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원자력 및 양자공학 전공자 위선희

Feminist in STEM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 023: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위선희

 

 2019년 페미회로의 마지막 인터뷰이는 카이스트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에서 의료영상과 의학물리를 전공하고 있는 박사과정 위선희 님이다. 위선희 님은 카이스트에서 만난 언니들을 통해 페미니즘에 눈을 떴고, 현재는 여러 사회·정치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엔지니어로서 성불평등격차, 여성폭력 데이터 등을 뜯어 보며 페미니즘을 고민했던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인터뷰어인 <페미회로>의 우연, 희수는 회로, 인터뷰이 위선희 님은 선희로 표기했다. 교정은 <페미회로>의 멩이, 한솔, 발행은 <페미회로>의 배현주, 우연(이상 가나다순)이 맡았다.

 

회로: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선희: 안녕하세요, 저는 카이스트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에서 의료영상 및 의학물리를 전공하고 있는 박사과정 5년 차 위선희입니다. 일 년 전쯤 인터뷰 요청을 받았을 때는 거절했는데, 지금은 여성으로서 세상에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 같아 응하게 됐습니다.

 

회로: 학부 때 원자력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꼭 전공하고 싶은 분야가 있었나요?

선희: 원래는 물리학과에 가고 싶었어요. 제가 중학생 때부터 물리를 좋아했거든요. 모교인 강원과학고에서도 유일한 실험 물리 동아리에서 활동했고요. 실험 물리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과학전람회(*)에 출품할 장비 만드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카이스트에 입학해서 고급물리 과목을 듣다가 ‘이 길은 내 길이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물리를 잘하는 사람들만의 언어가 있는데 그걸 못 따라갔어요. 그런데 물리를 계속하고는 싶어서 원자력 공학과에 가서 핵물리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 과학전람회는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전국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주최하는 과학 연구 대회다. 지역 대회와 전국 대회로 구분된다. 전국 대회에는 광역 지자체 단위의 지역 대회를 통과한 작품이 출품된다. 지역 대회는 광역 지자체 교육청이 주최한다.

 

위선희 1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위선희 님. 사진: 페미회로

 

회로: 그럼 처음부터 의료영상을 염두에 두고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에 진학하지는 않았네요.

선희: 네. 카이스트에서는 2학년에 진급할 때 학과를 정해요. 제가 2009년에 학과를 정할 때는 지금 지도교수님이 학교에 아직 부임하지 않으셨어요. 나중에 지도교수님 수업을 듣고 대학원 전공을 정했습니다. 그래도 의학물리 지식이 필요한 의료영상 소프트웨어를 연구하기에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 하고 싶었던 연구와 아주 멀지는 않아요.

의료영상 자체가 카이스트 원자력 공학과에서 주된 분야는 아니에요. 보통 원자력 공학과 연구실들에서는 주로 방사선, 핵분열, 핵융합을 연구해요. 의료영상을 데이터로 다루는 연구실은 저희뿐이에요. 의료영상을 찍는 하드웨어를 만드는 랩은 따로 있고요. 그래도 카이스트 전체에서는 의료영상을 연구하는 연구실이 꽤 많아요. 바이오 및 뇌공학과, 전산과, 전자과, 수학과에도 있어요. 그 연구실들이 의료영상연구회를 만들어서 함께 연구하기도 하고요.

 

회로: 카이스트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는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요?

선희: 학부는 작아요. 학부생 수는 한 학년에 많으면 25명이에요. 요즘에는 원자력 쪽이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아서 5명도 안 되는 학번도 있고요. 제 동기는 8명이었어요.

저희 과는 대학원생 그룹이 커요. 교수님이 16분 계시거든요. 학부생 수는 매년 편차가 크지만, 대학원에는 다른 대학에서 많이 와서인지, 대학원생 수는 편차가 거의 없어요. 저희 연구실은 매년 석사 신입생이 4명 정도 들어오고, 학과 전체로는 대학원에 매년 40명 정도 입학하는 것 같아요.

 

회로: 방사선 의료영상 소프트웨어 분야를 연구한다고 하셨는데요,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선희: 제가 최근에 마무리 지었던 과제는 C자 모양 팔 CT(Mobile C Arm CT)를 저선량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알고리즘을 적용해보는 것이었어요. CT는 아마 많이 들어보았을 텐데요, 컴퓨터 단층 촬영(Computerized Tomography)의 약자에요. 병원에서 동글동글 원형으로 도는 장비에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는 것 보신 적 있죠? 그건 기계 자체가 움직이지 않는 진단용 CT에요. 저는 동그란 모양이 아닌 C자 모양의 팔이 달린 기계에 들어갈 소프트웨어를 코딩하는 연구를 하고 있어요. 이런 CT는 보통 진단용이 아닌 중재시술에 쓰여요.

 

회로: 진단용 CT는 본 적 있는데 중재시술에 쓰이는 C자 모양 팔 CT는 처음 들어봐요.

선희: 개복하지 않는 수술에서는, 수술 중에 수술 도구가 환자의 몸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야 할 때가 있어요. 평소에는 수술 도구 위치를 알기 위해 평면(2D)으로 찍는데, 입체로 파악해야 하면 그 C자 팔을 360도로 돌리면 돼요. 핏줄이 많은 간, 신장 등 장기를 시술할 때 도움이 되죠.

제가 한 건 옮길 수 있는 CT를 만들었던 거에요. 기존의 C자 모양 팔 CT는, 천장에 붙어 있어서 수술 방마다 하나씩 들어가기 때문에 비싸고, 일반수술장에서는 못 써요. 그런데 만약 옮길 수 있는 CT 장비가 있다면 일반수술실에서도 쓸 수 있겠죠. 이미 상용화된 옮길 수 있는 C형 팔 모양 CT 장비는 있는데, 저희는 국산화하는 동시에 기기의 성능을 높이는 과제를 맡아서 진행했었어요.

제 꿈은 심장마비를 완벽하게 진단할 수 있는 영상기기를 만드는 거예요. 지금은 정확하게 예측을 하려면 조영제라는 약물을 복용해야 해요. 아무리 좋은 기기를 써도요. 그런데 조영제의 부작용이 생각보다 심해요. 부작용 비율이 0.03~0.1%정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회로: 왜 꼭 심장인가요?

선희: 심장병 말고 다른 병들은 요즘 거의 다 진단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저는 심장병을 진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영제 없이도 찍을 수 있는 영상 기기를 만들고 싶어요. 지금은 조영제 없이는 모세혈관과 그 외 조직을 구분할 수 없어요. 조영제는 혈관 안을 하얗게 보이게 해, 의사가 혈관 안은 구분할 수 있지만 혈관벽은 여전히 옆의 조직과 구분하기 힘들어요. 그렇다 보니, 혈관벽 두께가 중요한 진단 기준인 질병을 진단하기에 조영제는 여전히 단점을 가졌어요. 부작용 확률이 낮지 않은 것도 큰 문제고요. 그래서 조영제를 쓰지 않고도 심장 질환을 진단할 수 있는 영상기기를 개발하고 심장 질환 진단에 도움 주는 진단 영상기기를 연구하고 싶어요.

 

회로: 아까 지도 교수님 수업을 듣다가 의료영상 분야에 발을 디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수업이 어떤 면에서 흥미로웠나요? , 수업이 아닌 연구를 시작했을 때 특별히 재미있거나 힘들었던 점이 있었나요?

선희: 카이스트에서 처음으로 재미를 느낀 수업이었어요. 학점도 처음으로 A를 받았고요. 다른 전공 수업은 그냥 버틸 만했지 재미있지는 않았어요. 당시 학문에 흥미가 전반적으로 떨어져 있었는데, 의료영상 수업을 듣고 동력을 얻었어요.

어려웠던 점은… 의료영상 소프트웨어를 연구하려면 코딩을 무척 잘해야 해요. 차라리 학부 때 전산을 전공하고 이쪽으로 진학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너무 코딩이 안 될 때 저는 가끔 컴퓨터와 대화해요. ‘왜 내 말을 안 듣니’하고요. (웃음) 또 다른 의미로 어려웠던 점을 하나 더 얘기해드리면, 의료영상직이 고생하는 만큼 잘 대우받지는 못해요. 방문 연구차 미국 존스홉킨스대학(Johns Hopkins University)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그곳은 워낙 의대가 세다 보니 생명과학 연구원만 실내에서 연구하고, 실험하지 않는, 저 같은 대학원생은 복도에서 연구하더라고요. 논문 쓰고, 데이터 정리하고, 코딩하는 건 다 복도에서 했죠. 제가 뒷전으로 밀린다고 느꼈어요.

의료영상 분야가 왜 재미있는지는 설명 못 하겠어요. 그냥 너무 재미있어요. 분야가 다양해서 건드려보고 싶은 주제도 많고요. 그리고 의료 쪽은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아요. 엔지니어는 풀어야 하는 숙제가 있어야 해요. 어떤 문제를 연구해보고 싶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 내가 궁금한 문제를 다른 사람들도 궁금해야 하고, 시기도 잘 맞아야 하죠. 그런데 의료영상은 수요도 있고 풀어야 하는 숙제도 많으니까 저에게 잘 맞는 것 같아요.

 

회로: 조금 시기를 바꾸어서, 선희님의 현재에서 과거로 가보겠습니다. 강원과학고 시절에 실험 물리 동아리에서 활동했다고 하셨는데, 어떤 활동을 주로 했나요? 과학고는 남성 대 여성 성비 차가 크다고 하던데, 동아리에 여성은 몇 명이었나요?

선희: 실험 물리 동아리는 제가 입학했을 때 처음 생겼어요. 그때 부원 3명 중 저만 여자였어요. 저와 함께 입학한 학생은 60명이고, 그중 여학생은 20명이었고요. 동기 중에 물리에 관심 있는 사람이 몇 없었는데, 실험 물리는 더더욱 없었어요. 주파수 같은 개념은 직접 눈 혹은 손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굳이 그걸 직접 해보고 싶었어요. 알루미늄이나 구리를 톱으로 자른 뒤 손으로 튕겨, 주파수 재본 기억이 나요. 같이 실험했던 부원들은 겁이 많아서 톱으로 하는 건 다 제가 했어요. 금속에 구멍 뚫어서 실로폰도 만들어보고요. 톱질을 워낙 많이 하다 보니 한쪽 팔만 두꺼워졌던 기억이 나네요. 성적도 포기하고 실험해 결국에는 전국 전람회에서 특상을 받았어요. 아마 그 상이 대학 진학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네요.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게 끝이 아니라는 걸 배웠어요. 실험 결과가 엉망이어도, 그래프는 그리고, 이론대로 식을 세워 실험 보고서를 써야죠. 그렇게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저희를 담당했던 선생님이 열정적이고 똑똑하셔서, 학생들도 소화할 수 있는 주제를 주셨어요. 실험에 들이는 노동은 길었지만 재미있었죠.

과학고에서 과학의 날에, 지역 초중고생에게 학교를 오픈하고 각종 과학실험 시연하는 행사를 했는데, 저희 부스가 인기가 많았어요. 와인 잔을 두고, 와인 잔의 고유 진동수에 맞는 음파를 들려주면 잔이 흐물흐물해지다가 깨져요. 와인 잔을 무작정 많이 깰 수는 없으니까, 한 시간에 한 번씩 “이제 와인 잔 깹니다!”하고 방송하면 방문한 학생들이 다른 데에서 다 모여요. 신기해하는 얼굴을 보는 게 좋았어요.

 

회로: (희수)도 고2 때 과학실험대회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우연히 저희가 딱 해보고 싶은 실험을 부산에 있는 대학에서 실험을 했던 걸 알게 됐어요. 그곳에 찾아가서 실험을 어떻게 했는지, 재료를 어디에서 샀는지 물어봤던 기억이 나네요. 혹시 동아리 관련해서 다른 에피소드는 없었나요?

선희: 그때 밤을 많이 샜어요. 전람회 준비한다고 하면 야간자습을 다 빼 줘요. 자습 시간을 모두 써도 시간이 부족해서 새벽 3시까지 실험하다가 들어가곤 했어요. 진짜 문제는 새벽 3시에 여자 기숙사를 잘 열어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여자 기숙사가 1층이고 남자 기숙사가 2~3층이었는데, 여자 기숙사는 밖에서 쇠문으로 잠가 놨어요. 기숙사 소등 시간 넘어서 밖으로 나갈까 봐 그랬던 것 같았는데, 사감 선생님이 1층은 절대 안 열어줘서 3층까지 올라갔다가 1층으로 내려갔던 기억이 나요.

 

언니들을 통해 페미니즘을 만나다

 

회로: 이제 본격적으로 페미니즘 관련 질문을 해볼게요. 어떤 계기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선희: 13년도인가 14년도에 여성주의라는 단어를 당시 룸메이트에게 처음 들었어요. 그때는 여성’주의’라고 하니까 너무 사상 느낌이 나고, 왜 남성을 배제하나 싶었어요. 룸메이트가 여성민우회에 가입했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니까 더 이상하기도 했고요. 그 친구가 ‘너에게만 이야기하는 거다’하니까 ‘왜 숨어서 해야 하는 걸 하는 거지?’하는 생각이 들고 반감이 생겼죠. 그래서 알던 언니들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는데 언니들에게 엄청 혼났어요.

 

회로: 왜요?

선희: 저도 여잔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때 저는 낙태에 반대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확실한 안티페미니스트였던 것 같아요. 요즘 말로는, 거의 이퀄리스트(*)에 가까운? 다른 친구가 육아휴직 1년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말했을 때도 왜 그런 식으로 보상해주냐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언니들이 보여준 여성폭력 데이터를 보고 이 세상에 눈을 떴어요. 그전까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가끔 뜨는 기삿거리라고만 생각했는데, 언니들이 보여주는 데이터를 보니까 제 생각보다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 언니들이 데이터 폭격을 시작하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깨달았어요.

 

(*) 이퀄리스트(equalist): ‘이퀄리즘(equalism)’을 지향하는 사람. ‘이퀄리즘’이나 ‘이퀄리스트’는 학술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페미니즘에 대한 딴죽의 일종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으며, ‘-ism(-주의)’이라는 단어를 붙일 만큼 학계나 사회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거나 사상적 깊이가 있는 개념은 아니다. ‘평등주의’ 정도로 번역될 수 있으며, 이퀄리즘을 표방하는 사람들은 ‘이퀄리즘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내용이니 이퀄리즘이 페미니즘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여성이 현실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지우고, 여성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의 실천적인 성격을 희석한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페미위키 – ‘이퀄리즘’ 항목 참고. https://femiwiki.com/w/이퀄리즘/)

 

회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선희: 여성이 데이트폭력이나 가정폭력으로 죽는다는 데서 큰 충격을 받았고, 그게 수치화된 데이터로 기록되는 것에 또 놀랐어요. 여성과 남성의 임금 차이에는 화가 났고요. 남녀가 같이 입사했으면 같은 돈을 받아야 하지 않나요? 저는 여성이 워낙 적은 이공계에 있으니까, 여성이 적은 분야에는 이런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초등학교 교사같이 여성이 많은 집단에서는 여자도 고위직으로 올라가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닌 거예요. 여자가 다수인 집단에서도 여자는 고위직으로 올라가지 못했어요. 돌이켜보니 살면서 본 교장, 교감 선생님 대다수가 다 남자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요리는 여자의 역할이라고들 말하지만 정작 요리를 직업으로 하는 셰프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은 또 남자고요.

성평등지수를 보면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에서 발표한 수치와 유엔(United Nations)이 발표한 수치가 차이가 커요(*). 유엔 수치에서는 한국의 점수가 아주 높은데 세계경제포럼에서는 순위가 낮아요. 저는 엔지니어니까 데이터를 중요시해서, 이 두 지수에서 왜 차이가 나는지 데이터를 뜯어봤어요. 보니까 유엔은 남성과 여성의 평균 수명, 교육 수준 등을 중요하게 보고 세계경제포럼에서는 임원의 여성 비율 등을 중요하게 보더라고요. 평균 수명이나 교육 수준 등에서는 평등이 이뤄졌는데, 노동시장에서는 성평등이 이루어지지는 않은 거죠.

마지막으로 보고 놀랐던 데이터는 여아선별 낙태 지수였어요. 저는 사실 ‘여아낙태’가 용어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87년부터 90년까지 엄청 자행됐더라고요. 세 번째 아이 성별을 비교하면 남자 대 여자가 거의 3:1이 될 정도로? 이건 제노사이드(genocide)라고 봐야 하지 않나, 싶더라고요. 제가 딱 그 시기에 태어났으니 우리 부모님 세대가 여아낙태를 선택한 거죠. 그렇게 생각하면 아직 사회가 변한 것 같지는 않아요. 회사에 들어가도 우리 부장님은 여전히 남성을 우대할 수도 있으니까요.

(*) 박기묵·김나연, 「[팩트체크] 한국 성평등, 118위 vs 10위… 진실은?」, 2018.10.09, 노컷뉴스, 링크: https://www.nocutnews.co.kr/news/5041598

 

통계자료

1990년 출생성비. 첫째, 둘째, 셋째, 넷째로 갈수록 성비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KOSIS

 

회로: 많은 페미니스트가 동료 여성에게 영향을 받아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 같아요. 요즘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가 있나요?

선희: 요즘에는 여성주의 관점에 입각한 법안을 만들거나 재해석해서 현행법을 개정하는 활동에 관심이 있어요.

저는 페미니즘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법을 제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첫 시작은 낙태죄 폐지였어요. 정말 낙태죄가 폐지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올해 초에 됐잖아요(*). 낙태죄가 아예 폐지된 것은 아니지만 법이 바뀌는 걸 눈앞에서 보니까 희망이 생겼어요. 낙태죄가 폐지됐으니, ‘양육비 강제집행제도’(**)를 개선하고 ‘생활동반자법’(***)을 제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두 법안은 반드시 통과되면 좋겠어요.

 

(*) 대한민국 형법은 제2편 각칙 제27장에서 낙태를 한 자, 낙태하게 한 자, 낙태 수술을 집행한 의사 등에 대한 ‘낙태의 죄’를 규정하고 있다. 모자보건법 제14조에서 우생학적, 윤리적, 범죄적, 보건의학적 사유에 따른 임신중절수술의 허용 한계를 정하고 있지만, 이 허용 사유의 범위가 매우 좁으며, 기본권의 하나인 생식의 자유에 해당하는 임신중절권,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위헌 논란이 일었다. 이에 2016년 검은 시위, 2016년-2017년 BWAVE(Black Wave) 시위, 2017년 낙태죄 폐지 청와대 국민 청원, 2017-2019년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등 낙태죄 폐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결국 2019년 4월 형법 제269조 제1항 등 위헌소원으로 헌법불합치 판정이 났다. (장수경, 「더 이상 낙태죄는 없다: 판을 뒤집어엎은 여성들의, ‘낙태죄 폐지’까지 여섯 장면」, 한겨레 21, 2019.04.21., 링크: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46944.html

(**) 양육비 강제집행제도는, 가사소송법 제 63조의 2에 따라, 양육비를 지급해야 할 채무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경우, 가정법원이 양육비채권자의 신청에 따라 채무자에 대해 정기적 급여를 지급하는 고용자에게 채무자의 급여에서 양육비를 공제해 채권자에게 직접 지급하도록 명할 수 있는 제도다. 그러나 현행 제도에서는, 양육비 지급 의무자가 무직이거나 자영업자, 또는 급여 근로자가 아닌 형태로 소득을 벌어들일 때는 이용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조하영, 「[조하영 변호사의 법률칼럼] 이혼 후 일방적인 양육비 미지급,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스타데일리뉴스, 2019.08.22., 링크: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1936)

(***) 결혼과는 다른 형태로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사람들을 법적으로 동반자로 인정해 권리를 보장하고 책임을 다할 수 있게 하는 제도 중 하나다. 한국에서는 법률혼 등 법적 가족이 아닌 가족을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아,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채 공동생활을 하는 이들이 주위의 부정적 시선에 시달리거나, 정부 혜택 및 서비스에서 차별을 겪는 문제가 있다. 유럽을 비롯한 국외에선 생활 공동체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제도가 존재하며, 프랑스가 1999년부터 시행한 공동생활약정(PACS, 팍스)가 대표적이다. (박현정, <지금 함께 사는 사람과 법적 가족이 될 순 없는 걸까요?>, 한겨례, 2018.11.21, 링크: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71195.html)

 

회로: 해당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선희: 언젠가 한국 남성의 콘돔 사용률이 겨우 10%를 조금 넘는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어요. (*) 상황이 이래서는 여성이 아무리 오래 교육받아도 여자가 독립적일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성생활에서 남녀가 동등한 관계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첫 단계가 낙태죄 폐지라고 생각해요. 생활동반자법은 제 주위에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들을 만나면서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어떤 분들은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도 가는데, 동성애를 싫어하는 문화권을 피하는 신혼여행 계획을 짜주는 에이전시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생활동반자법이 비혼을 선택한 여성에게도 필요한 제도라고 생각해요. 제가 수술받을 때 옆에 있는 사람이 보호자로 서명해줄 수 있다는 건 중요한 문제죠. 성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만 서로의 생명을 책임져 줄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사회가 좀 유연하게 변했으면 좋겠어요.

(*) 한국의 콘돔 사용률을 2015년 기준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11.5%다.

(이한호, 「“여성 요구 반영한 콘돔… ‘밝히면 헤프다’ 편견 깨야죠”」, 한국일보, 2019.1.22, 링크: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1211404016376?did=NA&dtype=&dtypecode=&prnewsid=)

 

회로: 저는 페미니스트가 자신의 삶을 즐겁게 꾸려가기 위해서는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선희님은 주변 사람들과 페미니즘 이야기를 자주 하나요? 페미니스트로서 느끼는 갈증을 어떻게 해소하나요?

선희: 요즘은 페미니스트로서 말을 못해서 느끼는 갈등은 거의 없어요. 사실 저는 대놓고 말하는 편이에요. 제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도 페미니즘 관련 사진 걸어 놓고. 그래서 주위 사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됐어요.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제 의견을 다 알고요.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된 거죠. 제 SNS 피드가 아주 깨끗합니다.

제가 FC우먼스플레잉(이하 우플)을 하면서 축구도 하고 주짓수도 하는데요.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페미니즘을 앞세우지는 않아요. 그래도 운동이라는 남성들의 전유물을 뺏는다고 느껴서 좋아요. 올해 우플에서 대전 남성 축구 동호회 팀과 게임을 했는데, 이제 제가 패스하고 골을 넣을 수 있으니까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이번에는 졌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이길 거에요. 축구나 주짓수에서 혼성 게임을 하면 여자가 남자에게 민폐가 되리란 편견이 있는데, 그 경기를 통해 편견을 깰 수 있어서 좋았어요. 운동을 하면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내 몸 상태가 어떤지 전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좋고요. 그리고 주짓수를 하면서 신기한 건, 세게 맞아도 제 몸은 제 생각보다 훨씬 잘 버틴다는 사실이었어요. 멍이 생각보다 쉽게 들지 않아요. 저는 요즘 그래서 심심하면 제 가슴이나 배를 때려요. 좀 단단하게 만들고 싶어서요. 그러다 보니 겁이 좀 없어졌어요. 자신감은 엄청나게 상승했죠. 이 좋은 걸 이제까지 남자들만 하고 있었다니!

 

위선희 3

당당한 선희님. 사진: 위선희 제공

 

회로: 아까 인간관계를 정리했다고 하셨는데요. 그때 경험을 좀 듣고 싶어요.

선희: 처음 페미니즘을 접하고 나서는 화가 많이 났어요. 그래서 주위 남성 친구들에게 계속 화를 냈어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할 때마다 화를 내면서 뭘 읽어보라고 줬어요. 그래서 지금 주위에 원래 알고 지내던 남자애들이 아무도 안 남았어요.

페미니즘을 알고 나서 생각해보니 예전에 남성 친구들과 했던 대화가 생각나는 거예요. 친했던 한 남성 친구는 다른 여성들 가슴 순위를 매겼다는 이야기를 저에게 한 적이 있었어요. 저는 그때는 잘 몰랐는데, 여성에게서 ‘가슴’만 따와서 그렇게 순위를 매기는 의미를 알고 나니까 너무 짜증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짜증 나서 막 욕을 했더니, 그 애가 하는 말이, “너도 그때 같이 웃어 놓고 왜 그러냐”는 거에요.

 

회로: 그런데 공대는 남성의 비율이 높잖아요. 그 환경에서는 인간관계를 어떻게 관리하나요?

선희: 제가 지금 남성과 함께 일해야 하는 공간은 연구실뿐이에요. 과학고 동문 모임은 안 나가면 그만이고요. 그래서 연구실에서는 최대한 페미니즘 이야기를 안 해요. 이미 프로필 사진에 페미니즘이 있어서 사람들이 알고 피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요. 지도교수님은 굉장히 좋은 분이고 여성 차별적인 발언을 거의 안 하세요. 그래서 학생들도 덩달아 안 하는 것 같아요. 연구실 내 여학생 비율이 다른 연구실에 비해 높기도 해요. 박사 후 연구원 포함 14명 중 5~6명이 여성이거든요.

제가 복이 좀 많은 것 같아요. 그 외에 제가 활동하는 정당(정의당), 시민단체(마고, 페미회로, ESC 등등) 모든 곳에서 페미니즘이 보편적 정서로 깔려있어요. 그래서 참 인간관계를 넓혀 나가기 쉬운 것 같아요. 또 제가 술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학연, 지연보다 흡연이라고 흡연자여서 인간관계를 흡연으로 관리하는 것 같네요.(웃음)

 

회로: 감사합니다. 혹시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선희: 마지막으로 꼭 이 해가 가기 전에 꼭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고 설리, 고 구하라 님을 짧은 기간 동안 보내면서 사회적인 문제로 페미사이드(*)를 집중해서 보고 있어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그 많은 시위와 폭로가 이어진 뒤 이 사회가 변하긴 한 걸까요? 저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혜화역 시위를 분노에 차 참석하면서 결의를 다지곤 합니다. 여전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제가 보고 있는 데이터가 전부 조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페미니즘 활동가로 만난 한 분이 제게 물으셨어요. “여성긴급전화 1366(**)에 한 달에 몇 통이 걸려올 것 같아요?” 저는 머리를 굴려봤습니다. 그리고 답했습니다. “하루에 한 5명 정도면 한 달이면 150명 정도가 되겠네요.” 돌아오는 답변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쓴웃음) 1500통이 걸려 와요. 이거 심각한 문제예요. 사람 목숨이 달린 문제예요. 이 사회는 바뀌어야만 합니다.” 저는 페미니스트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 명의 목숨이라도 지켜내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목소리를 내고 싸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터뷰에서 꼭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렇게 지면과 시간을 제게 할애해주셔서 감사해요. 페미회로!

 

*페미사이드는 여성(female)과 살해(cide)의 합성어로 여성혐오적 살해, 동기와 이유가 여성이라는 점만으로 살해당하는 것을 뜻한다.

**여성긴급전화 1366은 가정폭력, 데이트폭력에 심하게 노출되어 신변이 위험할 때 신고를 하는 그야말로 긴급연락망이다.

022: 새내기 디자이너의 첫 발자국, 보라

Feminist in STEM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 022: 새내기 디자이너의 첫 발자국, 보라

 

누군가 한 번 쯤은 나는 이 디자인이 더 예쁜 것 같아하며 고민 끝에 물건을 사 본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디자인이란 무엇이고, 디자이너는 어떤 일을 할까? 디자이너는 익숙한 듯 생소하지만 매력적인 직군으로 다가온다. 이번 페미회로 인터뷰에서는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는 디자이너 보라 님을 만나보았다. 공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서울의 한 스타트업 회사에서 디자인을 하며 느끼는 고민과 그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인터뷰어인 <페미회로>의 산들, 희수는 회로, 인터뷰이 보라 님은 보라로 표기했다. 교정은 <페미회로>의 우연, 한솔, 발행은 <페미회로>의 배현주, 우연(이상 가나다순)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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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열린 전시 <Plastic Fantastic>에서, 보라의 뒷모습. (사진: 보라 제공)

 

회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보라: 안녕하세요. 저는 2018년도에 공대에서 산업디자인 학부를 졸업하고, 지금은 서울의 스타트업에서 디자인을 하고 있는 보라입니다.

 

회로: 인터뷰를 처음 요청받았을 때 인터뷰에 응할까 고민하셨나요? 고민하셨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에 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보라: 인터뷰는 기록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부담스러웠어요. 저는 제가 아직 미완성이라고 생각하는데, 미완성인 저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웠거든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인터뷰하면서 저의 짧은 커리어를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고, 비슷한 커리어를 준비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인터뷰에 응했어요.

 

공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다

 

회로: 학부 때 산업디자인과에서 다양한 수업을 들으셨을 텐데, 학부 때 했던 것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과제가 무엇이었나요?

보라: 수업에서는 프로젝트의 주도권을 잃기가 쉬워서 그중에는 인상 깊은 과제가 많지는 않았어요. 수업에서는 교수님이 주신 주제에 맞춰서 고민하게 되거든요. 오히려 동아리 활동이나 랩실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들이 ‘난 이런 걸 해야지’라고 시작한 경우라 더 재미있었어요.

굳이 수업에서 재미있었던 과제를 꼽자면, 3학년 때 발달장애 학생들을 위한 제품 디자인을 꼽을래요. 결과물보다는 사용자로 상정된 발달장애 학생 관련 자료를 모으고, 실제로 발달장애인 학교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는 환경을 확인하고 학부모님들을 인터뷰했어요. 그 과정에서 사용자들에게 깊게 다가갈 수 있었다는 점이 제일 좋았어요. 학생일 때는 이런 경험할 기회가 적거든요.

 

회로: 그 프로젝트를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실 수 있나요?

보라: ‘제품 디자인’ 수업에서 진행한 프로젝트였는데요, 이 수업은 일상에서 불편한 점을 찾아내고 해결할 수 있는 제품을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어내는 수업이에요. 그 수업에서 가정하는 타겟유저(*)는 발달장애인이었어요.

그 수업을 수강한 학생들이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냈어요. 예를 들어, 발달장애 학생들은 생리대를 사용하는 데에 많이 서툴다고 해요. 언제 생리대를 갈아줘야 하는지, 갈고 나서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교육하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생리대 사용법을 안내해주는 컨셉을 제안하고 발전시킨 친구들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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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 학생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예방 교육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교구. 보라 제공. 페미회로 갈무리

 

제품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팀을 나눠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발달장애 학생을 담당하는 선생님과 장애 학생들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이야기를 나눈 후, 학교 근처 장애인성폭력상담센터의 센터장님을 만나 인터뷰를 했어요. 이 인터뷰를 통해 발달장애 학생들이 성폭력을 당하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 고려할 점이 많다는 것을 알았어요. 인터뷰 당시 센터장님께서 발달장애 학생들은 피해를 당했을 때, 기분이 나쁘고 이상하게 느껴도, 가해자가 웃으면서 ‘좋은’ 사람인 척 어물쩍 넘어가면 성폭력 피해를 성폭력 피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어떻게 제품을 디자인해야 발달장애 학생들이 성폭력 상황에서 잘 판단하도록 도울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디자이너들은 타겟유저가 겪는 어려움을 조사하는데, 학생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데스크 리서치(**)에 그쳐요. 하지만 이렇게 타겟유저가 명확하고 좁으면 직접 당사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는 정보도 많아서 리서치가 정말 도움이 많이 됐죠.

 

(*) target user. 제품이나 서비스를 사용하도록 예측되는 특별한 사용자 그룹. 디자이너는 이들의 성격과 특성을 고려하여 디자인한다.

(**) 현장에 직접 나가서 인터뷰나 조사를 할 시간이 부족하거나 그 전 단계에서 인터넷으로 하는 자료 조사.

 

회로: 그 프로젝트의 결과는 어떤 형태로 나왔나요?

보라: 부모가 발달장애 학생의 루트를 볼 수 있게 하는 스마트 밴드를 만들려 했어요. 예를 들어, 학생이 학교에 있다가 하교 후 학원으로 가고, 학원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루트를 GPS로 등록해두고, 정해진 루트를 벗어나거나 심장 박동이 급격하게 바뀌는 등 이상 징후를 판단할 수 있는 밴드를 구상했어요. 그런데 시장에는, 버튼을 누르면 엄마와 바로 통화할 수 있는 스마트 밴드 등 다양한 스마트 밴드가 이미 출시되어 있었어요. 그렇다면 우리의 제품을 그런 기존의 제품들에 비해 어떤 점이 좋나 생각해보았어요.

저희는 리서치 과정에서 학생들이 밴드에 애착이 강하다는 걸 발견했어요. 그래서, 학생이 부모님과 같은 팔찌를 나눠 끼고, ‘지금 바로 옆에는 아니지만 부모님과 함께 있다’는 감정을 제품에서 느낄 수 있게 하는 방향을 생각했죠. 그리고 성폭력이 발생한다면, 가해자가 팔찌를 뺄 수 있다는 문제가 있는데, 이것을 막기 위해 학생의 팔찌가 부모님의 팔찌에 맞닿아야만 빠지는 방법을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리서치를 통해 문제를 도출하는 데에 시간을 많이 써서, 완성도 있는 프로토타입(prototype, 시제품 또는 실제 제품과 가까운 실물 크기의 모형)을 만들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은 아쉬워요. 하지만 우리 제품이 기존의 스마트 밴드나 스마트 워치와 무엇이 다른지 명확하게 차별점을 제시할 수 있었어요. 사용자가 제품을 통해 보호자와 더욱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죠.

산업디자인을 배우며 깨달은 사실은, 어떤 제품이든 결함을 가졌기 마련이고 완벽한 제품을 만들 수는 없다는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이 제품이 다른 제품에 비해 갖는 강점을 타겟유저에게 잘 내세운다면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회로: 그런 제품 디자인 수업을 하면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게 마지막 과정인가요?

보라: 그렇죠, 대체로 프로토타입과 함께 프레젠테이션하는 게 마지막 과정이에요. 그때 인터뷰에 응해주셨던 분들과 학부모님들을 초청해서 그분들 앞에서 발표했었죠. 한편으로는 죄송하기도 했어요. 저희는 이 문제에 꾸준한 관심을 갖고 제품을 개발하지 않고, 일회성으로 컨셉을 잡고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끝나는 프로젝트였으니까요. 물론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었지만요.

 

회로: 보라 님은 공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셨는데요, 일반 대학교에서 디자인이나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커리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궁금합니다.

보라: 요즘은 다른 종합 대학교의 디자인과에서도 융합 인재를 중시해서 단순히 하나의 시각 디자인이나 제품 디자인을 배우기보다는 다양한 스킬을 배운다고 들었어요. 디자인과에서 아두이노(*)를 배운다던가 UX 디자인 프로세스(**)를 같이 배우는 것을 보기도 했어요. 제가 다닌 학교에서는 다른 학교들보다 일찍 디자인과 공학의 융합하기 시작해 이를 차별점으로 내세웠지만, 요즘에는 다른 학교와 크게 차이가 없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대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좋았던 점은 제가 다양한 이공계 분야를 알아갈 수 있고 공학 분야에 전문 지식을 가진 친구들을 사귈 수 있다는 것과 공대 출신인 걸 자기 PR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산업디자인에서는 설계와 같은 공학적 요소와 외관의 스타일링, 컨셉을 모두 고민해야 하는데요. 제가 배운 공학적 접근법이나 배경 지식이 제가 디자인하고 그것을 개발자나 엔지니어들과 공유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또, 제가 잘 모르는 회로를 만들거나 공학적 설계를 할 때 전문적인 친구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죠. 마지막으로 공대 출신이라는 점을 나의 브랜드로 활용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나는 공대를 나와서 IoT(***)에 관심이 많아서 이런저런 기계들을 써봤고, 요즘은 AI 스피커에서 어떤 기능에 관심이 많다’는 식으로 기술에 친화적인 디자이너임을 강조할 수 있죠. 물론 이런 전략들은 자기가 선택하기 나름이고, 자신에게 맞게 PR 전략을 짜는 게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 아두이노(arduino)는 다양한 센서들로부터 입력값을 받아들여 다양한 전자 장치로 출력하게 해주는 기판이다. 2005년 이탈리아의 인터랙션 디자인 전문학교의 교수가 하드웨어 비전공 학도들을 위해 기초적인 지식과 저렴한 가격으로 개발이 가능한 마이크로컨트롤러 보드를 개발하고자 하여 만들어졌다.

(**) UX는 User eXperience로 사용자 경험을 뜻한다. UX 디자인은 사용자가 제품이나 서비스 등과 상호작용하면서 받아들이는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디자인이다. UX 디자인 프로세스는 UX 디자인을 하는 전 과정을 뜻한다.

(***) Internet of Things의 줄임말로, 사물인터넷을 뜻한다. 사람의 도움 없이 인터넷에 연결된 사물끼리 알아서 정보를 주고받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블루투스나 근거리무선통신(NFC) 등이 사물들의 자율적인 소통을 돕는 기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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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가 관람한 4560갤러리의 전시. 미니멀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사진: 보라 제공.

 

회로: 보라 님은 스스로를 어떤 디자이너라고 생각하시나요?

보라: 대학을 졸업하고 저 자신을 어떤 디자이너로 명명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저 자신을 스스로 제품 디자인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는데요. 원래 ‘제품 디자이너’는 하드웨어를 디자인하는 사람을 뜻했고, ‘UX/UI(*) 디자이너’가 어플을 만드는 사람을 부르는 용어였어요. 그런데 요즘은 어플도 ‘디지털 프로덕트’라고 해서 제품으로 치더라고요.

어플을 만들 때도 인터뷰나 관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자가 겪는 문제들을 확인하고, 그 솔루션을 디자인으로 시각화하기 위해 노력하는데요. 이전에는 조사와 반영 과정을 구분해서 생각했다면, 요즘에는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새로 생긴 디자이너가 프로덕트 디자이너(product designer)예요. 또 디자인하는 제품이 디지털인지 아닌지로 구분하는데요, 요즘에는 워낙 우리나라에서 하드웨어 디자인하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어요. 그래서 요즘은 누가 프로덕트 디자이너라고 하면 ‘그러면 어떤 어플 만드세요?’라는 질문이 먼저 나와요. 그래서 이제는 저 자신을 어떤 디자이너라고 해야 좋을지 고민이에요.

저는 디자이너가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저는 제품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예요’라고 말하기보다는, 어떤 테마를 디자인한다고 소개하는 게 더 좋다는 생각을 해요. 예를 들어, ‘도시에서도 깨끗한 공기를 즐길 수 있는 제품 경험을 고민해요’, ‘사람들이 사고 싶은 옷을 더 빨리 찾을 방법을 디자인해요’ ‘세탁기와 빨래할 필요 없는 삶을 구상해요’처럼요. 내가 하는 일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느냐를 고민하기보다는 내가 집중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 UX 디자인은 사용자가 제품이나 서비스 등과 상호작용하면서 받아들이는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디자인이다. UI(User Interface) 디자인은 사용자와 프로그램의 경계를 디자인한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어플의 UI를 디자인할 때는 스마트폰 화면의 구조와 버튼을 디자인한다.

 

회로: 자기 주관이 부족하면 교수님께 쉽게 휘둘릴 수 있다는 보라 님 말에 저(산들)도 공감해요. 저도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제가 3학년 때까지는 특정 교수님만 수업하셨어요. 그래서 강의 이름보다는 담당 교수에 따라 수업의 성격이 달라졌는데, 다른 수업을 들어도 결국 교수가 같으면 같은 내용을 배워 힘들었어요. 3학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산업디자인 중에서 정말 제품 디자인만 했거든요. 근데 4학년이 되어서 새로 오신 교수님이 UX/UI 디자인을 알려주시는 거예요. 저는 제품이 재미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저는 UX/UI 디자인이 더 재미있었던 거죠. 지금은 UX 디자이너를 목표로 하고 있어요.

보라: 제 생각엔 ‘UX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과학적인 실험’이라는 말처럼 당연한 말이라서, 이제는 애매한 표현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디자인할 때 사용자를 고려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데, 이제서야 적절한 단어를 찾아 UX라는 단어로 부르는 것 같아요. UX 리서쳐와 UX 디자이너를 동일시하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스스로를 ‘UX 디자이너예요’라고 표현하되, 실질적인 아웃풋도 함께 표현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UX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어플을 만든다’던가, ‘UX 사용자 조사를 기반으로 새로운 공간을 디자인한다’고 말하면 어떨까 해요. 요즘은 UX라는 단어가 없어지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요리디자이너’, ‘음악디자이너’ 등 ‘디자이너’는 어디든 붙을 수 있는 단어이기에, 자신이 어떤 디자이너인지 잘 알고,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회로: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선택할 수 있는 진로로 무엇이 있나요? 졸업 후 진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고려했던 점, 힘들었던 점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보라: 대체로 졸업 시기에 인턴으로 일을 시작하는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에는 저희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대학원 진학도 고려했는데, 회사 일에 재미를 더 많이 느꼈어요. 학생으로서 수업이나 프로젝트에서 제품을 구상할 때는 대개 현실과 동떨어져 고안했는데, 일하면서는 제가 구상한 제품이 실제로 생산되어 팔린다는 게 뿌듯하고 재미있더라고요.

저는 디자인을 전공했다고 해서 반드시 디자이너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디자이너로 일하지 않는다고 자존심 상할 필요도 없고요. 디자인을 이해하면 다른 일에도 큰 도움이 되거든요. 디자인을 배우면 디테일을 보는 눈이 길러지기 때문에 영업, 마케터나 유튜버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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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Plastic Fantastic>에서. 사진: 보라 제공.

 

스타트업 디자이너의 일

 

회로: 보라 님은 지금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계신데, 스타트업을 첫 직장으로 정한 이유가 있나요?

보라: 졸업하고, 제품 디자인을 하고 싶은지 UX/UI 디자인을 하고 싶은지 고민이 많았어요. 다 재미있기도 했고요. 그래서 일단 넓게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지금 다니는 회사를 선택했어요. 제가 다니는 회사는 작은 스타트업이라, 제가 제품도 디자인하고, 어플도 디자인하고, 홍보 콘텐츠까지 맡고 있어요. 일한 지는 2년 정도가 되었어요. 제가 직접, 디자인에서 마케팅까지, 제품을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모든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

 

회로: 그럼 디자인부터 마케팅까지 모두 참여하고 있나요?

보라: 네,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참여하고 있어요. 회사에 다니면서 하는 고민과 학생 때 고민과는 정말 다르다는 것도 느끼고 있어요. 저희 회사는 스타트업이니까 회사가 잘 돼야 나도 잘 되잖아요. 그래서 회사가 어떻게 해야 잘 될까를 고민하다 보니 마케팅까지 관심 갖게 됐어요. 요즘에는 시장 트렌드도 공부하고 주식 공부도 아주 약간 하고 있어요.

 

회로: 학교에서 교수님의 의견에 따라 수정을 하다 보면 내 디자인을 하기는 힘들 수 있지만, 양질의 크리틱(*)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가 소규모이고 디자인 사수가 없어서 제품에 대한 크리틱을 받기가 힘들지는 않았나요?

보라: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회사의 디자인이 제품 출시 전에 유출될 수도 있기에, 회사 외부 인원에게 쉽게 크리틱을 부탁할 수는 없어요. 대신 저는 제 제품의 각 부분을 왜 이렇게 고안했는지 누구에게나 설명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꼭 필요하고 이유 있는 디자인만 넣다 보니 결국에는 미니멀한 디자인이 되더라고요.

여기서 스타일링이 더해지면 더 좋은 브랜딩이 될 거 같아요. 지금 디자인하고 있는 제품을 처음 디자인할 때부터 미니멀하게 가자고 잡았는데, 미니멀한 기본 틀로 디자인을 하고 다른 회사들과 협업해서 제품이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기기의 범용성을 추구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온전히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어요. 학교 다닐 때는 교수님의 의견 하나하나에 휘둘려요. 반면, 소규모 스타트업에서 혼자 디자인하다 보니, 판단해줄 사람이 없어지면서 스스로 더욱 치열하게 고민했어요. 이건 왜 이렇게 디자인했는지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팀원들과 함께 방향을 결정할 수 있거든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더욱 고민했고, 지금은 저 자신을 어느 정도 알아요. 저는, 불필요한 요소는 포함하지 않는 명확하고 미니멀한 디자인이 좋아요. 요즘에는 운영 업무도 맡으면서, 어플 관리 이슈도 많이 생각해요. 불필요한 요소가 많은 디자인은 관리하기가 힘들어요. 특히 어플이 그렇죠. 어플은 쓸데없는 동작이 늘면 관리해야 하는 요소가 배로 늘어나요.

 

(*) 디자인과에서는 과제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더 나은 디자인을 위하여 교수님과 동료 학생들에게서 평가받는 시간을 꼭 가진다. 이 시간을 크리틱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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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가 관람한 4560 갤러리의 전시. 사진: 보라 제공

 

회로: 맞아요, 사용자가 큰 정성을 들이지 않아도 오래도록 사용하기 좋은 제품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처음에 봤을 때 마냥 예뻐도 관리가 안 되고 지속이 안 되면 결국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보라: 그래서 요즘은 마냥 잘 꾸미기만 한 제품은 실속이 없다고 느껴요. 개발자들은 애니메이션이 많은 어플을 정말 싫어하더라고요. 개발자들이 귀찮아한다는 이유로 그 어플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개발자가 싫어한다는 건 결국 관리해야 할 요소가 많다는 뜻이에요. 관리자들의 부담이 적어야 일이 더 빨리 진행되고 더 많은 일을 기획할 수 있기 때문에 제품을 디자인하면서 개발자가 관리해야 할 요소가 많아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해요.

그래서 개발자와 협업하는 실무에서 많이 배워요. 물론 개발자와 타협하는 과정에서 만들 수 있는 것만 만들게 되는 상황은 디자이너로서 주의해야 하지만요. 아직 저도 왔다 갔다 해요. 관리가 힘드니까 ‘미니멀하게 가자’고 했다가, ‘아, 내가 디자이너로서 너무 도전의식을 버렸나?’하고 갈팡질팡 고민해요.

그래서 요즘은 기록이 중요하다고 느껴요. 종종 제가 이걸 왜 이렇게 디자인했는지 생각나지 않기도 해요. 특히 분명한 기준 없이 골랐을 때 그렇죠. 그 다자인으로 결정한 이유를 기록해 놓아야, 저도 편하고 결정된 디자인을 두고 개발자와 논의할 때 덜 힘들어요. 학부생 때는 포트폴리오를 위해 기록해야 하고, 회사에서는 어떤 순서로 어떤 프로세스로 디자인했는지 알기 위해 기록이 중요하다고 느끼죠.

 

회로: 개발자와 협업 중 생기는 관리 이슈를 말씀해주셨는데, 다른 직군의 사람과 함께 일하기 힘들지는 않나요?

보라: 아무래도 개발자들은, 저와는 다른 툴을 다루고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니 커뮤니케이션이 쉽지는 않죠. 특히 어플 관리 이슈에서는 그런 차이점이 많이 나타나요. 저는 디자이너로서 많은 기획을 제안하는데, 기획을 그대로 따르면 개발자 입장에서는 관리 이슈가 배로 늘어나요. 디자이너가 기획을 제안할 때는 이상적인 시나리오만 생각하지만, 개발자는 ‘if not’도 가정해야 하거든요. 예를 들어, 다른 전자기기 연결에 실패하면 어떤 화면이 뜰지, 그 상황에서 다른 화면으로 넘어갔다가 이 화면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화면에 무엇이 떠야 할지 모든 것을 다 생각해야 해요. 제가 아직 주니어 디자이너이니, 개발자 입장에서 생각하려면 경험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요.

 

회로: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것은 어떤가요? 스타트업은 왠지 자유로운 분위기이고 디자이너 개인에게 많은 결정권이 주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보라: 지금 일하는 회사가 제 첫 회사이기 때문에 일단 저희 회사에 한해서만 말해볼게요. 저희 회사는 결정 과정이 굉장히 열린 편이에요. 제 생각을 공유하기 자유로운 편이고, 생각을 말하는 것에서 저지받아본 적은 없어요.

아까도 말했는데, 제가 어떤 결정을 내렸든 결정 내린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 저와 반대되는 의견과도 함께 논의해볼 수 있어요. 이렇게 함께 합리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결정권을 누가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결정한 이유를 메모해두고 논의에 활용하는 게 중요해요.

저는 제가 보기에 여러 시안이 비슷하면, 대표님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판단을 요청하기도 해요. 저는 그걸 계속 봐 온 사람이기 때문에 다 똑같이 느껴질 수 있는데 처음 본 사람은 다를 수 있으니까요.

 

회로: 학부 때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셨는데 지금은 어플 디자인, UX/UI 디자인, VUX 디자인(*), 제품 디자인 등 넓게 다루고 계시잖아요. 학부 전공과는 조금씩 다 다른 분야인데 어려움은 없으신가요?

보라: 산업디자인이라는 분야 자체가 되게 포괄적인 것 같아요. 어떤 제품을 만든, 디자인 요소만 고려하지 않고, 사람들이 제품을 어떻게 쓰는지, 제조 과정에서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하는 것이 모두 산업디자인에 포함돼요. 저는 저희 회사의 상품을 디자인하면서 새로운 디자인을 고안하는 것만이 산업 디자이너의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에 저희 회사의 제품을 크라우드 펀딩으로 출시하는데, 펀딩 페이지에 실리는 콘텐츠도 제가 맡았어요. 제품 설명, 제품 사진, 이미지 배열, 캐치프레이즈 등을 모두 제가 구성했는데, 제가 제품의 컨셉과 형상에 관해서 해온 고민이 이 콘텐츠에 모두 담겼어요. 지금 제가 하는 일이 학부 때 배웠던 것과 딱 연결되지는 않지만, 필요할 때마다 배웠던 것을 최대한 사용하는 것 같긴 해요.

저희 제품을 테스트할 때 학부 때 배웠던 사고방식이 도움이 되었어요. 이건 공대 출신이기 때문인지 산업디자인을 전공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어떤 변인은 통제하고 어떤 변수를 비교할지 계획을 짜서 테스트하니, 디자인은 실험 설계와도 비슷해요. 경력을 시작할 때는 실험을 설계해본 경험이 있다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전혀 생각 못 했는데 말이죠. 또 테스트 과정에서 산업디자인에서 배웠던 프로토타이핑 능력도 도움이 됐어요. 테스트 단계에서 제품을 고정해주는 거치대가 필요했는데, 그때 제가 필요한 거치대를 3D 프린터로 만들었든요.

 

(*) Voice UX 디자인. 사용자가 클릭이나 터치가 아닌 음성으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할 때를 고려한 사용자 경험 디자인을 뜻한다. AI 스피커 등 음성인식 기반 서비스가 확대되며 자주 사용되는 용어다.

 

회로: 보라 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학교에서 배운 것과 회사에서 하는 일이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학생 입장에서 실무 경험을 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라: 실무에서는 제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과정을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제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제품을 어떻게 패키징하고 마케팅할지도 중요하죠. 학생 때는 문제 해결만 중요시하고 판매 전략은 고민하지 않지만, 시장에서는 디자인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들이 원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거든요.

특히 마케터라면 패키징과 마케팅을 고민을 해보는 게 중요한데, 학생들에게는 이 중요성을 깨달을 기회가 드물죠. 제 지인은 학부 시절에 크몽(Kmong)이라는 사이트를 활용해서 단순한 제품이라도 판매해보는 경험을 가졌어요. 판매 페이지에 나오는 문구와 이미지를 조금씩 바꾸면서 사람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반응을 보는 거예요. 그런 경험이 중요하다는 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아서 저도 좀 아쉽긴 했어요.

 

디자이너의 생각, 보라의 생각

 

회로: 디자이너들끼리 만나면 어떤 주제가 주로 이야기되는지 궁금해요. 아무래도 요즘 디자인과 관련해 사회 이슈, 특히 젠더 이슈가 화제가 된 경우가 많은데, 디자이너들끼리도 이런 이야기를 하나요?

보라: 제가 다니는 회사는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제가 디자인을 배울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최대한 세미나나 스터디를 많이 활용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세미나나 스터디에는 저처럼 사수 없이 스타트업에서 혼자 일하는 디자이너가 굉장히 많이 와요. 다들 스터디에서 다들 아는 것을 최대한 나누고 성장하려 노력해요. 디자인 분야엔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으니, 여성 디자이너들의 이슈들도 자주 나와요. 그때 젠더 이슈도 많이 나왔던 것 같아요.

물론 스타트업이라고 해서 다 성평등하지는 않죠. 스타트업에 대한 환상을 깬 사건이 바로 2017년 온오프믹스 경영진의 성범죄 사태(*)였어요.

그러나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굳어진 체계가 없고 자유로운 기업문화가 많으므로 상대적으로는 불평등 이슈가 덜하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아요. 참고로 세미나를 돌아다니면서 알게 된 곳으로는 디자인FM이라는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팟캐스트가 있구요. ‘스여일삶(스타트업 여성들의 일과 삶)’이라는 그룹도 알게 되어서 종종 글을 읽고 있어요.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헤이조이스’라는 여성창업가들을 위한 커뮤니티도 있습니다.

 

(*) 오원석, 「스타트업 ‘온오프믹스’ 대표·부대표, 강간·추행 혐의 피소」, 2017.08.26, 중앙일보, 링크: https://news.joins.com/article/21876732

 

회로: 디자인을 하다 보면 내 가치관과 시장의 요구가 부딪히는 순간이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AI 스피커 기본 음성 정할 때를 생각해볼게요. 시장에서 기본 목소리로 여성의 목소리를 선호하면(*), 과거에 비서 혹은 서비스직에 여성이 많이 종사했다는 관행을 고민 없이 반영한다는 고민에도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선뜻 새로운 선택을 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보라: 그건 정말 회사에서 결정권자가 그런 이슈에 관심이 있어야 가능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게임 시장에 굉장히 여성혐오적인 요소가 많고, 그 사실이 잘 알려있죠. 게임업계 안에서도 젠더 편향적인 요소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꼭 있어요. 그래도 현실이 잘 안 바뀌어요.

저는 이미 시장 트렌드가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요즘에는 브래지어 광고도, 예전처럼 가슴의 ‘볼륨’만을 강조하기보다는, 편하게 내 몸에 잘 맞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광고가 많죠. 저는 이런 트렌드가 소비자들이 자신의 의사를 소비로 표현한 덕분인 것 같아요. 특히 마케팅에서 제일 중점을 두는 대상인 2~30대 여성이 젠더 이슈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제 젠더 이슈에 무지해서는 제대로 마케팅을 할 수 없어요. 회사에서 젠더 이슈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더라도 소비자로서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앞으로는 시장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고영태, 「너는 아니? 중성목소리…AI가 여성목소리인 이유」, 2019.05.01, KBS, 링크: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191793

 

회로: 듣고 보니 요즘 소비자들의 피드백이 강하게 반영되어서 뒤늦게 광고나 마케팅 방향을 수정하는 기업들이 많은 것 같아요. 올해 아동 모델을 성적으로 대상화한 광고를 내보낸 배스킨라빈스가 소비자들의 항의를 받아 해당 광고를 내리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도 광고를 내보낸 방송사들을 제재한 것(*)처럼요.

보라: 그렇죠. 당장 화장품 광고만 봐도 한국과 다른 나라의 양상이 매우 달라요. 그나마 아이돌 문화 때문인지,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화장하는 남자’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샤넬이 남성 색조화장품의 첫 런칭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시도했다고 하더라고요.

 

(*) 김진수, 「배스킨라빈스 광고 내보낸 7개 채널 경고…“성적 환상 불러 일으켜”」, 2019.08.27, 여성신문, 링크: 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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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중인 보라님. 사진: 페미회로

 

회로: 벌써 인터뷰가 막바지인데요.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보라: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남는 것 같아요. 저는 용기가 부족해서 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는데, 학생일 때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많이 해보라고 추천하고 싶어요. 학생일 때만 해볼 수 있는 것도 많고, 학생이기 때문에 실패해도 용서가 되거든요.

저는 트렌드를 좇아서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시대의 속도를 따라잡는 게 쉽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 인공지능 스피커가 각광 받으면서, 요즘 음성인식과 VUX가 떠오르고 있는데, 이게 뜰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런데 제가 만약 한글의 형태소에 관심이 많아서 언어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면 지금 정말 필요한 사람이겠죠. 제가 아는 인사 담당자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그분은 인사 과정에서 사람을 판단할 때 어떤 분야에서 ‘덕후’가 된 적이 있는지를 본다고 하더라고요. 무언가에 꽂혀 그것을 깊게 파봤다면, 뭐든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요. 가치가 있는 분야라면 당장은 빛을 보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분야가 되는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에는,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는 디자이너가 되기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 모습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내가 어떤 회사에서 일할 수 있을까?’ 생각할 때도,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일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게 중요해요. 예전에 『마케터의 일』이라는 책을 읽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어떤 환경에서 일하고 싶은지’ 생각을 잘 정리할 수 있었어요. 비단 마케터뿐만 아니라 모든 직업인이 일하는 자세로 이해해도 되는 책이니까 많은 분이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회로: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인터뷰가 관련 분야에 관심이 있는 분들뿐만 아니라 많은 분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명확하고도 미니멀한 디자인을 추구한다는 디자이너 보라와의 인터뷰를 통해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엿볼 수 있었다. 마냥 예쁜 것이 아닌 사람들의 생활과 특성은 물론 사용자의 경험까지 디자인에 포함된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그리고 하고 싶은 걸 하기를 바란다는 그의 말처럼, 타인의 눈에서 벗어나 용기 있게 자신의 길을 걷는다면 그 끝이 즐겁지 않을까? 학부생이 할 수 있는 고민과 사회생활에서 느낀 것들을 아낌없이 공유해준 그에게 감사하며, 앞으로 보라의 앞에 펼쳐질 일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