를 전공하고 있는 박사과정 위선희 님이다. 위선희 님은 카이스트에서 만난 언니들을 통해 페미니즘에 눈을 떴고, 현재는 여러 사회·정치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엔지니어로서 성불평등격차, 여성폭력 데이터 등을 뜯어 보며 페미니즘을 고민했던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인터뷰어인 <페미회로>의 우연, 희수는 회로, 인터뷰이 위선희 님은 선희로 표기했다. 교정은 <페미회로>의 멩이, 한솔, 발행은 <페미회로>의 배현주, 우연(이상 가나다순)이 맡았다.

 

회로: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선희: 안녕하세요, 저는 카이스트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에서 의료영상 및 의학물리를 전공하고 있는 박사과정 5년 차 위선희입니다. 일 년 전쯤 인터뷰 요청을 받았을 때는 거절했는데, 지금은 여성으로서 세상에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 같아 응하게 됐습니다.

 

회로: 학부 때 원자력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꼭 전공하고 싶은 분야가 있었나요?

선희: 원래는 물리학과에 가고 싶었어요. 제가 중학생 때부터 물리를 좋아했거든요. 모교인 강원과학고에서도 유일한 실험 물리 동아리에서 활동했고요. 실험 물리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과학전람회(*)에 출품할 장비 만드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카이스트에 입학해서 고급물리 과목을 듣다가 ‘이 길은 내 길이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물리를 잘하는 사람들만의 언어가 있는데 그걸 못 따라갔어요. 그런데 물리를 계속하고는 싶어서 원자력 공학과에 가서 핵물리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 과학전람회는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전국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주최하는 과학 연구 대회다. 지역 대회와 전국 대회로 구분된다. 전국 대회에는 광역 지자체 단위의 지역 대회를 통과한 작품이 출품된다. 지역 대회는 광역 지자체 교육청이 주최한다.

 

위선희 1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위선희 님. 사진: 페미회로

 

회로: 그럼 처음부터 의료영상을 염두에 두고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에 진학하지는 않았네요.

선희: 네. 카이스트에서는 2학년에 진급할 때 학과를 정해요. 제가 2009년에 학과를 정할 때는 지금 지도교수님이 학교에 아직 부임하지 않으셨어요. 나중에 지도교수님 수업을 듣고 대학원 전공을 정했습니다. 그래도 의학물리 지식이 필요한 의료영상 소프트웨어를 연구하기에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 하고 싶었던 연구와 아주 멀지는 않아요.

의료영상 자체가 카이스트 원자력 공학과에서 주된 분야는 아니에요. 보통 원자력 공학과 연구실들에서는 주로 방사선, 핵분열, 핵융합을 연구해요. 의료영상을 데이터로 다루는 연구실은 저희뿐이에요. 의료영상을 찍는 하드웨어를 만드는 랩은 따로 있고요. 그래도 카이스트 전체에서는 의료영상을 연구하는 연구실이 꽤 많아요. 바이오 및 뇌공학과, 전산과, 전자과, 수학과에도 있어요. 그 연구실들이 의료영상연구회를 만들어서 함께 연구하기도 하고요.

 

회로: 카이스트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는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요?

선희: 학부는 작아요. 학부생 수는 한 학년에 많으면 25명이에요. 요즘에는 원자력 쪽이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아서 5명도 안 되는 학번도 있고요. 제 동기는 8명이었어요.

저희 과는 대학원생 그룹이 커요. 교수님이 16분 계시거든요. 학부생 수는 매년 편차가 크지만, 대학원에는 다른 대학에서 많이 와서인지, 대학원생 수는 편차가 거의 없어요. 저희 연구실은 매년 석사 신입생이 4명 정도 들어오고, 학과 전체로는 대학원에 매년 40명 정도 입학하는 것 같아요.

 

회로: 방사선 의료영상 소프트웨어 분야를 연구한다고 하셨는데요,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선희: 제가 최근에 마무리 지었던 과제는 C자 모양 팔 CT(Mobile C Arm CT)를 저선량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알고리즘을 적용해보는 것이었어요. CT는 아마 많이 들어보았을 텐데요, 컴퓨터 단층 촬영(Computerized Tomography)의 약자에요. 병원에서 동글동글 원형으로 도는 장비에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는 것 보신 적 있죠? 그건 기계 자체가 움직이지 않는 진단용 CT에요. 저는 동그란 모양이 아닌 C자 모양의 팔이 달린 기계에 들어갈 소프트웨어를 코딩하는 연구를 하고 있어요. 이런 CT는 보통 진단용이 아닌 중재시술에 쓰여요.

 

회로: 진단용 CT는 본 적 있는데 중재시술에 쓰이는 C자 모양 팔 CT는 처음 들어봐요.

선희: 개복하지 않는 수술에서는, 수술 중에 수술 도구가 환자의 몸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야 할 때가 있어요. 평소에는 수술 도구 위치를 알기 위해 평면(2D)으로 찍는데, 입체로 파악해야 하면 그 C자 팔을 360도로 돌리면 돼요. 핏줄이 많은 간, 신장 등 장기를 시술할 때 도움이 되죠.

제가 한 건 옮길 수 있는 CT를 만들었던 거에요. 기존의 C자 모양 팔 CT는, 천장에 붙어 있어서 수술 방마다 하나씩 들어가기 때문에 비싸고, 일반수술장에서는 못 써요. 그런데 만약 옮길 수 있는 CT 장비가 있다면 일반수술실에서도 쓸 수 있겠죠. 이미 상용화된 옮길 수 있는 C형 팔 모양 CT 장비는 있는데, 저희는 국산화하는 동시에 기기의 성능을 높이는 과제를 맡아서 진행했었어요.

제 꿈은 심장마비를 완벽하게 진단할 수 있는 영상기기를 만드는 거예요. 지금은 정확하게 예측을 하려면 조영제라는 약물을 복용해야 해요. 아무리 좋은 기기를 써도요. 그런데 조영제의 부작용이 생각보다 심해요. 부작용 비율이 0.03~0.1%정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회로: 왜 꼭 심장인가요?

선희: 심장병 말고 다른 병들은 요즘 거의 다 진단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저는 심장병을 진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영제 없이도 찍을 수 있는 영상 기기를 만들고 싶어요. 지금은 조영제 없이는 모세혈관과 그 외 조직을 구분할 수 없어요. 조영제는 혈관 안을 하얗게 보이게 해, 의사가 혈관 안은 구분할 수 있지만 혈관벽은 여전히 옆의 조직과 구분하기 힘들어요. 그렇다 보니, 혈관벽 두께가 중요한 진단 기준인 질병을 진단하기에 조영제는 여전히 단점을 가졌어요. 부작용 확률이 낮지 않은 것도 큰 문제고요. 그래서 조영제를 쓰지 않고도 심장 질환을 진단할 수 있는 영상기기를 개발하고 심장 질환 진단에 도움 주는 진단 영상기기를 연구하고 싶어요.

 

회로: 아까 지도 교수님 수업을 듣다가 의료영상 분야에 발을 디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수업이 어떤 면에서 흥미로웠나요? , 수업이 아닌 연구를 시작했을 때 특별히 재미있거나 힘들었던 점이 있었나요?

선희: 카이스트에서 처음으로 재미를 느낀 수업이었어요. 학점도 처음으로 A를 받았고요. 다른 전공 수업은 그냥 버틸 만했지 재미있지는 않았어요. 당시 학문에 흥미가 전반적으로 떨어져 있었는데, 의료영상 수업을 듣고 동력을 얻었어요.

어려웠던 점은… 의료영상 소프트웨어를 연구하려면 코딩을 무척 잘해야 해요. 차라리 학부 때 전산을 전공하고 이쪽으로 진학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너무 코딩이 안 될 때 저는 가끔 컴퓨터와 대화해요. ‘왜 내 말을 안 듣니’하고요. (웃음) 또 다른 의미로 어려웠던 점을 하나 더 얘기해드리면, 의료영상직이 고생하는 만큼 잘 대우받지는 못해요. 방문 연구차 미국 존스홉킨스대학(Johns Hopkins University)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그곳은 워낙 의대가 세다 보니 생명과학 연구원만 실내에서 연구하고, 실험하지 않는, 저 같은 대학원생은 복도에서 연구하더라고요. 논문 쓰고, 데이터 정리하고, 코딩하는 건 다 복도에서 했죠. 제가 뒷전으로 밀린다고 느꼈어요.

의료영상 분야가 왜 재미있는지는 설명 못 하겠어요. 그냥 너무 재미있어요. 분야가 다양해서 건드려보고 싶은 주제도 많고요. 그리고 의료 쪽은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아요. 엔지니어는 풀어야 하는 숙제가 있어야 해요. 어떤 문제를 연구해보고 싶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 내가 궁금한 문제를 다른 사람들도 궁금해야 하고, 시기도 잘 맞아야 하죠. 그런데 의료영상은 수요도 있고 풀어야 하는 숙제도 많으니까 저에게 잘 맞는 것 같아요.

 

회로: 조금 시기를 바꾸어서, 선희님의 현재에서 과거로 가보겠습니다. 강원과학고 시절에 실험 물리 동아리에서 활동했다고 하셨는데, 어떤 활동을 주로 했나요? 과학고는 남성 대 여성 성비 차가 크다고 하던데, 동아리에 여성은 몇 명이었나요?

선희: 실험 물리 동아리는 제가 입학했을 때 처음 생겼어요. 그때 부원 3명 중 저만 여자였어요. 저와 함께 입학한 학생은 60명이고, 그중 여학생은 20명이었고요. 동기 중에 물리에 관심 있는 사람이 몇 없었는데, 실험 물리는 더더욱 없었어요. 주파수 같은 개념은 직접 눈 혹은 손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굳이 그걸 직접 해보고 싶었어요. 알루미늄이나 구리를 톱으로 자른 뒤 손으로 튕겨, 주파수 재본 기억이 나요. 같이 실험했던 부원들은 겁이 많아서 톱으로 하는 건 다 제가 했어요. 금속에 구멍 뚫어서 실로폰도 만들어보고요. 톱질을 워낙 많이 하다 보니 한쪽 팔만 두꺼워졌던 기억이 나네요. 성적도 포기하고 실험해 결국에는 전국 전람회에서 특상을 받았어요. 아마 그 상이 대학 진학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네요.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게 끝이 아니라는 걸 배웠어요. 실험 결과가 엉망이어도, 그래프는 그리고, 이론대로 식을 세워 실험 보고서를 써야죠. 그렇게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저희를 담당했던 선생님이 열정적이고 똑똑하셔서, 학생들도 소화할 수 있는 주제를 주셨어요. 실험에 들이는 노동은 길었지만 재미있었죠.

과학고에서 과학의 날에, 지역 초중고생에게 학교를 오픈하고 각종 과학실험 시연하는 행사를 했는데, 저희 부스가 인기가 많았어요. 와인 잔을 두고, 와인 잔의 고유 진동수에 맞는 음파를 들려주면 잔이 흐물흐물해지다가 깨져요. 와인 잔을 무작정 많이 깰 수는 없으니까, 한 시간에 한 번씩 “이제 와인 잔 깹니다!”하고 방송하면 방문한 학생들이 다른 데에서 다 모여요. 신기해하는 얼굴을 보는 게 좋았어요.

 

회로: (희수)도 고2 때 과학실험대회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우연히 저희가 딱 해보고 싶은 실험을 부산에 있는 대학에서 실험을 했던 걸 알게 됐어요. 그곳에 찾아가서 실험을 어떻게 했는지, 재료를 어디에서 샀는지 물어봤던 기억이 나네요. 혹시 동아리 관련해서 다른 에피소드는 없었나요?

선희: 그때 밤을 많이 샜어요. 전람회 준비한다고 하면 야간자습을 다 빼 줘요. 자습 시간을 모두 써도 시간이 부족해서 새벽 3시까지 실험하다가 들어가곤 했어요. 진짜 문제는 새벽 3시에 여자 기숙사를 잘 열어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여자 기숙사가 1층이고 남자 기숙사가 2~3층이었는데, 여자 기숙사는 밖에서 쇠문으로 잠가 놨어요. 기숙사 소등 시간 넘어서 밖으로 나갈까 봐 그랬던 것 같았는데, 사감 선생님이 1층은 절대 안 열어줘서 3층까지 올라갔다가 1층으로 내려갔던 기억이 나요.

 

언니들을 통해 페미니즘을 만나다

 

회로: 이제 본격적으로 페미니즘 관련 질문을 해볼게요. 어떤 계기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선희: 13년도인가 14년도에 여성주의라는 단어를 당시 룸메이트에게 처음 들었어요. 그때는 여성’주의’라고 하니까 너무 사상 느낌이 나고, 왜 남성을 배제하나 싶었어요. 룸메이트가 여성민우회에 가입했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니까 더 이상하기도 했고요. 그 친구가 ‘너에게만 이야기하는 거다’하니까 ‘왜 숨어서 해야 하는 걸 하는 거지?’하는 생각이 들고 반감이 생겼죠. 그래서 알던 언니들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는데 언니들에게 엄청 혼났어요.

 

회로: 왜요?

선희: 저도 여잔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때 저는 낙태에 반대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확실한 안티페미니스트였던 것 같아요. 요즘 말로는, 거의 이퀄리스트(*)에 가까운? 다른 친구가 육아휴직 1년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말했을 때도 왜 그런 식으로 보상해주냐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언니들이 보여준 여성폭력 데이터를 보고 이 세상에 눈을 떴어요. 그전까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가끔 뜨는 기삿거리라고만 생각했는데, 언니들이 보여주는 데이터를 보니까 제 생각보다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 언니들이 데이터 폭격을 시작하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깨달았어요.

 

(*) 이퀄리스트(equalist): ‘이퀄리즘(equalism)’을 지향하는 사람. ‘이퀄리즘’이나 ‘이퀄리스트’는 학술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페미니즘에 대한 딴죽의 일종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으며, ‘-ism(-주의)’이라는 단어를 붙일 만큼 학계나 사회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거나 사상적 깊이가 있는 개념은 아니다. ‘평등주의’ 정도로 번역될 수 있으며, 이퀄리즘을 표방하는 사람들은 ‘이퀄리즘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내용이니 이퀄리즘이 페미니즘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여성이 현실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지우고, 여성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의 실천적인 성격을 희석한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페미위키 – ‘이퀄리즘’ 항목 참고. https://femiwiki.com/w/이퀄리즘/)

 

회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선희: 여성이 데이트폭력이나 가정폭력으로 죽는다는 데서 큰 충격을 받았고, 그게 수치화된 데이터로 기록되는 것에 또 놀랐어요. 여성과 남성의 임금 차이에는 화가 났고요. 남녀가 같이 입사했으면 같은 돈을 받아야 하지 않나요? 저는 여성이 워낙 적은 이공계에 있으니까, 여성이 적은 분야에는 이런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초등학교 교사같이 여성이 많은 집단에서는 여자도 고위직으로 올라가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닌 거예요. 여자가 다수인 집단에서도 여자는 고위직으로 올라가지 못했어요. 돌이켜보니 살면서 본 교장, 교감 선생님 대다수가 다 남자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요리는 여자의 역할이라고들 말하지만 정작 요리를 직업으로 하는 셰프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은 또 남자고요.

성평등지수를 보면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에서 발표한 수치와 유엔(United Nations)이 발표한 수치가 차이가 커요(*). 유엔 수치에서는 한국의 점수가 아주 높은데 세계경제포럼에서는 순위가 낮아요. 저는 엔지니어니까 데이터를 중요시해서, 이 두 지수에서 왜 차이가 나는지 데이터를 뜯어봤어요. 보니까 유엔은 남성과 여성의 평균 수명, 교육 수준 등을 중요하게 보고 세계경제포럼에서는 임원의 여성 비율 등을 중요하게 보더라고요. 평균 수명이나 교육 수준 등에서는 평등이 이뤄졌는데, 노동시장에서는 성평등이 이루어지지는 않은 거죠.

마지막으로 보고 놀랐던 데이터는 여아선별 낙태 지수였어요. 저는 사실 ‘여아낙태’가 용어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87년부터 90년까지 엄청 자행됐더라고요. 세 번째 아이 성별을 비교하면 남자 대 여자가 거의 3:1이 될 정도로? 이건 제노사이드(genocide)라고 봐야 하지 않나, 싶더라고요. 제가 딱 그 시기에 태어났으니 우리 부모님 세대가 여아낙태를 선택한 거죠. 그렇게 생각하면 아직 사회가 변한 것 같지는 않아요. 회사에 들어가도 우리 부장님은 여전히 남성을 우대할 수도 있으니까요.

(*) 박기묵·김나연, 「[팩트체크] 한국 성평등, 118위 vs 10위… 진실은?」, 2018.10.09, 노컷뉴스, 링크: https://www.nocutnews.co.kr/news/5041598

 

통계자료

1990년 출생성비. 첫째, 둘째, 셋째, 넷째로 갈수록 성비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KOSIS

 

회로: 많은 페미니스트가 동료 여성에게 영향을 받아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 같아요. 요즘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가 있나요?

선희: 요즘에는 여성주의 관점에 입각한 법안을 만들거나 재해석해서 현행법을 개정하는 활동에 관심이 있어요.

저는 페미니즘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법을 제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첫 시작은 낙태죄 폐지였어요. 정말 낙태죄가 폐지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올해 초에 됐잖아요(*). 낙태죄가 아예 폐지된 것은 아니지만 법이 바뀌는 걸 눈앞에서 보니까 희망이 생겼어요. 낙태죄가 폐지됐으니, ‘양육비 강제집행제도’(**)를 개선하고 ‘생활동반자법’(***)을 제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두 법안은 반드시 통과되면 좋겠어요.

 

(*) 대한민국 형법은 제2편 각칙 제27장에서 낙태를 한 자, 낙태하게 한 자, 낙태 수술을 집행한 의사 등에 대한 ‘낙태의 죄’를 규정하고 있다. 모자보건법 제14조에서 우생학적, 윤리적, 범죄적, 보건의학적 사유에 따른 임신중절수술의 허용 한계를 정하고 있지만, 이 허용 사유의 범위가 매우 좁으며, 기본권의 하나인 생식의 자유에 해당하는 임신중절권,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위헌 논란이 일었다. 이에 2016년 검은 시위, 2016년-2017년 BWAVE(Black Wave) 시위, 2017년 낙태죄 폐지 청와대 국민 청원, 2017-2019년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등 낙태죄 폐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결국 2019년 4월 형법 제269조 제1항 등 위헌소원으로 헌법불합치 판정이 났다. (장수경, 「더 이상 낙태죄는 없다: 판을 뒤집어엎은 여성들의, ‘낙태죄 폐지’까지 여섯 장면」, 한겨레 21, 2019.04.21., 링크: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46944.html

(**) 양육비 강제집행제도는, 가사소송법 제 63조의 2에 따라, 양육비를 지급해야 할 채무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경우, 가정법원이 양육비채권자의 신청에 따라 채무자에 대해 정기적 급여를 지급하는 고용자에게 채무자의 급여에서 양육비를 공제해 채권자에게 직접 지급하도록 명할 수 있는 제도다. 그러나 현행 제도에서는, 양육비 지급 의무자가 무직이거나 자영업자, 또는 급여 근로자가 아닌 형태로 소득을 벌어들일 때는 이용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조하영, 「[조하영 변호사의 법률칼럼] 이혼 후 일방적인 양육비 미지급,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스타데일리뉴스, 2019.08.22., 링크: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1936)

(***) 결혼과는 다른 형태로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사람들을 법적으로 동반자로 인정해 권리를 보장하고 책임을 다할 수 있게 하는 제도 중 하나다. 한국에서는 법률혼 등 법적 가족이 아닌 가족을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아,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채 공동생활을 하는 이들이 주위의 부정적 시선에 시달리거나, 정부 혜택 및 서비스에서 차별을 겪는 문제가 있다. 유럽을 비롯한 국외에선 생활 공동체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제도가 존재하며, 프랑스가 1999년부터 시행한 공동생활약정(PACS, 팍스)가 대표적이다. (박현정, <지금 함께 사는 사람과 법적 가족이 될 순 없는 걸까요?>, 한겨례, 2018.11.21, 링크: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71195.html)

 

회로: 해당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선희: 언젠가 한국 남성의 콘돔 사용률이 겨우 10%를 조금 넘는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어요. (*) 상황이 이래서는 여성이 아무리 오래 교육받아도 여자가 독립적일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성생활에서 남녀가 동등한 관계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첫 단계가 낙태죄 폐지라고 생각해요. 생활동반자법은 제 주위에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들을 만나면서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어떤 분들은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도 가는데, 동성애를 싫어하는 문화권을 피하는 신혼여행 계획을 짜주는 에이전시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생활동반자법이 비혼을 선택한 여성에게도 필요한 제도라고 생각해요. 제가 수술받을 때 옆에 있는 사람이 보호자로 서명해줄 수 있다는 건 중요한 문제죠. 성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만 서로의 생명을 책임져 줄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사회가 좀 유연하게 변했으면 좋겠어요.

(*) 한국의 콘돔 사용률을 2015년 기준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11.5%다.

(이한호, 「“여성 요구 반영한 콘돔… ‘밝히면 헤프다’ 편견 깨야죠”」, 한국일보, 2019.1.22, 링크: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1211404016376?did=NA&dtype=&dtypecode=&prnewsid=)

 

회로: 저는 페미니스트가 자신의 삶을 즐겁게 꾸려가기 위해서는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선희님은 주변 사람들과 페미니즘 이야기를 자주 하나요? 페미니스트로서 느끼는 갈증을 어떻게 해소하나요?

선희: 요즘은 페미니스트로서 말을 못해서 느끼는 갈등은 거의 없어요. 사실 저는 대놓고 말하는 편이에요. 제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도 페미니즘 관련 사진 걸어 놓고. 그래서 주위 사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됐어요.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제 의견을 다 알고요.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된 거죠. 제 SNS 피드가 아주 깨끗합니다.

제가 FC우먼스플레잉(이하 우플)을 하면서 축구도 하고 주짓수도 하는데요.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페미니즘을 앞세우지는 않아요. 그래도 운동이라는 남성들의 전유물을 뺏는다고 느껴서 좋아요. 올해 우플에서 대전 남성 축구 동호회 팀과 게임을 했는데, 이제 제가 패스하고 골을 넣을 수 있으니까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이번에는 졌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이길 거에요. 축구나 주짓수에서 혼성 게임을 하면 여자가 남자에게 민폐가 되리란 편견이 있는데, 그 경기를 통해 편견을 깰 수 있어서 좋았어요. 운동을 하면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내 몸 상태가 어떤지 전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좋고요. 그리고 주짓수를 하면서 신기한 건, 세게 맞아도 제 몸은 제 생각보다 훨씬 잘 버틴다는 사실이었어요. 멍이 생각보다 쉽게 들지 않아요. 저는 요즘 그래서 심심하면 제 가슴이나 배를 때려요. 좀 단단하게 만들고 싶어서요. 그러다 보니 겁이 좀 없어졌어요. 자신감은 엄청나게 상승했죠. 이 좋은 걸 이제까지 남자들만 하고 있었다니!

 

위선희 3

당당한 선희님. 사진: 위선희 제공

 

회로: 아까 인간관계를 정리했다고 하셨는데요. 그때 경험을 좀 듣고 싶어요.

선희: 처음 페미니즘을 접하고 나서는 화가 많이 났어요. 그래서 주위 남성 친구들에게 계속 화를 냈어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할 때마다 화를 내면서 뭘 읽어보라고 줬어요. 그래서 지금 주위에 원래 알고 지내던 남자애들이 아무도 안 남았어요.

페미니즘을 알고 나서 생각해보니 예전에 남성 친구들과 했던 대화가 생각나는 거예요. 친했던 한 남성 친구는 다른 여성들 가슴 순위를 매겼다는 이야기를 저에게 한 적이 있었어요. 저는 그때는 잘 몰랐는데, 여성에게서 ‘가슴’만 따와서 그렇게 순위를 매기는 의미를 알고 나니까 너무 짜증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짜증 나서 막 욕을 했더니, 그 애가 하는 말이, “너도 그때 같이 웃어 놓고 왜 그러냐”는 거에요.

 

회로: 그런데 공대는 남성의 비율이 높잖아요. 그 환경에서는 인간관계를 어떻게 관리하나요?

선희: 제가 지금 남성과 함께 일해야 하는 공간은 연구실뿐이에요. 과학고 동문 모임은 안 나가면 그만이고요. 그래서 연구실에서는 최대한 페미니즘 이야기를 안 해요. 이미 프로필 사진에 페미니즘이 있어서 사람들이 알고 피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요. 지도교수님은 굉장히 좋은 분이고 여성 차별적인 발언을 거의 안 하세요. 그래서 학생들도 덩달아 안 하는 것 같아요. 연구실 내 여학생 비율이 다른 연구실에 비해 높기도 해요. 박사 후 연구원 포함 14명 중 5~6명이 여성이거든요.

제가 복이 좀 많은 것 같아요. 그 외에 제가 활동하는 정당(정의당), 시민단체(마고, 페미회로, ESC 등등) 모든 곳에서 페미니즘이 보편적 정서로 깔려있어요. 그래서 참 인간관계를 넓혀 나가기 쉬운 것 같아요. 또 제가 술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학연, 지연보다 흡연이라고 흡연자여서 인간관계를 흡연으로 관리하는 것 같네요.(웃음)

 

회로: 감사합니다. 혹시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선희: 마지막으로 꼭 이 해가 가기 전에 꼭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고 설리, 고 구하라 님을 짧은 기간 동안 보내면서 사회적인 문제로 페미사이드(*)를 집중해서 보고 있어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그 많은 시위와 폭로가 이어진 뒤 이 사회가 변하긴 한 걸까요? 저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혜화역 시위를 분노에 차 참석하면서 결의를 다지곤 합니다. 여전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제가 보고 있는 데이터가 전부 조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페미니즘 활동가로 만난 한 분이 제게 물으셨어요. “여성긴급전화 1366(**)에 한 달에 몇 통이 걸려올 것 같아요?” 저는 머리를 굴려봤습니다. 그리고 답했습니다. “하루에 한 5명 정도면 한 달이면 150명 정도가 되겠네요.” 돌아오는 답변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쓴웃음) 1500통이 걸려 와요. 이거 심각한 문제예요. 사람 목숨이 달린 문제예요. 이 사회는 바뀌어야만 합니다.” 저는 페미니스트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 명의 목숨이라도 지켜내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목소리를 내고 싸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터뷰에서 꼭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렇게 지면과 시간을 제게 할애해주셔서 감사해요. 페미회로!

 

*페미사이드는 여성(female)과 살해(cide)의 합성어로 여성혐오적 살해, 동기와 이유가 여성이라는 점만으로 살해당하는 것을 뜻한다.

**여성긴급전화 1366은 가정폭력, 데이트폭력에 심하게 노출되어 신변이 위험할 때 신고를 하는 그야말로 긴급연락망이다.

022: 새내기 디자이너의 첫 발자국, 보라

Feminist in STEM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 022: 새내기 디자이너의 첫 발자국, 보라

 

누군가 한 번 쯤은 나는 이 디자인이 더 예쁜 것 같아하며 고민 끝에 물건을 사 본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디자인이란 무엇이고, 디자이너는 어떤 일을 할까? 디자이너는 익숙한 듯 생소하지만 매력적인 직군으로 다가온다. 이번 페미회로 인터뷰에서는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는 디자이너 보라 님을 만나보았다. 공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서울의 한 스타트업 회사에서 디자인을 하며 느끼는 고민과 그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인터뷰어인 <페미회로>의 산들, 희수는 회로, 인터뷰이 보라 님은 보라로 표기했다. 교정은 <페미회로>의 우연, 한솔, 발행은 <페미회로>의 배현주, 우연(이상 가나다순)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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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열린 전시 <Plastic Fantastic>에서, 보라의 뒷모습. (사진: 보라 제공)

 

회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보라: 안녕하세요. 저는 2018년도에 공대에서 산업디자인 학부를 졸업하고, 지금은 서울의 스타트업에서 디자인을 하고 있는 보라입니다.

 

회로: 인터뷰를 처음 요청받았을 때 인터뷰에 응할까 고민하셨나요? 고민하셨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에 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보라: 인터뷰는 기록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부담스러웠어요. 저는 제가 아직 미완성이라고 생각하는데, 미완성인 저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웠거든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인터뷰하면서 저의 짧은 커리어를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고, 비슷한 커리어를 준비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인터뷰에 응했어요.

 

공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다

 

회로: 학부 때 산업디자인과에서 다양한 수업을 들으셨을 텐데, 학부 때 했던 것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과제가 무엇이었나요?

보라: 수업에서는 프로젝트의 주도권을 잃기가 쉬워서 그중에는 인상 깊은 과제가 많지는 않았어요. 수업에서는 교수님이 주신 주제에 맞춰서 고민하게 되거든요. 오히려 동아리 활동이나 랩실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들이 ‘난 이런 걸 해야지’라고 시작한 경우라 더 재미있었어요.

굳이 수업에서 재미있었던 과제를 꼽자면, 3학년 때 발달장애 학생들을 위한 제품 디자인을 꼽을래요. 결과물보다는 사용자로 상정된 발달장애 학생 관련 자료를 모으고, 실제로 발달장애인 학교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는 환경을 확인하고 학부모님들을 인터뷰했어요. 그 과정에서 사용자들에게 깊게 다가갈 수 있었다는 점이 제일 좋았어요. 학생일 때는 이런 경험할 기회가 적거든요.

 

회로: 그 프로젝트를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실 수 있나요?

보라: ‘제품 디자인’ 수업에서 진행한 프로젝트였는데요, 이 수업은 일상에서 불편한 점을 찾아내고 해결할 수 있는 제품을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어내는 수업이에요. 그 수업에서 가정하는 타겟유저(*)는 발달장애인이었어요.

그 수업을 수강한 학생들이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냈어요. 예를 들어, 발달장애 학생들은 생리대를 사용하는 데에 많이 서툴다고 해요. 언제 생리대를 갈아줘야 하는지, 갈고 나서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교육하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생리대 사용법을 안내해주는 컨셉을 제안하고 발전시킨 친구들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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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 학생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예방 교육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교구. 보라 제공. 페미회로 갈무리

 

제품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팀을 나눠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발달장애 학생을 담당하는 선생님과 장애 학생들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이야기를 나눈 후, 학교 근처 장애인성폭력상담센터의 센터장님을 만나 인터뷰를 했어요. 이 인터뷰를 통해 발달장애 학생들이 성폭력을 당하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 고려할 점이 많다는 것을 알았어요. 인터뷰 당시 센터장님께서 발달장애 학생들은 피해를 당했을 때, 기분이 나쁘고 이상하게 느껴도, 가해자가 웃으면서 ‘좋은’ 사람인 척 어물쩍 넘어가면 성폭력 피해를 성폭력 피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어떻게 제품을 디자인해야 발달장애 학생들이 성폭력 상황에서 잘 판단하도록 도울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디자이너들은 타겟유저가 겪는 어려움을 조사하는데, 학생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데스크 리서치(**)에 그쳐요. 하지만 이렇게 타겟유저가 명확하고 좁으면 직접 당사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는 정보도 많아서 리서치가 정말 도움이 많이 됐죠.

 

(*) target user. 제품이나 서비스를 사용하도록 예측되는 특별한 사용자 그룹. 디자이너는 이들의 성격과 특성을 고려하여 디자인한다.

(**) 현장에 직접 나가서 인터뷰나 조사를 할 시간이 부족하거나 그 전 단계에서 인터넷으로 하는 자료 조사.

 

회로: 그 프로젝트의 결과는 어떤 형태로 나왔나요?

보라: 부모가 발달장애 학생의 루트를 볼 수 있게 하는 스마트 밴드를 만들려 했어요. 예를 들어, 학생이 학교에 있다가 하교 후 학원으로 가고, 학원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루트를 GPS로 등록해두고, 정해진 루트를 벗어나거나 심장 박동이 급격하게 바뀌는 등 이상 징후를 판단할 수 있는 밴드를 구상했어요. 그런데 시장에는, 버튼을 누르면 엄마와 바로 통화할 수 있는 스마트 밴드 등 다양한 스마트 밴드가 이미 출시되어 있었어요. 그렇다면 우리의 제품을 그런 기존의 제품들에 비해 어떤 점이 좋나 생각해보았어요.

저희는 리서치 과정에서 학생들이 밴드에 애착이 강하다는 걸 발견했어요. 그래서, 학생이 부모님과 같은 팔찌를 나눠 끼고, ‘지금 바로 옆에는 아니지만 부모님과 함께 있다’는 감정을 제품에서 느낄 수 있게 하는 방향을 생각했죠. 그리고 성폭력이 발생한다면, 가해자가 팔찌를 뺄 수 있다는 문제가 있는데, 이것을 막기 위해 학생의 팔찌가 부모님의 팔찌에 맞닿아야만 빠지는 방법을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리서치를 통해 문제를 도출하는 데에 시간을 많이 써서, 완성도 있는 프로토타입(prototype, 시제품 또는 실제 제품과 가까운 실물 크기의 모형)을 만들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은 아쉬워요. 하지만 우리 제품이 기존의 스마트 밴드나 스마트 워치와 무엇이 다른지 명확하게 차별점을 제시할 수 있었어요. 사용자가 제품을 통해 보호자와 더욱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죠.

산업디자인을 배우며 깨달은 사실은, 어떤 제품이든 결함을 가졌기 마련이고 완벽한 제품을 만들 수는 없다는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이 제품이 다른 제품에 비해 갖는 강점을 타겟유저에게 잘 내세운다면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회로: 그런 제품 디자인 수업을 하면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게 마지막 과정인가요?

보라: 그렇죠, 대체로 프로토타입과 함께 프레젠테이션하는 게 마지막 과정이에요. 그때 인터뷰에 응해주셨던 분들과 학부모님들을 초청해서 그분들 앞에서 발표했었죠. 한편으로는 죄송하기도 했어요. 저희는 이 문제에 꾸준한 관심을 갖고 제품을 개발하지 않고, 일회성으로 컨셉을 잡고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끝나는 프로젝트였으니까요. 물론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었지만요.

 

회로: 보라 님은 공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셨는데요, 일반 대학교에서 디자인이나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커리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궁금합니다.

보라: 요즘은 다른 종합 대학교의 디자인과에서도 융합 인재를 중시해서 단순히 하나의 시각 디자인이나 제품 디자인을 배우기보다는 다양한 스킬을 배운다고 들었어요. 디자인과에서 아두이노(*)를 배운다던가 UX 디자인 프로세스(**)를 같이 배우는 것을 보기도 했어요. 제가 다닌 학교에서는 다른 학교들보다 일찍 디자인과 공학의 융합하기 시작해 이를 차별점으로 내세웠지만, 요즘에는 다른 학교와 크게 차이가 없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대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좋았던 점은 제가 다양한 이공계 분야를 알아갈 수 있고 공학 분야에 전문 지식을 가진 친구들을 사귈 수 있다는 것과 공대 출신인 걸 자기 PR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산업디자인에서는 설계와 같은 공학적 요소와 외관의 스타일링, 컨셉을 모두 고민해야 하는데요. 제가 배운 공학적 접근법이나 배경 지식이 제가 디자인하고 그것을 개발자나 엔지니어들과 공유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또, 제가 잘 모르는 회로를 만들거나 공학적 설계를 할 때 전문적인 친구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죠. 마지막으로 공대 출신이라는 점을 나의 브랜드로 활용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나는 공대를 나와서 IoT(***)에 관심이 많아서 이런저런 기계들을 써봤고, 요즘은 AI 스피커에서 어떤 기능에 관심이 많다’는 식으로 기술에 친화적인 디자이너임을 강조할 수 있죠. 물론 이런 전략들은 자기가 선택하기 나름이고, 자신에게 맞게 PR 전략을 짜는 게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 아두이노(arduino)는 다양한 센서들로부터 입력값을 받아들여 다양한 전자 장치로 출력하게 해주는 기판이다. 2005년 이탈리아의 인터랙션 디자인 전문학교의 교수가 하드웨어 비전공 학도들을 위해 기초적인 지식과 저렴한 가격으로 개발이 가능한 마이크로컨트롤러 보드를 개발하고자 하여 만들어졌다.

(**) UX는 User eXperience로 사용자 경험을 뜻한다. UX 디자인은 사용자가 제품이나 서비스 등과 상호작용하면서 받아들이는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디자인이다. UX 디자인 프로세스는 UX 디자인을 하는 전 과정을 뜻한다.

(***) Internet of Things의 줄임말로, 사물인터넷을 뜻한다. 사람의 도움 없이 인터넷에 연결된 사물끼리 알아서 정보를 주고받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블루투스나 근거리무선통신(NFC) 등이 사물들의 자율적인 소통을 돕는 기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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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가 관람한 4560갤러리의 전시. 미니멀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사진: 보라 제공.

 

회로: 보라 님은 스스로를 어떤 디자이너라고 생각하시나요?

보라: 대학을 졸업하고 저 자신을 어떤 디자이너로 명명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저 자신을 스스로 제품 디자인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는데요. 원래 ‘제품 디자이너’는 하드웨어를 디자인하는 사람을 뜻했고, ‘UX/UI(*) 디자이너’가 어플을 만드는 사람을 부르는 용어였어요. 그런데 요즘은 어플도 ‘디지털 프로덕트’라고 해서 제품으로 치더라고요.

어플을 만들 때도 인터뷰나 관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자가 겪는 문제들을 확인하고, 그 솔루션을 디자인으로 시각화하기 위해 노력하는데요. 이전에는 조사와 반영 과정을 구분해서 생각했다면, 요즘에는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새로 생긴 디자이너가 프로덕트 디자이너(product designer)예요. 또 디자인하는 제품이 디지털인지 아닌지로 구분하는데요, 요즘에는 워낙 우리나라에서 하드웨어 디자인하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어요. 그래서 요즘은 누가 프로덕트 디자이너라고 하면 ‘그러면 어떤 어플 만드세요?’라는 질문이 먼저 나와요. 그래서 이제는 저 자신을 어떤 디자이너라고 해야 좋을지 고민이에요.

저는 디자이너가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저는 제품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예요’라고 말하기보다는, 어떤 테마를 디자인한다고 소개하는 게 더 좋다는 생각을 해요. 예를 들어, ‘도시에서도 깨끗한 공기를 즐길 수 있는 제품 경험을 고민해요’, ‘사람들이 사고 싶은 옷을 더 빨리 찾을 방법을 디자인해요’ ‘세탁기와 빨래할 필요 없는 삶을 구상해요’처럼요. 내가 하는 일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느냐를 고민하기보다는 내가 집중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 UX 디자인은 사용자가 제품이나 서비스 등과 상호작용하면서 받아들이는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디자인이다. UI(User Interface) 디자인은 사용자와 프로그램의 경계를 디자인한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어플의 UI를 디자인할 때는 스마트폰 화면의 구조와 버튼을 디자인한다.

 

회로: 자기 주관이 부족하면 교수님께 쉽게 휘둘릴 수 있다는 보라 님 말에 저(산들)도 공감해요. 저도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제가 3학년 때까지는 특정 교수님만 수업하셨어요. 그래서 강의 이름보다는 담당 교수에 따라 수업의 성격이 달라졌는데, 다른 수업을 들어도 결국 교수가 같으면 같은 내용을 배워 힘들었어요. 3학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산업디자인 중에서 정말 제품 디자인만 했거든요. 근데 4학년이 되어서 새로 오신 교수님이 UX/UI 디자인을 알려주시는 거예요. 저는 제품이 재미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저는 UX/UI 디자인이 더 재미있었던 거죠. 지금은 UX 디자이너를 목표로 하고 있어요.

보라: 제 생각엔 ‘UX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과학적인 실험’이라는 말처럼 당연한 말이라서, 이제는 애매한 표현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디자인할 때 사용자를 고려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데, 이제서야 적절한 단어를 찾아 UX라는 단어로 부르는 것 같아요. UX 리서쳐와 UX 디자이너를 동일시하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스스로를 ‘UX 디자이너예요’라고 표현하되, 실질적인 아웃풋도 함께 표현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UX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어플을 만든다’던가, ‘UX 사용자 조사를 기반으로 새로운 공간을 디자인한다’고 말하면 어떨까 해요. 요즘은 UX라는 단어가 없어지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요리디자이너’, ‘음악디자이너’ 등 ‘디자이너’는 어디든 붙을 수 있는 단어이기에, 자신이 어떤 디자이너인지 잘 알고,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회로: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선택할 수 있는 진로로 무엇이 있나요? 졸업 후 진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고려했던 점, 힘들었던 점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보라: 대체로 졸업 시기에 인턴으로 일을 시작하는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에는 저희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대학원 진학도 고려했는데, 회사 일에 재미를 더 많이 느꼈어요. 학생으로서 수업이나 프로젝트에서 제품을 구상할 때는 대개 현실과 동떨어져 고안했는데, 일하면서는 제가 구상한 제품이 실제로 생산되어 팔린다는 게 뿌듯하고 재미있더라고요.

저는 디자인을 전공했다고 해서 반드시 디자이너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디자이너로 일하지 않는다고 자존심 상할 필요도 없고요. 디자인을 이해하면 다른 일에도 큰 도움이 되거든요. 디자인을 배우면 디테일을 보는 눈이 길러지기 때문에 영업, 마케터나 유튜버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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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Plastic Fantastic>에서. 사진: 보라 제공.

 

스타트업 디자이너의 일

 

회로: 보라 님은 지금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계신데, 스타트업을 첫 직장으로 정한 이유가 있나요?

보라: 졸업하고, 제품 디자인을 하고 싶은지 UX/UI 디자인을 하고 싶은지 고민이 많았어요. 다 재미있기도 했고요. 그래서 일단 넓게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지금 다니는 회사를 선택했어요. 제가 다니는 회사는 작은 스타트업이라, 제가 제품도 디자인하고, 어플도 디자인하고, 홍보 콘텐츠까지 맡고 있어요. 일한 지는 2년 정도가 되었어요. 제가 직접, 디자인에서 마케팅까지, 제품을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모든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

 

회로: 그럼 디자인부터 마케팅까지 모두 참여하고 있나요?

보라: 네,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참여하고 있어요. 회사에 다니면서 하는 고민과 학생 때 고민과는 정말 다르다는 것도 느끼고 있어요. 저희 회사는 스타트업이니까 회사가 잘 돼야 나도 잘 되잖아요. 그래서 회사가 어떻게 해야 잘 될까를 고민하다 보니 마케팅까지 관심 갖게 됐어요. 요즘에는 시장 트렌드도 공부하고 주식 공부도 아주 약간 하고 있어요.

 

회로: 학교에서 교수님의 의견에 따라 수정을 하다 보면 내 디자인을 하기는 힘들 수 있지만, 양질의 크리틱(*)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가 소규모이고 디자인 사수가 없어서 제품에 대한 크리틱을 받기가 힘들지는 않았나요?

보라: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회사의 디자인이 제품 출시 전에 유출될 수도 있기에, 회사 외부 인원에게 쉽게 크리틱을 부탁할 수는 없어요. 대신 저는 제 제품의 각 부분을 왜 이렇게 고안했는지 누구에게나 설명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꼭 필요하고 이유 있는 디자인만 넣다 보니 결국에는 미니멀한 디자인이 되더라고요.

여기서 스타일링이 더해지면 더 좋은 브랜딩이 될 거 같아요. 지금 디자인하고 있는 제품을 처음 디자인할 때부터 미니멀하게 가자고 잡았는데, 미니멀한 기본 틀로 디자인을 하고 다른 회사들과 협업해서 제품이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기기의 범용성을 추구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온전히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어요. 학교 다닐 때는 교수님의 의견 하나하나에 휘둘려요. 반면, 소규모 스타트업에서 혼자 디자인하다 보니, 판단해줄 사람이 없어지면서 스스로 더욱 치열하게 고민했어요. 이건 왜 이렇게 디자인했는지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팀원들과 함께 방향을 결정할 수 있거든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더욱 고민했고, 지금은 저 자신을 어느 정도 알아요. 저는, 불필요한 요소는 포함하지 않는 명확하고 미니멀한 디자인이 좋아요. 요즘에는 운영 업무도 맡으면서, 어플 관리 이슈도 많이 생각해요. 불필요한 요소가 많은 디자인은 관리하기가 힘들어요. 특히 어플이 그렇죠. 어플은 쓸데없는 동작이 늘면 관리해야 하는 요소가 배로 늘어나요.

 

(*) 디자인과에서는 과제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더 나은 디자인을 위하여 교수님과 동료 학생들에게서 평가받는 시간을 꼭 가진다. 이 시간을 크리틱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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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가 관람한 4560 갤러리의 전시. 사진: 보라 제공

 

회로: 맞아요, 사용자가 큰 정성을 들이지 않아도 오래도록 사용하기 좋은 제품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처음에 봤을 때 마냥 예뻐도 관리가 안 되고 지속이 안 되면 결국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보라: 그래서 요즘은 마냥 잘 꾸미기만 한 제품은 실속이 없다고 느껴요. 개발자들은 애니메이션이 많은 어플을 정말 싫어하더라고요. 개발자들이 귀찮아한다는 이유로 그 어플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개발자가 싫어한다는 건 결국 관리해야 할 요소가 많다는 뜻이에요. 관리자들의 부담이 적어야 일이 더 빨리 진행되고 더 많은 일을 기획할 수 있기 때문에 제품을 디자인하면서 개발자가 관리해야 할 요소가 많아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해요.

그래서 개발자와 협업하는 실무에서 많이 배워요. 물론 개발자와 타협하는 과정에서 만들 수 있는 것만 만들게 되는 상황은 디자이너로서 주의해야 하지만요. 아직 저도 왔다 갔다 해요. 관리가 힘드니까 ‘미니멀하게 가자’고 했다가, ‘아, 내가 디자이너로서 너무 도전의식을 버렸나?’하고 갈팡질팡 고민해요.

그래서 요즘은 기록이 중요하다고 느껴요. 종종 제가 이걸 왜 이렇게 디자인했는지 생각나지 않기도 해요. 특히 분명한 기준 없이 골랐을 때 그렇죠. 그 다자인으로 결정한 이유를 기록해 놓아야, 저도 편하고 결정된 디자인을 두고 개발자와 논의할 때 덜 힘들어요. 학부생 때는 포트폴리오를 위해 기록해야 하고, 회사에서는 어떤 순서로 어떤 프로세스로 디자인했는지 알기 위해 기록이 중요하다고 느끼죠.

 

회로: 개발자와 협업 중 생기는 관리 이슈를 말씀해주셨는데, 다른 직군의 사람과 함께 일하기 힘들지는 않나요?

보라: 아무래도 개발자들은, 저와는 다른 툴을 다루고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니 커뮤니케이션이 쉽지는 않죠. 특히 어플 관리 이슈에서는 그런 차이점이 많이 나타나요. 저는 디자이너로서 많은 기획을 제안하는데, 기획을 그대로 따르면 개발자 입장에서는 관리 이슈가 배로 늘어나요. 디자이너가 기획을 제안할 때는 이상적인 시나리오만 생각하지만, 개발자는 ‘if not’도 가정해야 하거든요. 예를 들어, 다른 전자기기 연결에 실패하면 어떤 화면이 뜰지, 그 상황에서 다른 화면으로 넘어갔다가 이 화면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화면에 무엇이 떠야 할지 모든 것을 다 생각해야 해요. 제가 아직 주니어 디자이너이니, 개발자 입장에서 생각하려면 경험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요.

 

회로: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것은 어떤가요? 스타트업은 왠지 자유로운 분위기이고 디자이너 개인에게 많은 결정권이 주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보라: 지금 일하는 회사가 제 첫 회사이기 때문에 일단 저희 회사에 한해서만 말해볼게요. 저희 회사는 결정 과정이 굉장히 열린 편이에요. 제 생각을 공유하기 자유로운 편이고, 생각을 말하는 것에서 저지받아본 적은 없어요.

아까도 말했는데, 제가 어떤 결정을 내렸든 결정 내린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 저와 반대되는 의견과도 함께 논의해볼 수 있어요. 이렇게 함께 합리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결정권을 누가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결정한 이유를 메모해두고 논의에 활용하는 게 중요해요.

저는 제가 보기에 여러 시안이 비슷하면, 대표님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판단을 요청하기도 해요. 저는 그걸 계속 봐 온 사람이기 때문에 다 똑같이 느껴질 수 있는데 처음 본 사람은 다를 수 있으니까요.

 

회로: 학부 때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셨는데 지금은 어플 디자인, UX/UI 디자인, VUX 디자인(*), 제품 디자인 등 넓게 다루고 계시잖아요. 학부 전공과는 조금씩 다 다른 분야인데 어려움은 없으신가요?

보라: 산업디자인이라는 분야 자체가 되게 포괄적인 것 같아요. 어떤 제품을 만든, 디자인 요소만 고려하지 않고, 사람들이 제품을 어떻게 쓰는지, 제조 과정에서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하는 것이 모두 산업디자인에 포함돼요. 저는 저희 회사의 상품을 디자인하면서 새로운 디자인을 고안하는 것만이 산업 디자이너의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에 저희 회사의 제품을 크라우드 펀딩으로 출시하는데, 펀딩 페이지에 실리는 콘텐츠도 제가 맡았어요. 제품 설명, 제품 사진, 이미지 배열, 캐치프레이즈 등을 모두 제가 구성했는데, 제가 제품의 컨셉과 형상에 관해서 해온 고민이 이 콘텐츠에 모두 담겼어요. 지금 제가 하는 일이 학부 때 배웠던 것과 딱 연결되지는 않지만, 필요할 때마다 배웠던 것을 최대한 사용하는 것 같긴 해요.

저희 제품을 테스트할 때 학부 때 배웠던 사고방식이 도움이 되었어요. 이건 공대 출신이기 때문인지 산업디자인을 전공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어떤 변인은 통제하고 어떤 변수를 비교할지 계획을 짜서 테스트하니, 디자인은 실험 설계와도 비슷해요. 경력을 시작할 때는 실험을 설계해본 경험이 있다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전혀 생각 못 했는데 말이죠. 또 테스트 과정에서 산업디자인에서 배웠던 프로토타이핑 능력도 도움이 됐어요. 테스트 단계에서 제품을 고정해주는 거치대가 필요했는데, 그때 제가 필요한 거치대를 3D 프린터로 만들었든요.

 

(*) Voice UX 디자인. 사용자가 클릭이나 터치가 아닌 음성으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할 때를 고려한 사용자 경험 디자인을 뜻한다. AI 스피커 등 음성인식 기반 서비스가 확대되며 자주 사용되는 용어다.

 

회로: 보라 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학교에서 배운 것과 회사에서 하는 일이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학생 입장에서 실무 경험을 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라: 실무에서는 제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과정을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제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제품을 어떻게 패키징하고 마케팅할지도 중요하죠. 학생 때는 문제 해결만 중요시하고 판매 전략은 고민하지 않지만, 시장에서는 디자인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들이 원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거든요.

특히 마케터라면 패키징과 마케팅을 고민을 해보는 게 중요한데, 학생들에게는 이 중요성을 깨달을 기회가 드물죠. 제 지인은 학부 시절에 크몽(Kmong)이라는 사이트를 활용해서 단순한 제품이라도 판매해보는 경험을 가졌어요. 판매 페이지에 나오는 문구와 이미지를 조금씩 바꾸면서 사람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반응을 보는 거예요. 그런 경험이 중요하다는 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아서 저도 좀 아쉽긴 했어요.

 

디자이너의 생각, 보라의 생각

 

회로: 디자이너들끼리 만나면 어떤 주제가 주로 이야기되는지 궁금해요. 아무래도 요즘 디자인과 관련해 사회 이슈, 특히 젠더 이슈가 화제가 된 경우가 많은데, 디자이너들끼리도 이런 이야기를 하나요?

보라: 제가 다니는 회사는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제가 디자인을 배울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최대한 세미나나 스터디를 많이 활용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세미나나 스터디에는 저처럼 사수 없이 스타트업에서 혼자 일하는 디자이너가 굉장히 많이 와요. 다들 스터디에서 다들 아는 것을 최대한 나누고 성장하려 노력해요. 디자인 분야엔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으니, 여성 디자이너들의 이슈들도 자주 나와요. 그때 젠더 이슈도 많이 나왔던 것 같아요.

물론 스타트업이라고 해서 다 성평등하지는 않죠. 스타트업에 대한 환상을 깬 사건이 바로 2017년 온오프믹스 경영진의 성범죄 사태(*)였어요.

그러나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굳어진 체계가 없고 자유로운 기업문화가 많으므로 상대적으로는 불평등 이슈가 덜하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아요. 참고로 세미나를 돌아다니면서 알게 된 곳으로는 디자인FM이라는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팟캐스트가 있구요. ‘스여일삶(스타트업 여성들의 일과 삶)’이라는 그룹도 알게 되어서 종종 글을 읽고 있어요.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헤이조이스’라는 여성창업가들을 위한 커뮤니티도 있습니다.

 

(*) 오원석, 「스타트업 ‘온오프믹스’ 대표·부대표, 강간·추행 혐의 피소」, 2017.08.26, 중앙일보, 링크: https://news.joins.com/article/21876732

 

회로: 디자인을 하다 보면 내 가치관과 시장의 요구가 부딪히는 순간이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AI 스피커 기본 음성 정할 때를 생각해볼게요. 시장에서 기본 목소리로 여성의 목소리를 선호하면(*), 과거에 비서 혹은 서비스직에 여성이 많이 종사했다는 관행을 고민 없이 반영한다는 고민에도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선뜻 새로운 선택을 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보라: 그건 정말 회사에서 결정권자가 그런 이슈에 관심이 있어야 가능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게임 시장에 굉장히 여성혐오적인 요소가 많고, 그 사실이 잘 알려있죠. 게임업계 안에서도 젠더 편향적인 요소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꼭 있어요. 그래도 현실이 잘 안 바뀌어요.

저는 이미 시장 트렌드가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요즘에는 브래지어 광고도, 예전처럼 가슴의 ‘볼륨’만을 강조하기보다는, 편하게 내 몸에 잘 맞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광고가 많죠. 저는 이런 트렌드가 소비자들이 자신의 의사를 소비로 표현한 덕분인 것 같아요. 특히 마케팅에서 제일 중점을 두는 대상인 2~30대 여성이 젠더 이슈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제 젠더 이슈에 무지해서는 제대로 마케팅을 할 수 없어요. 회사에서 젠더 이슈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더라도 소비자로서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앞으로는 시장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고영태, 「너는 아니? 중성목소리…AI가 여성목소리인 이유」, 2019.05.01, KBS, 링크: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191793

 

회로: 듣고 보니 요즘 소비자들의 피드백이 강하게 반영되어서 뒤늦게 광고나 마케팅 방향을 수정하는 기업들이 많은 것 같아요. 올해 아동 모델을 성적으로 대상화한 광고를 내보낸 배스킨라빈스가 소비자들의 항의를 받아 해당 광고를 내리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도 광고를 내보낸 방송사들을 제재한 것(*)처럼요.

보라: 그렇죠. 당장 화장품 광고만 봐도 한국과 다른 나라의 양상이 매우 달라요. 그나마 아이돌 문화 때문인지,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화장하는 남자’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샤넬이 남성 색조화장품의 첫 런칭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시도했다고 하더라고요.

 

(*) 김진수, 「배스킨라빈스 광고 내보낸 7개 채널 경고…“성적 환상 불러 일으켜”」, 2019.08.27, 여성신문, 링크: 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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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중인 보라님. 사진: 페미회로

 

회로: 벌써 인터뷰가 막바지인데요.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보라: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남는 것 같아요. 저는 용기가 부족해서 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는데, 학생일 때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많이 해보라고 추천하고 싶어요. 학생일 때만 해볼 수 있는 것도 많고, 학생이기 때문에 실패해도 용서가 되거든요.

저는 트렌드를 좇아서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시대의 속도를 따라잡는 게 쉽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 인공지능 스피커가 각광 받으면서, 요즘 음성인식과 VUX가 떠오르고 있는데, 이게 뜰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런데 제가 만약 한글의 형태소에 관심이 많아서 언어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면 지금 정말 필요한 사람이겠죠. 제가 아는 인사 담당자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그분은 인사 과정에서 사람을 판단할 때 어떤 분야에서 ‘덕후’가 된 적이 있는지를 본다고 하더라고요. 무언가에 꽂혀 그것을 깊게 파봤다면, 뭐든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요. 가치가 있는 분야라면 당장은 빛을 보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분야가 되는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에는,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는 디자이너가 되기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 모습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내가 어떤 회사에서 일할 수 있을까?’ 생각할 때도,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일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게 중요해요. 예전에 『마케터의 일』이라는 책을 읽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어떤 환경에서 일하고 싶은지’ 생각을 잘 정리할 수 있었어요. 비단 마케터뿐만 아니라 모든 직업인이 일하는 자세로 이해해도 되는 책이니까 많은 분이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회로: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인터뷰가 관련 분야에 관심이 있는 분들뿐만 아니라 많은 분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명확하고도 미니멀한 디자인을 추구한다는 디자이너 보라와의 인터뷰를 통해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엿볼 수 있었다. 마냥 예쁜 것이 아닌 사람들의 생활과 특성은 물론 사용자의 경험까지 디자인에 포함된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그리고 하고 싶은 걸 하기를 바란다는 그의 말처럼, 타인의 눈에서 벗어나 용기 있게 자신의 길을 걷는다면 그 끝이 즐겁지 않을까? 학부생이 할 수 있는 고민과 사회생활에서 느낀 것들을 아낌없이 공유해준 그에게 감사하며, 앞으로 보라의 앞에 펼쳐질 일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