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베를린에서 다시 첫 발을 내딛다, 김무아

Feminist in STEM 페미회로인터뷰 프로젝트 025: 베를린에서 다시 첫 발을 내딛다, 김무아

2020년 페미회로의 첫 개인 인터뷰이는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부에서 석사를 졸업하고 베를린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하는 김무아 님이다. 김무아 님은 학부생 때 교환 학생으로 독일에 간 것을 계기로 페미니즘에 눈떴고, 친구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페스코 채식을 하게 된 페스코 베지테리언 페미니스트이다. 또한 베를린에서 갓 시작한 박사 과정에서는 전자공학과 머신 러닝을 접목한 연구를 시작하려고 하는 새내기 유학생이기도 하다. 무아 님이 베를린으로 떠나기 며칠 전인 201911, 두근거림과 기분 좋은 에너지로 가득 찬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어인 페미회로의 희수는 회로, 인터뷰이 김무아 님은 무아로 표기했다. 교정은 페미회로의 한솔, 발행은 페미회로의 배현주, 우연(이상 가나다순)이 맡았다.

 

(사진 중 일부와 무아 님의 마지막 답변은 베를린 유학 생활 중 보충되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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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여행을 즐기는 무아 님. 김무아 제공

 

회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무아: 안녕하세요, 저는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부에서 석사로 졸업하고, 2020년부터 베를린 공대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하게 된 김무아라고 합니다.

 

회로: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요청받았을 때 응할지 고민하셨나요? 어떤 이유로 인터뷰하게 되었는지도 궁금합니다.

무아: 처음에 인터뷰를 요청받았을 때는, ’제가 최고의 페미니스트도, 최고의 실력을 갖춘 연구원도 아닌데 감히 인터뷰해도 되나?’라는 생각에 고민했어요. 같은 분야 사람이 이 인터뷰를 보고 ‘얘가 뭔데 인터뷰를 해?’라고 생각할까 봐요. (웃음) 그렇지만, 제가 외롭고 힘들 때 페미니스트들의 인터뷰에서 많이 도움받았기 때문에, 저도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싶어서 인터뷰에 응했어요. 또, 독일에 유학 가는 사례가 드물어, 독일 유학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기도 했고요.

 

회로: KAIST 학부 때는 물리학과에서 전기 및 전자공학부로 전과하셨다고 들었어요. 원래 물리학과를 선택하셨던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무아: 어릴 때 자주 과학 잡지 『뉴턴(Newton)』을 봤고, 천문 캠프에 가서 별 보기를 좋아했어요. 자연스레 장래에는 천문학자가 되기를 꿈꾸었어요. 천문학자를 ‘우주의 신비’를 밝혀내는 멋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저에게 선생님이 물리학과에 가야 천문학을 공부할 수 있다고 해서 물리학과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교에 진학해서 공부해보니, 물리학과에 진학한다고 우주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실제로는 천문학자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적다는 것도 알았고,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이 제가 꿈꿨던 천문학과는 멀었어요.

 

회로: KAIST 물리학과에 원래 천문학 수업이 있나요?

무아: 없어요. 그래서 원래는 서울대 천문물리학부에 가고 싶었는데, 고등학교 선생님께서 ‘천문학자들은 보통 물리학과 나와서 천문학자가 되니까 물리학과에 가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KAIST에서는 장학금을 많이 주니까, 저도 그 점에 좀 더 이끌리기도 했고요.

하지만 학교에서 천문학 수업을 듣지 못하고 물리학과의 다른 수업만 듣다 보니 흥미를 잃었어요. 전과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어떤 과로 전과할까 고민하다 보니 전기 및 전자공학부가 잘 맞겠다고 생각했어요.

 

회로: 전기 및 전자공학부가 잘 맞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무아: 제가 별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신비한 것의 원리를 알고 싶다는 궁금증에서 시작했어요. 그래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신기한 전자 통신 기술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전기 및 전자공학부로 전과했어요. 수업을 들어보니 저에게 잘 맞기도 했고요.

 

회로: 그렇군요. 전기 및 전자공학부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석사 때는 정보 이론과 그 응용에 관해서 연구하셨는데, 이 분야를 간단히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무아: 정보 이론은 정보를 정확하고 안전하게, 효율적으로 통신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분야예요. 주어진 환경에서 부호가 달성할 수 있는 최적의 정보 전달 성능을 분석하고, 고성능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부호 체계를 고안해요.

성능에는 여러 척도가 있어요. 오류를 많이 정정할수록, 정확도가 같다면 전력과 채널 사용 횟수 등 자원을 적게 사용할수록, 고성능의 부호 체계라고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정보를 전달할 때 신호가 벽이나 장애물을 만나게 되면, 그 신호 중 일부분이 잘못 전달되거나 사라지는 오류가 생길 수 있어요. 오류를 많이 정정할수록, 정보가 도청되었을 때 정보를 많이 보호할수록 부호 체계가 고성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정보 보안을 위해 데이터를 전송할 때에, 입력된 정보를 그대로 보내지 않고 바꾸어서 보내기 때문에 도청되더라도 데이터가 그대로 드러나지는 않거든요.

 

회로: 그렇군요. 혹시 석사 때 하셨던 연구를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예시가 있으면 조금 더 이해하기 편할 것 같아요.

무아: 통신을 할 때,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그리고 그 둘을 중계하는 채널(channel)이 있어요. 우리가 컴퓨터나 휴대폰 메모리에 정보를 저장하는 사례에서는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메모리라는 채널을 통해 정보를 전달한다고 할 수 있어요. 통신 중 여러 가지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배터리가 방전되거나 저장소에 전류가 흘러들어와 저장된 정보에 오류가 생길 수 있겠죠. 이게 통신 과정 중 채널에서 발생하는 오류예요. 채널에서 정보에 오류가 생기는 다른 예시로는 USB 메모리를 떨어뜨려서 저장된 정보가 날아가거나 화장실에서 전화할 때 신호가 끊기는 일 등이 있어요.

저는 석사과정 동안 방금 설명한 부호 체계에 관한 이론을 분산컴퓨팅이라는 분야에 적용하는 연구를 했어요. 분산컴퓨팅 환경에는 일을 다른 컴퓨터들에 나눠서 시키는 마스터(master) 컴퓨터와 분배받은 일을 수행하는 워커(worker) 컴퓨터들이 있어요. 만약에 모든 워커에게 똑같은 양의 일을 서로 겹치지 않게 분배하면, 우리가 최종 결과를 받기 위해 모든 워커가 일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그런데 워커마다 마스터와의 거리나 자신의 하드웨어 성능에 따라 능력이 달라요. 각각의 워커가 일을 마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고 확률적으로 바뀌기도 하고요. 그런데 워커마다 일을 마치는 시간이 달라서 전체 과제를 마치는 수행 시간이 길어지는 걸 방지하고 싶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워커들에 일을 조금씩 겹치게 나누어주면 일부 워커가 일을 끝내지 않았더라도 전체 과제는 완성할 수 있어요. 일을 못 끝낸 워커를 오류가 일어나서 사라진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사라진 부분을 복원해 오류를 잘 정정할 수 있는 부호 체계가 있다면, 일부 워커가 일을 끝내지 못해도 전체 값을 얻을 수 있죠.

 

회로: 정리하자면 컴퓨터에게 일을 잘 시키는 방법을 연구하셨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무아: 네. 분산컴퓨팅에 오류를 정정할 수 있는 부호 체계를 적용하여 계산 속도를 최적화하는 연구라고 할 수 있겠네요.

 

회로: 그렇군요. 처음에 이 분야를 연구하겠다고 결심하신 계기가 있나요? 전기 및 전자공학부에도 다양한 연구 분야가 있을 텐데, 왜 이 분야를 선택했는지 궁금해요.

무아: 학부 때 들은 통신과 정보 이론 관련 수업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왜냐하면, 정보 이론은 하드웨어를 직접 다루기보다는 수학적인 모델을 다뤄요. 이론을 다루다 보니 실험 데이터를 다루는 분야보다는 결과가 명확하게 딱 떨어지는 분야라서 좀 더 흥미를 느꼈던 것 같아요.

학부 때 회로 설계 수업을 들었는데요. 저희 실험조가 디자인해온 회로도대로 회로를 만들어도, 저희가 예상한 결과랑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회로가 잘 작동하지 않아도 그 이유조차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게 저는 너무 답답했어요. (웃음) 그래서 이론적 해석을 적용해서 연구하면서도, 이론을 실용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연구실을 선택했어요.

 

회로: 전기 및 전자공학부라고 하셔서 아주 실용적인 연구를 하셨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론적인 분야에 가깝다는 말이군요?

무아: 네, 사실 전기 및 전자공학부가 취업이 잘 된다고 하긴 하는데, 제가 선택한 분야는 전자과에서도 이론적인 분야라 취업과 직접 연계가 되는 분야는 아니긴 해요.

 

회로: 물리학과에서 전기 및 전자공학부로 가셨는데도. (웃음)

무아: 네, 제 버릇 남 못 주고 (웃음) 흥미를 좇아가게 되었네요.

 

회로: 정보 이론 분야를 연구하면서 연구 안팎으로 힘들었던 점이 있나요?

무아: 실험하는 연구는 아니다 보니 다른 사람과 일정을 맞춰서 실험해야 하거나 꼭 연구실에 출근해야 한다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이 없는 점은 좋았어요. 실험 연구실에 다니는 친구들이 겪기 마련인 연구실 동료와의 생활에서 오는 문제도 거의 없었고요.

다만 처음에는 제가 생각한 통신 시스템 모델이 합리적이고 실제를 잘 반영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게 쓸모없는 연구일까 불안하기도 했어요. 그런 생각을 자꾸 하다 보면 동기 부여가 잘 안 되기도 하고요.

 

회로: 그렇군요. 박사 과정에서 하는 연구는 석사 과정에서 했던 연구와 관련이 있나요?

무아: 어떻게 보면 분야를 바꿔서 간다고 할 수도 있어요. 머신러닝이라는 새로운 도구로 정보통신의 보안을 강화하는 연구를 할 계획이에요. 머신러닝은 정확도를 잘 높이니까, 부호 설계에 머신러닝을 도입해서 보안을 강화하는 방안을 알아내고 싶어요. 정보 이론이라는 큰 주제는 가져가되, 사용하는 도구가 달라졌다고 할 수 있어요.

 

무아의 독일 박사 도전기

 

회로: 박사 유학을 준비하는 동안에 인턴을 독일로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어떤 계기로 인턴을 떠나게 되었나요?

무아: 제가 박사 유학 갈 때 생각했던 주제가 ‘정보 이론에 머신러닝을 도입해 얻을 수 있는 효과’이다 보니까, 유학 준비 기간에 머신러닝과 관련된 실무 경험을 쌓고 싶었어요. 학교에서 머신러닝 프로젝트 수업을 듣긴 했지만, 수업에서 배운 것을 실제로 써보는 경험을 하고 싶었거든요. 박사 유학을 준비 중이었으니까 준비 기간 6개월 정도 단기간에 프로그래밍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인턴 자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마침 독일에서 할 수 있는 하프 타임 인턴 중에 저에게 잘 맞는 자리를 찾았어요. 하프타임이니 박사 준비에 시간을 쓸 수 있는 인턴 자리이기도 했고요. 독일에서 인턴을 하면, 한국에 있는 것보다는 더 편한 교통과 마음가짐으로 유럽 대륙 대학원의 박사 인터뷰를 볼 수 있다는 점도 이점이었고요.

 

회로: 인턴 때는 어떤 일을 했나요?

무아: 인턴 중에는 머신러닝을 환경 분야에 적용하는 일을 했어요. 주어진 물질에 독성이 있는지 없는지 직접 실험하지 않고, 머신러닝으로 물질의 분자구조에서 독성을 예측하는 프로그램과 관련된 연구를 했어요. 직접 프로그래밍하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기존의 프로그램에 새로운 구조를 적용해 성능을 올릴 수 있을지 고민하기도 했고요. 아직은 머신러닝을 사용한 독성 예측 연구가 초기 단계라서 정확성이 높지는 않지만, 연구가 계속되어서 좋은 성과를 내면 직접 실험하지 않고도 독성을 예측하는 방법이 생기는 거예요.

 

회로: 그러면 많은 실험동물을 살릴 수 있겠네요! 아주 뜻깊은 연구네요. 무아 님은 곧 독일로 박사 과정 유학 가시는데요. 국내에서 공부를 이어갈 수도 있을 텐데 박사를 해외로 가야겠다고 생각하신 이유가 있나요?

무아: 아마 제가 한국에서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면, 높은 확률로 석사 과정 때와 같은 연구실에서 박사 공부를 했을 거예요. 저는 저희 연구실에 아주 만족해서, 좋은 교수님과 동료들과 함께 안정적인 환경에서 많은 지원을 받으면서 연구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부 학생들이 박사 졸업 후에 좋은 직장에 취직한다는 점도 장점이고요.

한국에서 KAIST 대학원생은 사회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아요. 저는 제가 놓인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렇게 안정적인 환경에서는 제가 그냥 현실에 안주할 것 같았어요. 물론 그런 환경에서도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저에게 좀 더 자극을 줄 환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해외 대학원을 고려했어요.

독일에 있는 대학원에 지원한 이유는, 독일의 대학원생 지원이 안정적이기 때문이었어요. 독일 대학원에서는 대부분 처음에 계약 기간과 월급을 포함하는 계약서를 쓰고 대학원 생활을 시작해요. 중간에 대학원에서 쫓겨나거나 월급이 변할 우려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점이 좋았고요.

또, 제가 페스코 채식을 하고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있으니 한국에서보다 독일에서 좀 더 자유롭겠다는 기대도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한국에서는 페스코 채식을 하면 사회 생활하기가 힘들고, KAIST는 워낙 작은 사회이다 보니 제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데 제약을 많이 느꼈거든요.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해외로 박사 진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페스코 채식: 육류는 먹지 않지만, 유제품과 동물의 알, 해산물은 먹는 유형의 채식

 

회로: 그렇군요. 그런데 해외로 박사를 진학하겠다는 생각이 쉬운 생각은 아니잖아요. 저만 해도 주변 친구들이 유학 가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해외 유학이라는 선택지를 꿈꿔보지도 않았거든요. 어릴 때부터, 또는 대학원을 진학하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해외 유학을 고려했던 건가요?

무아: 3년 전에 독일에 교환학생을 다녀왔는데, 그때 경험이 저에게 큰 충격을 줬어요. 그때 봤던 자료는 한국인과 독일인의 평균 노동 시간을 비교하는 자료였는데요. 비유하자면 한국인이 8월까지 일하는 시간과 독일인이 1년간 일하는 시간이 같다는 자료였어요(*).

제가 한국 연구실에서 박사로 졸업하면 높은 확률로 한국 기업에 취업할 텐데, 그러면 어떤 삶을 살지 눈앞에 그려졌죠. 독일에서 일하더라도 한국과는 다른 이유로 힘들겠지만, 그래도 독일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 생각을 처음 했을 때는 학사 졸업 직전이라 영어 성적이나 서류가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유학은 그냥 꿈이지’ 생각하고 자대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본격적으로 유학을 준비한 때는 석사 1년 차 끝날 때였어요. 익숙한 환경에서 1년 정도 대학원생으로 생활하다 보니, 현실에 안주하고 연구에 동기 부여도 잘 안 되던 상황이었어요. 또 이 즈음 페미니즘이나 채식과 관련해서 저의 사고방식이 많이 변해서,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물론 제 독일 교환학생 경험도 제가 유학을 선택하는 장벽을 낮췄던 건 분명해요. 확실히 대학교 생활 동안에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것이 졸업 후 자신의 미래를 상상의 폭을 많이 넓혀주는 것 같아요.

(*) 2014년 OECD의 ‘1인당 평균 실제 연간 근로시간’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 취업자들의 근로시간은 OECD 평균의 1.2배였고, 이는 근로시간이 가장 적은 독일의 1.6배에 이른다.

김윤구, 「韓 근로시간 OECD 2위…독일보다 연간 4개월 더 일한다(종합)」, 2015.11.02., 연합뉴스, 링크: https://www.yna.co.kr/view/AKR2015103104695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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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 반, 모두 떠나고 불이 꺼진 무아 님의 베를린 연구실. 한국의 다른 연구실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김무아 제공

 

회로: 그럼 박사 유학을 1~2년 정도 준비했다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식으로 준비했는지 궁금해요.

무아: 저는 미국과 유럽 대학으로 해외 박사를 같이 준비했어요. 대학마다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다르니까 서류 말고 제가 따로 준비했던 걸 말해볼게요. 해외에 박사를 지원할 때에는 조교 활동도 이력서에 쓸 수 있어서 전보다 조교 활동에 활발히 참여했어요. 대학원생 대상으로 아헨 공대에서 서머스쿨을 열곤 하는데, 그 활동에 참여하는 등 해외 대외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고요.

아헨 공대에서 열렸던 서머스쿨은 IDEA League라는 대학 연합에서 주최하는 연례행사고, 그해 주제는 future urban mobility(미래 도시를 위한 교통)였어요. 현재 산업체와 학계에서 보는 미래 도시 교통수단의 발전 방향과 풀어야 할 주요 과제 등을 주제로 한 강의를 듣고, 기업과 연구소를 직접 방문하여 현재 기술 수준을 체험했어요. 서머스쿨 마지막에는 일주일간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주요 과제 해결을 위한 솔루션을 제안하는 학제 간의 조별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제가 만약에 국내 대학원에 진학한다면, 출신 대학의 ‘수준’이 사실 많이 반영돼요. 또 저는 자대 대학원에 진학했으니까 자대 진학에서 오는 이점도 있었을 거고요. 그런데 해외 대학원에 진학하려면 이런 이점이 많이 줄어요.

그래서 객관적인 성과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해서, 대학원 진학 시기에 맞춰서 학회에 제출할 수 있도록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어요. 결과적으로는 미국 대학원 지원 시기에 맞추는 데는 실패했지만, (웃음) 나중에 유럽에 있는 대학원에 지원할 때에는 그 결과를 갖고 지원할 수 있었어요. 저널에 낸 논문은 아니었고 학회에 낸 논문이긴 했지만, 그래도 제 능력과 관심사를 보여줄 수 있는 객관적인 성과를 갖고 있다는 게 합격에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페스코 베지테리언 페미니스트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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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무아 님과의 만남. 사진: 페미회로 제공.

 

회로: 무아 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해외 박사 지원에 채식과 페미니즘도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어떤 계기로 채식과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페미니즘에 관해 먼저 이야기 나눠볼까요?

무아: 저한테는 독일 교환학생이 정말 큰 계기였어요. 제가 교환학생을 다녀온 게 2016년이었거든요. 2016년은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리부트되었다고 할 정도로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던 해잖아요. 예전에도 여성으로서의 삶에 뭔가 불편함을 느끼곤 했지만, 그때는 그게 저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016년을 거치면서 제가 갖고 있던 불편한 감정에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죠. 독일에서 새로운 환경 아래 교환학생으로 지내다 보니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할 때와는 다른 점들을 느꼈어요. 한국 캠퍼스에서는 여학생들이 꾸며야 한다는 압박이 있고, ‘인기 많은 여학생’이 소비되는 방식이 있어요. 겉으로는 ‘인기 많은 여학생’을 높이 사주는 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깎아내리는 식으로요. 그런 게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공대니까, 남초 사회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환경에서는 그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가 느끼던 문제점이 어떤 환경에서는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저와 제 주변도 달라질 수도 있겠다고 느끼니까 페미니즘에 좀 더 관심을 가졌어요.

또 제가 다닌 KAIST는 워낙 좁은 사회여서 SNS에 글을 쓰는 것도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야 했어요. 페이스북에 글을 쓰고 밖에 나가면 제 페이스북 친구들을 마주쳐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독일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는 동안은 저를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은 사회에 있으니 SNS에 글을 쓰는 것도 훨씬 자유롭고 부담도 덜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독일에 있을 때는 페이스북에 자주 페미니즘 글을 공유하거나 제 생각을 쓰곤 했어요. 예를 들어 데이트 폭력 피해 경험을 공유했을 때 안전하지 않은 이별을 자신도 경험한 적이 있다고 여러 친구가 공감해주기도 했어요. 제가 올린 글에 친구들이 댓글을 달아주면 ‘역시 나의 경험이 단순히 나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많은 여자가 겪는 일이구나’라는 생각에 페미니즘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죠

 

회로: 그렇군요.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해서 많이 공감돼요. 저도 무아 님과 비슷하게 외부와 교류가 적은 공대에서 학부를 졸업했는데, 학교에서 생활하는 동안은 SNS 활동도 자유롭지 않았고 내 생각을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드러내기 쉽지 않았어요. 2016년은 많은 변화가 일어난 해이자 갈등이 첨예하게 치닫던 때이기도 해서, 공개적으로 내 의견을 드러내기엔 용기가 필요했던 때였어요.

 저도 페미니즘에 관해 자유롭게 드러내어 이야기하기까지 변곡점이 몇 번 있었어요. 휴학했거나 교환학생을 가서 제가 기존의 인간관계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좀 더 용기 내서 말할 수 있었어요. 한 번 그렇게 용기를 내고 나면 아무래도 좀 더 자신감을 갖고 말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내가 어느 공간에 놓여있느냐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무아: 맞아요. 그래서 저한테는 그 시간이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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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쌀국수를 먹는 무아와 베를린의 다양한 비건 친환경 제품들. 사진: 김무아 제공

회로: 채식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저도 주변에 채식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무아 님이 페스코 채식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무아: 저도 주변에 채식하는 친구 덕분에 채식에 관심을 갖고 시작했어요.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채식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좋게든 나쁘게든 채식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어요. 그 친구를 보고 ‘채식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어요. 그 친구와 시간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제 식생활도 돌아봤어요. 저도 예전에는 고기를 즐겨 먹었지만 고기를 생산하는 방식을 알고 나니까 동물을 착취하면서까지 고기를 먹고 싶지는 않았어요. ‘안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하고 처음 시도하고 나니까 저에게 잘 맞았고, 자연스럽게 페스코 채식을 시작했어요.

 

회로: 그렇군요. 비장하다기보다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시작하신 것 같아서 저도 페스코 채식을 시작해보고 싶네요. 페미니즘이나 채식과 관련해 활동하기도 했나요?

무아: 처음에 채식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제 생각이 정립되지 않아서 어떤 활동이나 운동에 참여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처음 세웠던 기준은 “내가 이 식재료를 직접 가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동물은 직접 도축할 수 없을 것 같았고, 생선은 손질하면서는 큰 거리낌을 못 느껴서 페스코 채식을 선택했죠.

 

회로: 그것도 운동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무아: 그렇죠?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저보다 먼저 페미니즘이나 채식에 관심을 가진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제 생각을 정리하거나, 추천받은 책을 읽기도 했어요. 이슈가 있으면 기사를 찾아보고 공유하면서 제 생각을 SNS에 쓰기도 했고요.

그런데 페미니즘에 관한 글을 쓰면 페미니즘과 관련 없는 글에 비해 반응이 현저하게 적고, 대다수 사람은 제 생각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가끔은 ‘이게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전혀 의미 없지는 않았던 게, 주변 친구들이 제 SNS에 반응을 직접 남기지는 않더라도 나중에 연락해 ‘네가 올리는 페미니즘 글을 관심 있게 봤다’고 말하곤 했어요. 어떤 친구들은 자신의 경험을 나눠주면서 저에게 힘을 주기도 했고요.

제가 이렇게 드러내놓고 SNS에 글을 쓰다 보니까 카이스트 여성주의 연구회 〈마고〉(*)에서 활동하는 친구가 〈마고〉를 소개해주기도 했어요. 주로 페미니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라면서요. 저도 석사 공부 중에 활동에 참여했어요. 대학원생이 시간을 내어 그런 모임에 참여하기 쉽지 않지만, 저 혼자 책이나 기사를 읽고 생각하는 것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채우고 싶어서 참여했어요. 페미니즘 이슈와 관련해서 마음 편히 이야기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책을 읽고 의견을 교류하는 활동 말고도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고, KAIST 인권 주간에 참여했어요. 또 〈마고〉 회원들과 2018년에 열렸던 혜화역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나 낙태죄 폐지 시위 〈낙태죄, 여기서 끝내자〉(***)에 참여하기도 했고요.

대부분 시위가 서울에서 열리다 보니 대전에서 학교에 다니면서 그런 시위에 가기 쉽지는 않았어요. 2019년에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왔을 때는 정말 뛸 듯이 기쁘고 자랑스러웠어요. 낙태죄 폐지 시위에 참여했지만 낙태죄가 폐지되리라고 확신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실제로 헌법불합치 판결이 났고, 저의 시위 참여와 목소리를 높여 외친 구호가 판결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자랑스러웠죠.

(*) 카이스트 여성주의 연구회 〈마고〉는 KAIST의 여성주의 단체이며, 페미회로와도 연대를 맺고 있다.

(**) 2018년 5월부터 12월까지 총 여섯 차례 열려 사회에 만연한 여성 대상 범죄를 규탄한 시위.

(***) ‘모두를 위한 낙태죄폐지 공동행동’이 주최해 2018년 7월 7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시위.

 

회로: 대전에서 공부하면서 서울의 시위에 참여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이건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이 느낄 것 같아요. 저도 지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니는데, 서울과 지역의 인프라 차이가 너무 심해서 깜짝 놀랐거든요. 제가 지역에서 살 때에는 내가 서울의 페미니즘 이슈를 따라가는데 허덕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지역에는 지역만의 이슈가 있는데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을 모으기엔 서울처럼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지 않아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요.

무아: 그렇죠. 2016년 이후에 페미니즘 이슈로 열린 대부분의 시위도 서울에서 열렸어요. 서울에서는 지하철이나 버스만 잠깐 타고 가면 들을 수 있는 페미니즘 강연이 많지만 지방에서는 강연도 자주 열리지 않고요. 페미니스트가 모일만한, 페미니즘 이슈를 수용할만한 공간도 많지 않고요.

그러나 대전에는 대전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 문화기획자 모임 〈보슈(BOSHU)〉(*)가 있어서 큰 힘이 돼요. 〈보슈〉는 정말 대전의 빛과 소금이라고 할 수 있죠. 저는 〈보슈〉에서 여는 페미니즘 강연에 참석하기도 하고, 주짓수 원데이 클래스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보슈〉와 〈마고〉가 함께 진행하는 여자 축구팀 <FC우먼스플레잉>에서 여성들과 함께 축구를 하기도 했고요. 저는 〈보슈〉에서 열었던 많은 행사나 기획에 정말 열심히 참여했기 때문에, 석사 졸업하고 서울 집에 돌아왔을 때는 오히려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 대전의 페미니스트 문화기획자 모임 〈보슈(BOSHU)〉는 동명의 페미니즘 잡지를 펴내고 있으며 그 외에도 여성 주짓수팀을 운영하고 페미니즘 글쓰기 강의, 여성 운동회, 여성 연기 원데이 클래스 등을 주최했다. 지난 2018년 12월에는 〈페미회로〉가 〈보슈〉와 〈마고〉가 함께 운영하는 여자 축구팀 〈FC우먼스플레잉〉의 인터뷰를 발행하기도 했다.

 

회로: 페미니즘과 관련해 요즘 관심을 가진 주제가 있으신가요?

무아: 최근에 영화 <82년생 김지영>과 <벌새>를 봤어요. <벌새>에서 주인공 가족은 엄마, 아빠, 세 남매로 이루어진 평범한 정상가족인데, 너무나 일반적이지만 사실은 폭력적인 언행이 많은 가족이에요. 정말 서로를 아껴서 가족인 것이 아니라, 가족이 되었으니까 관계에 문제가 생겨도 그냥 계속 같이 살아가는 모습이었어요. 제가 꾸리고 싶은 가족은 이런 모습은 아니어서 가부장제 아래 정상가족 문화의 대안은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몇 년 안에 저도 ‘결혼 적령기’에 들어갈 텐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꿈꾸는 미래가 꼭 결혼이어야 하는지, 저는 어떤 가족을 꾸릴지 고민이에요.

 

회로: 저도 두 영화를 모두 봤는데요. 말씀하신 것처럼 두 영화의 절묘함은 그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이 사실 최악의 가족이 아닌 평범한 가족이라는 데에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점에서는 부러워할 만한 가족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런 평범한가족이 사실 어떤 구성원에게는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 그렇게 가족 내 폭력이 개인을 잠식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그 두 영화가 잘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무아: 저는 그 두 영화를 보면서, 사회가 견고하게 맞춰 들어간 구형 퍼즐과 같다고 생각했어요. 한 조각 한 조각이 너무 견고하게 맞춰져 있어서 한 조각을 빼면 모든 것이 다 무너져버리는 퍼즐이요. 사회가 한 조각 한 조각이 다 맞물려 있다 보니 잘못된 점을 발견하더라도 그걸 지적하거나 거부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회로: 이제 인터뷰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네요. 무아 님의 인터뷰에서 공감되는 점이 많았어요. 페미니스트로서 마주하는 현실이 늘 행복하지만은 않지만 우리는 자신의 일상을 소중히 잘 꾸려나가고 싶잖아요. 페미니스트가 자신의 삶을 즐겁게 꾸려가려면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요. 무아 님은 주변 사람들과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시는 편인지 궁금해요.

무아: 제가 2017년부터 SNS에 페미니즘을 비롯해 제 생각을 자유롭게 밝히고 난 후에는 기존의 인간관계가 한 번 완전히 끊겼어요. 그러다가 마음 맞는 사람이 하나둘 모이면서 인간관계가 완전히 새로워졌는데, 지금은 제 주변에는 저와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이 남았어요. 구체적인 이슈에는 각자의 입장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원론적인 문제의식은 대체로 저와 같아요.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아는 사람 누구를 만나더라도 20~30분 정도만 지나면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웃음)

또, 저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을 처음으로 말하기 시작했을 때는 저와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적극적으로 설득하려고 하거나, 친구들을 만나서 페미니즘 이슈로 많이 이야기했어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니까 제가 설득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과거 저 자신을 되돌아보면, 지금은 제 생각이 달라지기도 했으니, 제 생각이 반드시 옳다고 여기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요. 변화를 만들려 현실에 부딪칠 때는 자신의 신념에 확신을 가져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내가 종종 틀릴 수 있다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지속 가능한 페미니즘 운동을 하려면, 꾸준히 이야기하는 페미니스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인터뷰 며칠 뒤, 예정대로 무아 님은 베를린으로 떠났다. 무아 님이 베를린에서 유학 생활한지 세 달 정도가 흐른 뒤, 무아 님이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인터뷰 끝인사를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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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님의 베를린 연구실 출근 첫날, 무아를 반기는 메시지. 사진: 김무아 제공

 

회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주세요.

무아: 제가 유학을 준비할 때, 선배나 교수님들이 ‘가장 중요한 건 연구이니까 유명한 학자가 있고 랭킹이 높은 학교에 가야 한다’고 많이 조언해주셨어요. 그런데 사실 저한테는 연구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니었어요. 연구 실적이 좋은 학교에 가면 저도 좋겠지만, 저에게는 연구 말고도 근로 문화나 지역 사회의 분위기 등도 중요했거든요. ‘연구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 중에는 제가 유학을 원하는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도 많았어요. 더 유명하고 랭킹이 높은 학교로 가지 않으면 그냥 KAIST에서 계속 박사를 하는 게 나을 거라고요. 그래서 계속 스스로를 의심했던 것 같아요. ‘내가 괜히 헛바람이 들어서 시간이랑 돈을 낭비하는 건 아닐까? 어딜 가나 다른 방식으로 문제가 있는데 도피하듯이 유학 가는 건 아닐까?’하고요.

그때 “그 사람들이 네 인생을 대신 살아줄 것 아니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결정해”라는 친구의 말이 참 용기가 되었어요. 저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한테 조언을 받을 때는 그 조언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느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사실 그분들도 각자의 가치관이 있는 개인이더라고요. 저와 가치관이 다르면 아무리 대단한 분의 조언이라도 와닿지 않고요. 그때 무엇보다 힘이 되었던 건 많은 사람이 가지는 않는 자기만의 길을 가는데도 잘 지내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었어요. 저도 베를린에서의 박사 생활이 전반적으로 만족스럽고 후회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 인터뷰도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그런 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이후 꽤 시간이 흘렀지만 무아와 나눈 이야기는 계속해서 힘이 되어 주었다. 그와의 인터뷰 이후 서툴게나마 페스코 채식을 시작했고, 다른 곳에서 나의 삶을 꿈꿔보는 일도 잦아졌다. 그가 주변에서 힘을 얻어 조금씩 변화했듯이, 나 또한 변화했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변화의 씨앗이 될 것이다. 누군가를 변화하게 만드는 선한 영향력이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인터뷰 내내 그에게 감돌았던 따뜻하고 희망찬 에너지가 그에게 가득하길 바라며, 베를린에서 첫발을 내디딘 그를 힘차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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