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스스로 선언한 나의 정체성, 실험실 고고학자 김연화

Feminist in STEM 페미회로인터뷰 프로젝트 027: 스스로 선언한 나의 정체성, 실험실 고고학자 김연화

 

김연화 님은 화학 석사와 과학기술학 석사를 받은, 이공계와 인문학을 모두 아우르는 연구를 하는 독립연구자이다. 독립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전까지 대학원, SK 기업 연구소, KISTEP(*) 미래전략본부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의미 있는 일을 찾아 새로운 자리에 도전했다. 이후, 결혼하여 남편의 해외 포닥(**) 생활을 함께하고,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타인이 자신에게 붙여주는 이름과 정체성에 질문을 갖게 되었다. 현재는 스스로를 실험실 고고학자라고 소개하는 연화 님의 삶을 들여다보자.

인터뷰어인 페미회로의 박인아, 이슬기는 회로, 인터뷰이 김연화 님은 연화로 표기했다. 교정은 페미회로의 우연, 한솔, 발행은 페미회로의 배현주, 서주, 우연(이상 가나다순)이 맡았다.

 

(*)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1999년 과학기술기본법에 따라 설립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직속기관이며, 국가과학기술 기획, 예측, 전략수립 및 국가연구개발사업 조사, 분석 ,평가 및 예산 조정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 박사후연구원(postdoctoral researcher)을 줄여 부르는 말. 박사후연구원은 박사 학위 취득 후 연구자로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단계이다. 학계에서 교수직을 포함한 전문직을 얻기 위해서는, 이 기간 동안 학문적 능력과 프로젝트 등을 설계하고 수행할 수 있는 종합적인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회로: 안녕하세요. 인터뷰를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연화: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실은 인터뷰를 요청해주셔서 놀랐습니다. 페미회로 인터뷰를 몇 번 보았는데 현업에서 활동 중인 쟁쟁한 과학자들을 주로 인터뷰 하셔서요. 멀쩡한, 사람들이 다 아는 직장을 다니는 과학자 분들이 인터뷰하시는데, 저한테 연락이 와서 한편으로는 영광스럽기도하고,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저는 실험실 고고학자라는 타이틀을 스스로 붙인 김연화라고 합니다. 직장에 다닐 때는 남들이 붙여주는 이름에 되게 의존적이다가, 직장을 그만두고 저를 소개할 이름이 없어져서 저를 소개하기 되게 어렵더라고요. 어디에 다닌다고 하면 깔끔한데, 그게 없으니 어려워서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최근에 제가 만든 타이틀이에요.

 

회로: 먼저 연화 님의 대학원 시절 얘기부터 들어보고 싶습니다. 대학원에서 석사과정 동안 어떤 분야를 전공하셨는지, 그리고 그 분야를 연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연화: 저는 학부와 석사를 POSTECH 화학과에서 마쳤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생명이나 환경에 관심이 많았는데, 무엇을 전공할지 고민하다가 화학을 선택했어요. 잘하는 과목이기도 했고 화학이 가장 기본적이라고 생각해 화학을 전공한 뒤에는 생명이나 환경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학부 때는 분자 단위의 물질들을 기본으로, 주변의 자연물과 세상을 이해하려는 것이 재미있었고 모르는 것을 배우는 즐거움이 좋았어요. 그러다가 마침 대학원에 갈 때, 구조생물학을 연구하는 새로 오신 교수님이 있었어요. 그 교수님은 주어진 단백질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단백질 모양에서 밝혀내는 연구를 하셨어요. 그 연구가 재미있어 보였죠.

대학원에 들어가서 맡았던 프로젝트는 전사 인자(transcription factor)에 관한 연구였어요. 생명과학의 센트럴 도그마는 DNA에서 RNA를 통해 단백질을 만들고, 이것이 생명의 중심 현상들을 모두 만들어낸다는 원리인데, 전사 인자는 DNA에서 RNA로 가는, 그리고 단백질로 가는 중간 과정을 조절하는 단백질이라서 흥미로웠고,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당시 구조 생물학에서는 각 각의 단백질 구조는 많이 밝혀졌지만, 단백질이 DNA, RNA와 결합하여 만든 컴플렉스(complex. 집합체)의 구조는 잘 밝혀져 있지 않았거든요. 이 구조를 알면 전사와 유전 형질 발현 메커니즘을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거죠.

 

회로: 연화 님은 석사만 하시고 회사에 취직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러면 석사 과정에서 구조 생물학을 연구하시다가 회사에 들어가셨네요. 회사에는 왜 가셨나요? 그곳에서 하신 일은 구조 생물학과 관련이 있었나요?

연화: 석사 후에 SK연구소에서 일했어요. 처음에는 대학원에 석박통합과정으로 입학했었는데, 연구와 대학원 생활에서 좌절을 겪으며 도전적인 프로젝트는 접고, 전기화학 센싱쪽으로 연구 주제를 바꿔서 석사를 졸업하고 기업연구소에 취업했어요.

회사 연구소에 지원한 이유는 화학 전공을 살리려고요. 기초과학보다는 기초과학을 활용해서 사회에서 쓰이는 지식을 만들거나 응용할 수 있는 것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기업 연구소로 발길을 돌렸어요.

 

회로: 대학원생 때 겪은 좌절을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연화: 좀 거칠게 말하면 제가 어렸죠. 과학자를 꿈꿔서 연구중심대학에 입학했기에 당연히 대학원에 간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졸업한 POSTECH 에서는 대부분 학생이 대학원에 가니까 그냥 대학원에 갔던 것 같아요. 연구가 무엇인지 몰랐어요. 물론 연구가 무엇인지 꼭 알고 가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학원에서 연구원이 되는 법을 훈련을 받는 거니까요.

저는 크게 두 가지가 어려웠어요. 첫째는 실험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어요. ‘세포를 이용해서 원하는 단백질을 다량 생산하고, 정제하고, 타겟 DNA와 RNA를 넣어 컴플렉스를 만든 후, 컴플렉스를 결정으로 만들어 구조를 밝히면 된다’는 개념은 단순한데, 막상 실험을 시작하니 각 단계를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몰라 막히는 일 투성이더라고요. 결과만 얻으면 노벨상을 받는 연구라는데, 이제 막 대학원에 들어간 학생이 그런 연구를 한다는 게 지적으로는 도전적인 일이지만 실전에 들어가면 무척 막연한 일이었어요. 구체적인 스텝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못 찾겠더라고요. 지도교수님께서도 구체적인 지도를 하지 않는 스타일이기도 했고요.

연구에서 계속 난관에 부딪히는 와중에 선배와 교수님에게 많이 들은 말이 “삶을 다 투자하지 않아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이였어요. 그래서 ‘내가 얼마나 더 여기에 내 삶을 쏟아야 할까’라는 생각도 들고, 요령보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얘기로 흘러가니까 ‘나는 연구에 안 맞는 사람인가, 연구자로 자질이 없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한 분야에서 어느 정도 터를 닦은 분들이 그런 얘기를 하니까 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약간 우회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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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로: 화학 연구소에서 또 다른 연구를 시도하신 것인가요?

연화: 회사에서는 연구보다는 생산에 가까운 사업부서에서 공정 중간 및 생산품의 품질 분석을 맡았어요. 분석을 수행하는 테크니션들을 교육하고, 분석 기법들을 문서로 정리하고, 분석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고, 분석 결과를 해석하고 문서로 정리하는 일을 했어요. 직접 실험하지는 않고 주로 문서 작업을 많이 했어요. 의약중간품을 생산하는 부서였는데 의약품은 식약청 승인과 판매를 위해 문서작업이 중요하거든요.

 

회로: 그렇군요.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계셨던 직장은 KISTEP 이셨다고 들었는데, 기업 연구소에서 KISTEP으로 옮기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연화: 회사에서는 제가 거대한 기계의 부품 중 하나라고 느꼈어요. 월급은 받지만 학생 때와는 다르게 보람이 없었어요. 무엇보다 제가 성장한다고 느끼지 못했고, 월급을 받으며 제 시간을 제공한다고 느꼈어요. 그때 다시 고민했죠.

정책 쪽 일을 해볼까 고민해봤어요. 남미를 여행하면서 페루에 갔는데 사진으로 봤던 1970년대 우리나라 모습과 비슷해 보이는 페루가 한국전쟁 직후에 우리나라에 식량을 지원해줬대요. 그 말을 듣고 원조를 받던 한국이 어떻게 이제는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을까 고민하게 된 거죠. 지금 돌이켜보면 단순하고 순진한 생각이지만, 그때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어요. 한 나라 혹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에 과학기술이 중요하니 국가 차원에서 비전을 제시하고 효율적인 방안을 마련하는 데에 일조하고 싶었어요.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하기 위해 다시 대학원에 들어갔고 졸업하고 KISTEP에 입사했죠.

 

회로: 다시 대학원에 들어가셨군요. 두 번째 대학원에서는 어떤 연구를 하셨나요?

연화: 사실 그곳이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하는 곳은 아니었어요. 과학과 정치, 정책도 다루긴 하지만 그 분야가 중심은 아니고 과학기술에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곳이었어요. 높은 권위를 지니는 과학 지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과학 지식이 권력과 어떻게 연계되어 작동하는지, 과학 지식과 사회적이거나 자연적 질서가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 공부했어요. 그중에서도 저는 과학기술학이라는 학문을 전공했어요. 과학 지식이 생산되는 전통적인 장소인 실험실에서 과학자들이 연구 대상을 과학적 대상으로 구성하는 과정을 연구했고요.

 

회로: 그럼 과학기술학을 다시 전공하고 KISTEP에 가게 됐군요. KISTEP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미래전략본부 기술예측실에서 미래예측, 기술수준평가, 기술영향평가 업무를 맡았어요. 그 당시 KISTEP 미래전략본부에서는 사회와 기술을 연결하는 작업을 새롭게 하고자 했어요. 과거에는 ‘미래에 어떤 기술이 주목받는가’ 혹은 ‘어떤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가’와 같이 기술 중심으로 미래를 예측했어요. 그때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미래 비전을 그리고 전략을 세우기 위해 단순히 기술 발전뿐만 아니라 사회와 기술의 관계를 같이 보아야 한다는 쪽으로 방향이 변했거든요. 그때, 과학기술학 전공자로서 추천을 받아서 들어갔어요.

사실 정책 관련 일을 하고 싶었는데, 미래전략본부에 배치가 되어 다행이었어요. 정책본부나 예산본부에서는 당장 시급하게 결정해야 하는 국가 현안들을 다루다 보니, 경제적 비용과 효과를 따지고 어느 분야에 얼마의 예산을 투입해야 하는지를 분석하는 경제적 사고가 많이 필요해 보였어요. 반면 미래예측은 예산분배보다는 조금 더 느슨하게, 어떤 기술이 어느 정도 발전할 때 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바뀔까, 사회가 새 기술을 어떻게 수용하도록 할까, 기술에 의한 사회적 부작용은 무엇일까 등을 논하는 부서여서 제가 다시 전공한 부분과는 오히려 잘 맞았거든요.

미래예측에서는 기술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를 분석해서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고 미래에 필요한 기술 목록을 작성해요. 기술수준평가는, 미래기술 목록을 기반으로, 현재 우리나라의 기술을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기술과 비교해 평가해요. 미래기술 목록은 정책이나 예산을 수립할 때, 어느 기술 분야에 투자할지 판단하는 근거죠. 신기술은 때로는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를 일으키기도 해요. 긍정적 변화도 있지만, 부정적 변화도 발생해요. 새롭게 부상하는 기술이 사회에 미칠 영향을 복합적으로 평가하는 기술영향평가 업무도 진행했어요. 기술영향평가에서는 독특한 점이, 시민들에게 특정 기술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기술에 관한 의견을 청취하는 시민 포럼을 함께 진행해요. 시민 포럼은 제가 공부했던 과학기술학에서 많이 다뤄서 업무를 할 때도 재미있게 진행한 기억이 나요.

 

회로: 이공계에서 공부한 배경이 이 업무에 도움이 되었나요?

연화: 기술예측실장님이, 제가 이공계 베이스라서 저를 뽑으셨다니, 엄청 도움이 됐겠죠. 미래 예측은 기술을 기반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기술을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해요. 기술의 메커니즘이 무엇이고, 우리가 가진 과학지식으로 기술을 실현할 수 있을지 이공계 지식 없이는 판단하기는 어려워요. 저는 이공계 베이스가 있어서 기술 이해하기가 좀 더 수월했어요. 이곳은 정책기관이지만 대부분이 이공계 박사인 이유도 이 때문이죠. 과학기술이 어떻게 연구되고 진행되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미래를 그릴 수 있거든요.

 

회로: 보통 박사 출신분들 중에 자연과학계열보다 공학 계열이 많나요?

연화: 공학 계열이 많았던 것 같아요.

 

회로: 미래 예측이 타겟으로 하는 기술이 한 분야에 치중되지는 않나요? 또 한 사람이 전공과 관련된 적은 분야를 집중적으로 보는지도 궁금하네요.

연화: 자신이 전공한 분야를 중점적으로 다루기도 하지만 기술이 굉장히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분야에서 왔건 많은 분야를 봐야 해요.

 

회로: 한 사람이 여러 분야를 보는 건가요?

연화: 네. 미래 예측 프로젝트에서는 다루는 미래 기술이 200-300여 개 정도고, 그 기술 모두를 대충은 알아야 해요. 자신이 전공하지 분야의 기술은 상대적으로 덜 잘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공계 언어 안에서 기본적인 수준의 이해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어요.

 

실험실 고고학

 

회로: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연화 님께서는 대학원에서의 생화학 연구, SK 기업에서의 품질 분석, KISTEP의 미래예측업무까지 각기 다른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으셨는데요, 현재는 스스로를 소개할 때 실험실 고고학 독립연구자라고 하셨는데, ‘실험실 고고학이라는 연구 주제를 고안하게 된 배경과 이 연구가 가진 의미는 무엇인가요?

연화: 과학 실험을 좋아해서인지 중고등학생 때부터 실험실을 좋아했어요. 대학원 생활 중에도 실험에 애증은 있었지만, 실험실 공간 자체에는 여전히 매력을 느꼈고요. 그래서 두 번째로 들어간 대학원에서 실험실 연구로 석사 논문을 썼고, 이후에도 실험실에서 벌어지는 일뿐만 아니라 실험실 공간 자체에 관한 연구도 지속하고 싶었습니다.

실험실 연구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많이 이루어졌어요. 그때 진행된 연구들이 과학기술학의 중심축 하나를 이루고 있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굉장히 탄탄하게 거의 완성된 연구 분야였어요. 아카데미의 과점에서 보면, 완성된, 끝난 연구였죠. 그러다 보니 학위논문연구를 할 때도 이미 트렌드에서 벗어난 실험실 연구를 해서 어떻게 다른 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논문을 쓸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고요.

또, 당시에 “노벨상에 근접한 국가 과학자의 실험실이 아닌 실험실을 뭐하러 들여다보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어요. 당시 제가 연구하던 연구실은 서울대 물리학과의 연구실이었거든요. 그 정도면 우리나라에서 상위 연구실일 텐데도 그런 질문을 받아 당황스러웠어요. 상위권 대학들의 교수님이 모두 국가과학자(*)도 아니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학원 연구실은 국가과학자의 실험실이 아니거든요. 연구실마다 환경이 달라 어느 곳을 평균적인 혹은 일반적인 연구실이라고 집어서 부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과학 연구자 대다수가 국가과학자가 아닌 상황에서 국가과학자의 실험실을 관찰하고, “과학 연구실은 이렇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과학기술학자들은 실험실 연구가 70~80년대에 끝났다고 말하기도 해요. 그런데 그 연구들은 미국과 유럽 중심으로 잘 나가는 실험실 위주로 진행되었다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유명한 실험실 연구 중 하나가 소크 연구소(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에서 진행한 과학기술학자 부르노 라투르(Bruno Latour)의 실험실 연구인데, 해당 실험실은 라투르의 연구 저서 『실험실 생활 Laboratory Life이 나오기 전에 노벨상을 받았거든요. 그 시기 우리나라에는 과학이랄 것도, 연구실이랄 것도 없는 정도였으니, 분명 그 당시 서구에서 했던 실험실 연구와 현재 우리나라 실험실 연구는 다르겠다고 생각했어요.

 

(*) 국가과학자란 세계적 수준의 연구성과를 내는 과학자를 선정해 매년 15억 원씩 최장 10년동안 지원하는 사업이다.
참고:
https://www.nrf.re.kr/biz/info/info/view?menu_no=378&biz_no=142

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9144&pageFlag=&sitePage=1-2-1

 

회로: 실험실 고고학이라는 이름은 어떤 뜻으로 지으셨나요?

연화: 연구를 구상하며 재현 방식도 고민했어요. ‘학계의 트렌드를 따라야 하는 부담이 있는데도 꼭 학문의 언어로 써야만 할까?’, ‘다른 방식으로 썼을 때 실험실의 더 다양한 면모를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었어요. 이 고민들이 모두 연결되어서 실험실 고고학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 이름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어요.

첫 번째로, 실험실 연구라는 주제가 과학기술학에서는 이미 끝나서 묻혀 버렸다는 의미가 있고요. 두 번째는, 기존 아카데믹한 연구에서는 벗어나, 실험실이라는 현장에서 장비들을 발굴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과학 연구’는 최첨단 장비를 떠올리게 하지만, 실험실에 들어가 보면 의외로 오래된 장비가 많아요. 특히 신생 연구실은 초기 자본(연구비)이 적은 상황에서 실험하기 위해 중고장비를 들여오기도 하고요. 제가 있던 실험실은 신생연구실임에도 은퇴하는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낡은 장비가 많았는데, 연구원들은 이들 중 돌아가는 장비를 발굴하고, 부품을 교체하거나 수리하면서 장비의 성능을 높이려 시도하고 있어요. 이 모습이 마치 유물을 발굴하는 느낌이 들어서 실험실 고고학이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또, 실험실 고고학이라고 하면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엄연한 학문은 아니니까 살짝 비껴가겠다는 의미도 있어요. 각 실험실과 실험 장비들을 학문적으로만 대하지는 않겠다는 뜻이죠. 재미있는 게, 장비를 보면 재물 조사를 하면서 한 장비에 붙은 스티커가 엄청 많아요. 많은 스티커를 보면서 ‘이 장비에 나름의 역사가 있겠구나’ 하고 느꼈죠. 저는 각 장비가 어떤 실험실을 거쳐서 현재 실험실에 도달했는지, 어떤 실험들을 했고, 어떤 연구자들을 만나서 어떤 결과들을 만들었는지 등 장비를 중심에 둔 연구를 하고 있어요. 신생 연구실에 들어와 재구축되는 장비의 재발견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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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하는 연구자의 실험실에서 가져온 해체된 장비의 부품들. 새로운 장비를 제작할 때 사용할 예정이다. (2019. 5) 사진: 김연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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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량분석 장비 중 하나인 QTRAP. 2004년부터 2018년까지 학교 재물조사 스티커가 빼곡하게 붙어 있다. POSTECH 연구센터에서 쓰다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 폐기처분될 운명이었던 장비가 2019년 6월에 연화 님이 연구하는 실험실로 옮겨왔다. (2019. 6) 사진: 김연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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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에서 가장 신형 장비다. 이마저도 리퍼비시(refurbished) 제품이다. 이 실험실에서 가장 핵심적인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2019. 6) 사진: 김연화 제공.

 

회로: 실험 장비의 자서전 같은 느낌이네요.

연화: 네. 맞아요. 실험 장비를 공장에서 생산한 어떤 모델 중 하나가 아니라, 이 실험실에 온 역사성을 품은 하나의 개체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다 보니 논문이 아닌 사진이나 동영상 등의 다른 방식의 재현을 고민하고 있어요.

 

회로: 저도 어떤 메시지를 누구에게 던지고 싶은지에 따라서 표현방식이 꼭 논문일 필요는 없는 데에 동감해요. 실험실 고고학을 통해 무엇을 보고 싶으신가요? 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으신가요?

연화: 실험 장비의 목적은 실험 수행과 분석이고, 장비가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려면 도움의 손길을 많이 필요로 해요. 장비의 이용자인 연구자나 장비를 수리하는 엔지니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죠. 저는 이렇듯 장비가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사람들이 어떻게 장비를 돌보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장비 돌봄과 유사하게, 실험실이라는 공간 또한 실험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 청소부터 시작해서 안전 관리 등 다양한 돌봄을 필요로 해요. 돌봄은 연구 외적이라고 치부되지만, 사실 실험실이라는 공간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데에 필수죠. 그런 면에서 장비 돌봄과 연구실 돌봄과 같은 ‘돌봄’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요.

 

회로: 돌봄 노동이 가족이나 단체에서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실험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점이 생각할 거리를 던지네요.

 

독립연구자, 정체성을 말하다.

 

회로 : 다음으로는 결혼 후 임신출산을 겪는 과정과 독립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질문하겠습니다. 먼저,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과 함께 외국으로 나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연화: 결혼할 때에 저는 직장인이었고, 제 배우자는 포닥(**)이었어요. 배우자는 교수가 되기를 원했는데 그러려면 해외로 포닥을 다녀와야 했죠. 함께 있으면 안정감이 느껴지고 잘 맞는다는 생각에 결혼을 결심했는데, 떨어져 산다면 결혼하는 의미가 없는 것 같았어요. 시댁도 저 혼자 감당해야 하고(웃음). 우리 둘은 결혼하면 같이 살기로 합의하고 어디서 같이 살까를 고민했죠.

한국에 머문다면 저는 직장에 계속 다니겠지만 배우자는 교수가 아닌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할 테고, 해외로 간다면 배우자는 포닥을 할 수 있지만 저는 직장을 더 다닐 수 없었어요. 저는 제 직장을 좋아했다기보다 제가 하던 일이 좋았어요.

앞서 과학정책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공부하고 일하면서 그게 꼭 정부 기관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정부 기관에서는 제 연구 결과가 바로 정책에 반영될 수 있는 확률이 높지만, 정부의 기조에 맞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해야 하는 한계가 있었거든요. 직장을 그만둬도 비슷한 일을 개인적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관련 공부를 하면서 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집에서 배우자를 서포트하면서 내 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순진하게 생각했죠.

 

회로: 독일에 계실 때 KISTEP의 외주 업무를 맡으셨다고 들었는데요, 그 당시 맡으셨던 일을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연화: KISTEP에서는 국가별 과학기술 정책 동향을 발간하는데, 그중 유럽 파트를 제게 맡겨 주셨어요. EU와 독일, 영국 정부가 어떤 과학기술정책을 수립하고 배포하는지 조사를 하고 정리하여 보고했어요. 우리나라에서 독일과 영국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중간중간에는 KISTEP에서 원하는 이슈가 있으면 조금 더 자세하게 이슈 중심으로 보고서를 써서 보내기도 했고, 다른 정책기관에서도 의뢰를 받아 독일의 국가 혁신 정책을 조사하고 분석해서 보내기도 했어요. 독일어를 조금 할 줄 알아서 독일어 자료 접근성이 높았거든요. 독일 내 뉴스들을 보면서 정부의 관점뿐만 아니라 정책이나 이슈에 대한 여론의 반응도 파악할 수 있으니 독일 정부의 정책 자료들이 국민들에게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더 잘 보이더라고요.

페미회로와도 접점이 있을 수 있는데, 스탠포드 대학교의 론다 쉬빙거 교수가 주도한 젠더 혁신(gender innovation) 프로젝트에 관한 짧은 보고서를 써달라는 의뢰를 받기도 했어요. 과학기술 혁신 방안 중 하나로 젠더적 관점을 통해 연구 혁신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죠.

 

회로: 영국이나 독일의 과학정책들을 조사하면서 어떤 점이 흥미로웠나요?

연화: 독일에 가기 전에도 독일의 과학기술정책에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KISTEP에서 맡았던 기술영향평가 업무는 시민참여를 중시하는데, 시민참여 행사를 가장 잘하는 나라가 독일이거든요. 독일에서는 정책을 수립할 때 시민과의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정책은 정부가 주도하는 것 같지만 결국 정책의 성패는 사회가 얼마나 받아들이고 함께 참여하느냐에 달렸어요. 그래서 독일에는 전문가들이 정책을 수립하지만, 수립 과정에서 시민 워크숍이나 시민 포럼 등의 행사를 통해서 시민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민들은 정부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려 하는지 자연스럽게 습득하기도 하죠.

제가 독일에 있으면서 연방교육연구부(BMBF, Bundesministerium für Bildung und Forschung)에서 하는 미래포럼(Zukunftsnacht)에도 참여해봤는데, 제가 참여했던 주제가 미래의 의료기술이었어요. 홀 중앙을 무대처럼 꾸며서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과 장관이 같이 앉아서 원탁 토론을 했어요. 그 주변은 마치 칵테일 파티처럼 테이블이 배치되어 초청받은 시민들이 자리를 잡고 토론을 듣고, 즉석에서 청중이 전문가나 장관에게 질문하기도 하고, 이슈와 관련된 질문에 청중 설문을 하기도 하더라고요. 딱딱한 분위기만도 아니어서 중간에는 래퍼가 나와서 미래의료와 미래 사회의 모습을 담아 랩 공연을 하기도 했어요. 단순히 어떤 정책이나 비전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사람들에게 더 친화적으로 다가가려는 표현방법도 다각적으로 고민하는 모습이 보였죠. 그런 모습들이 인상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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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미래포럼에서 원탁에 앉아 토론하는 전문가들과 이를 둘러싼 청중들. 요한나 방카(Johanna Wanka) 연방교육연구부 장관이 청중이 한 질문에 즉석에서 답하고 있다. 사진: 김연화 제공.

또, 제가 미래예측 부서에 있었다 보니 그쪽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는데, 독일에서는 미래 예측 보고서를 굉장히 잘 만들기로 유명해요. 기술과 사회의 발전 양상이 10-20년 뒤에 가져올 변화와 영향에 방점을 두고 전문가들이 연구를 진행해서 미래에 당면할 과제와 기회가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서술해요. 동시에 관련 이슈에 관해 시민참여 형태의 미래워크숍을 진행하면서 시민들은 그런 변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변화가 가져올 모습을 미래 시나리오로 작성하고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고, 미래 예측 보고서와 연계한 행사로 미래 기술 영화제(Foresight Filmfestival)도 매년 열고 시민 출품을 받는 등, 시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요.

또 매년 연방연구교육부에서 매년 주제를 하나를 정해 한 해 동안 그와 관련된 전시나 연구 행사인 과학해(Wissenschaftsjahr)를 진행해요. ‘과학호(MS Wissenschaft)’라는 커다란 배가 독일의 남쪽에서 북쪽까지 큰 강을 따라 운행하면서 도시마다 며칠씩 정박하면서 관련 전시를 해요. 몇 년 전 주제가 ‘도시의 소리’였는데 전국의 시민들에게 자신의 주변에서 녹음한 소리를 웹사이트에 올리게 했어요. 그리고는 수집된 자료를 이용하여 독일 전국의 소리 지도를 만들더라고요. 소음/소리와 관련된 전문가의 연구도 함께 진행되고요. 일종의 시민참여 과학연구였죠. 그게 실제로 연구 논문으로까지 연결되었어요. 이처럼, 사람들이 흥미를 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그것을 정책에 반영하려고 방법들이 인상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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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사진과 이어지는 사진) 거대한 홀을 가득 매운 청중도 마찬가지로 원탁에 앉아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과 즉석에서 논의할 수 있다. 정책입안자와 전문가들의 발표는 5분 미만의 짧은 동영상 발표로 마치고, 바로 각론을 토론한다. 사진: 김연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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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장 밖 공간에는 간단한 음료와 스낵이 준비되어 있어 사람들은 계속 교류와 토론을 이어갈 수 있다. 사진: 김연화 제공.

회로: 독일은 시민들과의 소통이 매우 활발하네요. 한국은 어떤가요? KISTEP에는 작게라도 그런 행사가 있나요?

연화: 한국도 정책을 발표할 때 공청회를 많이 해요. 공청회에서 정책 최종안을 시민들에게 발표하는데, 시민이 많이 오는 편은 아니에요. 홍보도 부족하고, 사실 온다고 해도 시민들의 의견이 정책안에 반영되기도 어려운 상황이고요. 우리나라는 오히려 시민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정부에 요구하기 위해 집회 등의 방식을 더 많이 사용하는 편이죠. 이런 이유로 공청회도 대개 수립된 정책을 발표하는 사후 공청회고요. 정책 수립 과정에서 어떻게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KISTEP에서는 기술영향평가에서 시민포럼을 진행하는 게 거의 유일한 시민참여였던 것 같아요. 선정 기술에 관한 신문기사나 관련된 이슈를 다루는 대중서, 알기 쉽게 설명한 글과 같이 일반인도 이해하기 쉬운 기술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고, 기술 및 관련 이슈에 대한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진 전문가 강연도 제공하면서, 포럼에 참여한 시민들이 기술에 대해 이해하고 서로 토론하게 해 시민들의 의견을 담아요.  최종 보고서에는 전문가 의견과 시민들의 의견이 함께 들어가 있어요. 이런 기술이 나왔을 때 어떤 방식으로 시민사회에 활용된다거나 어떤 식으로 기술 사용을 제한하면 좋겠다는 등의 제안이 같이 발간되기도 해요.

 

회로: 그렇군요. 이렇게 KISTEP의 외주 업무를 맡는 등 여러 활동을 하는 동시에, 배우자의 해외 포닥 기간 동안 주로 집에서 살림을 도맡고 보조자로서 역할도 하셨을 것 같아요. 이 과정에서 본인의 정체성에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연화: 배우자가 집안일을 많이 해서 살림을 도맡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살림에 책임감이 제게 더 크긴 했죠. 해외에 나간 첫해는 결혼하고 첫 집이라 집을 꾸미는 일이 재미있기도 했고, 독일어를 배우고 대학원 재학시절 진행했던 실험실 연구 논문을 쓰느라 바빠서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두 번째 해부터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조급해지더라고요. 둘이 같이 머무는 공간이니 집안일은 같이 해야 한다는 점에는 합의했는데, 주로 집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점점 더 집안일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집안일은 해도 별로 티는 안 나면서 은근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요. 청소 좀 하고 뭐 하면 제 일을 할 시간이 없더라고요. 집에서 포닥인 배우자를 서포트하면서 여유롭게 공부도 하고 개인 프로젝트도 진행하겠다는 계획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깨달았죠.

당시에 저는 스스로 전업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면서도 집에 있는 사람이, 일하고 들어오는 이에게 안락함을 제공하는 전통적인 아내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압박을 스스로에게 준 것 같아요. 집안일을 할 때는 내가 나의 커리어를 팽개쳐도 되나 싶고, 일이나 공부 중에는 배우자를 따라서 와서 도움은 주지는 못하고 이렇게 한량처럼 살아도 되나 싶더라고요. 집안일도 제 커리어 개발도 제대로 못 하는 상황에 매우 스트레스 받았었어요.

 

회로: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일이라고 하면 수입을 얻는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특히 집안일은 일이어도 불구하고 명함을 낼 수 없다 보니 고민이 되었을 것 같네요. 한국에 돌아오실 때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결론을 못 내리고 돌아오신 것인가요?

연화: 한국에 돌아왔을 때 엄청 우울했어요. 독일에서 이런저런 활동은 많이 했는데 어쨌든 이력서에는 몇 년이 비었으니까요. 독일로 떠나기 전에, 배우자도 서포트하고 나도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고 여러 사람에게 이야기했는데, 내세울 만한 나의 커리어가 없으니 배우자 따라 편하게 해외생활 하다 온 사람이 되더라고요.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미국에 있는 지인 부부를 만났는데 그 부부는 부인이 학업을 계속하고 남편이 아이를 키우며 부인을 서포트하는 부부였어요. 그 남편은 “저는 홈 메이킹(살림)해요.” 라고 당당하게 말을 하더라고요. 그때, 좀 다시 생각해보았어요. ‘이 남편분은 본인이 전업주부라는 것을 긍정하는데, 나는 왜 그것을 못 했을까?’ 어쩌면 주부 역할은 아내가, 경제활동은 남편이라는 전통적 성역할이 우리 사회에 있다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여성 가정주부는 전통적인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이 되어 별로 대단하지 일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역할이 바뀌어 남자가 주부 역할을 하면 대단하고 진보적인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 같았어요. 같은 일인데도 남자가 하느냐, 여자가 하느냐에 따라서 개인적, 사회적 인식이 다른 거죠.

당당하게 홈 메이킹을 한다고 말하는 지인 부부를 만나고 나서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홈 메이킹’을 달리 생각했어요. “내가 있어서 남편이 해외 포닥 생활에서 좋은 연구 결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요. 남편은, 제 덕에 해외 포닥을 나갈 수 있었고, 외로울 수 있는 해외 생활을 저와 함께해 안정감도 얻었으니까요. 해외에서 혼자 살면 한국어로 시원하게 의사소통하고 싶을 때가 간혹 있거든요. 특히 남편은 독일어를 못 해서 그런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제가 연구소에서의 고충을 들어주기도 했고, 반대로 제가 남편에게 전해준 독일 뉴스를 주제로 남편이 연구소에서 그와 관련하여 사람들과 대화할 수도 있었어요.

또 같은 화학전공자다보니 남편의 논문이나 발표에서 스토리를 리뷰해주기도 했어요. 실험스킬이나 자료 검토에서도, 세세한 내용은 잘 모르고 오히려 학부 수준의 화학 지식을 가진 사람이 봤을 때, 논문이나 발표가 연구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지, 연구 의의가 무엇인지 명료하게 드러나는지, 전체적인 논리가 납득할만한지 평가해 줄 수 있거든요.

당시 유행했던 게임인 포켓몬고(Pokemon Go)에서 빌려 와 저 스스로를 남편몬 트레이너라고도 불렀지요. 그동안 이런 지원의 가치가 인정되지 않아 아쉬워, 저라도 계속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제 덕에 배우자가 교수가 되었다고요.

 

회로: 유명한 과학자 중에 가족, 특히 아내의 역할을 다루는 책들이 있어요. 아인슈타인의 그림자 : 밀레바 마리치의 비극적 삶숙녀들의 수첩: 수학이 여자의 것이었을 때같은 책이요. 이런 책을 읽다보면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가족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돌아봐야 한다고 느껴요.

 다음으로, 한국에 돌아와 임신출산육아를 겪으시며 학업이나 직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해요. 아이가 없는 신혼부부에서 아이가 있는 가족이 되었는데, 삶이 어떻게 변했나요?

연화: 임신과 출산이 가져오는 변화는 가족 구성원 한 명이 늘어나는 것을 넘어서더라고요. 특히 임신과 출산을 하는 주체인 여성에게 가장 큰 변화가 나타나요. 크게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회적인 부분이에요.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 ‘임산부는 이래야 한다,’ ‘태교를 위해 동화책은 읽냐’ 등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고 강요되는 규범들이 있어요. 사회적 통념에 따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다가도, 제 고집 때문에 정말 아이가 안 좋은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기도 해요.

두 번째는 육체적으로 정말 많이 변해요. 배가 부르고 입덧하는 것을 넘어서서 모든 감각이 변해요. 한 예로 임신 전에는 향긋한 커피 한 잔에도 행복했는데, 임신하니 커피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려서 더 이상 작은 행복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체온이 살짝 높아지면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잘 집중하지 못하기도 하고요. 임신 전까지 제가 가장 익숙하게 사용했던 도구인 제 몸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었죠.

출산한 후로는 바깥에 잘 나갈 수 없게 되었어요. 저는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집순이’였어요.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결혼의 최대 단점이 남편과 계속 붙어 있어야 하는 점이라 생각할 만큼요. 지금은 24시간 눈을 떼지 않고 돌봐야 하는 아기가 있으니 잠시도 혼자 있을 수 없어 힘들어요. 게다가 고등의 언어를 쓸 수 없는 존재와 하루종일 함께하다 보니 언어와 사고가 단순해지는 것도 견디기 힘들고요. 그러다보니 학업과 연구는 전혀 못 하죠. 그나마 임신했을 때는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실험실에 출근해서 자료를 남기고, 장비들이 정비되는 것을 함께 관찰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마저도 못해요. 실험실은 계속 변하고 계속 움직이는데, 제 관찰은 이렇게 중단되어 있어 아쉬워요.

 

회로: 아이가 태어나면 활동에 얼마나 제약이 오나요?

연화: 사람마다 많이 다를 것 같아요. 어린이집에 100일 만에 맡기시기도 하고, 휴직했으면 1년 만에 복귀하시는 분이 많으니까요. 저는 프리랜서니까 직장을 다니는 분들처럼 육아를 전담하는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아요. 만약 기한이 정해져 있었다면 그 기간 동안 육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텐데, 육아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몰라 가끔 우울해요.

 

회로: 연화 님께서 느끼셨을 우울함에 정말 공감이 갑니다. 또 다른 질문으로는, 학부를 졸업하고 석사까지 마치신 대학(POSTECH)으로 돌아와서 학교의 내·외부자로서 본 학교의 혹은 한국의 전반적인 과학자 사회와 문화는 어땠나요? 문제의식을 갖게 된 부분이나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 있을까요?

연화: 처음에 돌아왔을 때는 좋았어요. POSTECH이 사실 예쁜 학교예요. 학생들은 입학식과 동시에 학교의 예쁜 풍경을 잊는데, 학부생이 아닌 특히 대학원생이 아닌 입장에서 보면 예쁘고 한적하고 좋아요. 건물보다 나무가 더 많은 베를린과도 비슷한 느낌이고요.

그런데 교수님들을 다시 뵈니까 대학원생일 때의 답답했던 감정이 확 되살아나더라고요. 제 배우자와 같이 한 교수님께 인사드렸는데, 교수님이 갑자기 제게 “너도 공부 잘했잖아, 그치?”라고 하시더라고요. 공부를 잘했는지는 둘째치고, 대학을 졸업한 지 꽤 지났는데 갑자기 대학교 때 성적이 소환되고, 저는 ‘공부 잘했던 학생’이거나 ‘못 했던 학생’이 되어야 했어요. 오랜만에 만난 제자와 접점을 찾고, 옛날 저를 좋게 기억해주시려 한 말씀이겠지만, 한편으로는 대학교 이후 제 삶은 지워지고 20대 초반의 학생으로, 다른 것도 아니고 성적으로 다루어져 불편했어요.

또 한 번은 교수님들께서 대화하시면서 ‘걔는 과학고를 졸업하고 똘똘해서 교수가 될 줄 알았어’라고 하시더라고요. 대학생 때에도 과학고 출신 학생과 일반고 출신 학생을 다르게 대하는 교수님이 많아 상처받았는데, 교수님들이 보는 관점은 여전히 좋은 학교 또는 특목고를 나왔는지, 학점이 좋은지, 연구에 매진했는지로 사람을 평가하시더라고요. 또 POSTECH이 소수정예라서, 교수님들이 학생들의 개인적인 부분까지 알게 되는데 개인적인 부분들도 모두 연구 활동과 연결해 평가해요. 답답하기도 하고 ‘내가 대학원생 때 이래서 힘들었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연구를 열심히 한다, 안 한다 평가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POSTECH처럼 연구와 생활이 분리되지 않고, 많은 학생이 가족과 떨어져 교내에 사는 환경에서, 그런 식으로만 평가된다면, 사람으로서의 다른 모든 특성은 지워져요. 그러니 연구 결과가 잘 나오지 않으면 스스로 인생이 루저라고 생각해버려요. 사실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요. 그래서 대학원생들이 우울해하기도 해요. 정말 문제에요.

 

회로: (인아)도 대학원에 와서 느낀 것이 있어요. 처음은 무슨 연구를 하는지를 묻다가도, 결국에는 그 연구를 어느 저널에 투고할지 묻고, 그 저널이 아는 저널이 아니라면 저널의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가 얼마인지를 물어보는 경우가 정말 많았어요. 연구 주제를 이해해보려 노력하기보다는 얼마나 유명하고 인정받는 연구인지에만 관심 가지는 것 같아요.

연화: 그래요. 제가 만난 대부분 과학자가 가장 기뻐할 때가 무슨 연구 하냐고 물었을 때였어요. 자신이 무슨 연구를 하는지, 자신이 어떻게 그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실험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얘기할 때 연구자의 얼굴은 정말 빛이 나요. 그리고 그런 연구 얘기하면서 서로 협력해 연구할 수 있을지, 혹은 문제를 다르게 접근할 수 있을 지 실마리가 나오기도 하더라고요. 평가 말고도 이야기할 주제가 더 많을 텐데 안타까워요.

 

(*) 임팩트 팩터는, 정해진 기간(보통 수 년)동안 해당 학술지의 논문들이 평균적으로 얼마나 자주 인용이 되었는지 나타내는 수치다. 임팩트 팩터를 기준으로 학술지의 중요도가 판단되거나 순위가 정해지기도 한다. 임팩트 팩터가 높은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은 많은 연구자에게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는 논문으로 여겨진다. 연구자를 평가하는 데에도, 임팩트 팩터가 높은 저널에 게재된 논문의 유무 및 편수가 중요하다.

 

회로: 상대방 그 자체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훨씬 좋은 것 같아요. 모르면 다시 물어봐도 좋고요.

연화: 그리고 POSTECH은 가족친화적인 면이 부족한 것 같아요. POSTECH 연구자 중 대다수가 포항이라는 타지에 와서 생활하잖아요. 연구자의 가족도 함께 타지에 와 있는데 가족들을 배려하지 않아요. 최근 과학자 혹은 연구자의 기본형으로 남성을 생각한다는 점이 지적되면서, 이를 개선하려 노력하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과학자를 미혼(혹은 비혼) 개인으로만 상정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연구에 삶을 다 바치라는 말이 나오죠. 그러면 그 과학자의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하죠? 반대로 가정을 꾸린 과학자는? 양육할 아이 등 돌봄이 필요한 가족이 있는 과학자는요? 이런 면에서 연구자 가족을 가족들을 배려하지 않아요.

 

회로(인아): 한국과학상자, 한국공학자상 시상식 일화를 들은 적이 있어요. 수상자 모두가 나이가 좀 있는 남자 교수님이었는데, 수상소감에서 모두가 아내에게 고맙다고,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집에서 도와주어서 고맙다고 말했어요. 사람들은 감동하는 분위기였지만, 전형적으로 남자는 나가서 개인적으로 사회활동하고 학문에 기여하지만, 여자는 집에서 도와준다는 모습이 짙게 보이더라고요.

회로(슬기): 학회가 가족 친화적인 면이 부족한가요?

회로(인아): 가족 친화적인 것이 거의 없다고 봐야죠. 학회를 리조트 같은 휴양지에서 할 때는 가족과 같이 가기도 해요. 그래도 엄마와 아이들은 따로 스키를 타러 간다거나 학회장에 애들을 데려갈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에요. 분위기도 그렇고요. 또 교수들은 저녁에 같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고 학술 교류를 중요시하다 보니까 같이 가도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는 어려워요.

연화: 말씀하신 것처럼 저녁이 문제예요. 가족 친화적이라는 건 단순히 가족을 동반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나머지 가족을 책임져줄 다른 가족이 있는, 주로 아내겠죠, 환경이 되지 않는 연구자는, 예를 들어 여성이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연구자는 학회 활동이 굉장히 제한돼요. 그런 면에서 가족친화적인 학회를 추구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열렸던 한 학회에서는 아이 돌봄 서비스가 함께 제공되었다고 들었어요. 마침 학회장 옆에 베이비페어가 있어서 인프라가 있기에 가능했다고는 들었지만요. 이런 배려가 늘어야 돌봐야 할 가족이 있더라도 마음 놓고 학회에 같이 가서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현재 육아와 동시에 독립연구자의 길을 걷기 위해 진행 혹은 계획 중인 일이 있는지 궁금해요. 그리고 계획을 실행할 때 어려운 점이 있으신가요?

연화: 지금은 육아만 하고 있고, 출산 전 기록들과 틈틈이 모은 자료를 인터넷에 올려보려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시간이 정말 안 나서 고민이에요. 아기가 잘 때 잠깐씩 시간이 나는데, 그 시간을 활용해서 밥을 먹고 씻다 보면 사용할 수 있는 자투리가 별로 없더라고요.

게다가 제 연구는 실험실에 가서 관찰하는 것이 주된 일이에요. 연구자들이 장비를 어떻게 다루는지, 실험을 어떻게 하는지를 직접 보면서 이야기를 들어야 해서 슬슬 아기와 함께 실험실에 가보려고요. 제가 보고 있는 실험실이 배우자의 실험실이다 보니 몇 번 데려가는 연습을 했는데, 아직은 아기를 수시로 보살펴야 하니 실험실에 가도 온전히 연구에 집중하기는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아이와 함께 실험실 관찰하는 방법을 찾고 있어요.

 

회로: POSTECH에서 일하거나 공부하며 육아하는 사람들에게 좋거나 나쁜 환경이 있나요?

연화: 좋은 점은 POSTECH 어린이집이 생긴 점이요. 만 1세부터 4세까지 입학할 수 있고, 오후 7시 30분까지 아이들을 돌봐 준다고 하더라고요. 어린이집이 끝난 후에는 연구할 수 없어 아쉬워하시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POSTECH 어린이집에 입학 인원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경쟁률이 엄청나요. 다자녀, 한 부모가 우선이고 그다음이 맞벌이, 외벌이 부부예요. 저는 독립 연구를 진행하다보니, 어딘가에 재직한 상태가 아니라 맞벌이에 해당하지 않아요. 딜레마예요. 재직 상태가 아닌 양육자는 아이를 맡기고 다른 일을 하기 어렵고, 우선순위에 들려 아이를 더 낳아야 한다니! (웃음)

또, 앞서 말한 연구자를 비혼인 개인으로 간주하다보니 교내에 아기나 엄마를 위한 공간이 전혀 없어요. 연구실에 아이를 데려가면 아기 기저귀를 교체할 수 있는 공간이나 모유수유실이 없어요. 미국에는 모유수유실이 없는 대학이 거의 없다더라고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대학을 목표로 하는 POSTECH이 이런 기본적인 시설도 없다다니 좀 충격이에요.

우리나라의 문제도 아닌 것 같아요. 요즘은 대부분 직장에 모유수유실 설치가 권고돼요. 심지어 고속도로 휴게소에도 모유수유실이 있어요. POSTECH은 학교면서 직장이잖아요. 덧붙이자면 POSTECH 캠퍼스는, 학교와 학생 및 교수의 주거공간이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교수아파트와 학생 기혼자 아파트도 있는데, 아이들과 가족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회로: 여기까지가 저희가 준비한 인터뷰 질문인데요, 마지막으로 오늘 인터뷰에 함께하신 소감과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연화: 최근에는 육아에 전념하다 보니 배우자와 아이가 어땠는지 이야기하는 것이 대화의 전부였었는데, 아이가 아닌 저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오랜만이라 너무 좋았습니다. 소중한 시간 만들어주셔 정말 감사드려요. 이번 인터뷰를 통해서 예전에 했던 일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정리하고 생각할 수 있었어요.

올해 계획은 실험실 고고학의 연구 결과물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 과정을 아이와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지, 동행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 볼 계획이고요.

연구실에 아기를 데려가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이렇게 학교와 연구실에 아이가 올 수 있을 더 많은 사람이 본다면,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너비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저만해도 학교 다닐 때는 학교에 아이가 있는 것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으니까요. 의식적으로 아이를 데리고 다니려고도 노력하고, 결국 아이와 ‘함께’ 제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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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전날 다른 곳에서 옮겨온 장비로 가득한 실험실에서. (2019. 6) 사진: 김연화 제공.

 

아이와 함께연구를 지속하고자 노력하겠다는 연화 님. 함께함의 가치를 아는 연구자로서, 자신의 연구를 소개하는 연화 님의 눈은 누구보다 반짝였다. 흔쾌히 자신의 세상을 공유해주신 연화 님으로부터 삶에서 온 배움을 우리의 세상에도 비추어볼 수 있었다. 연화 님이 선보일 실험실 고고학이 우리에게 또 어떤 세상을 보여줄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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