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minist in STEM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 021: 젠더와 과학기술정책의 접점을 고민하는 연구자, 우지수
햇볕이 따뜻한 어느 초 가을날, 페미회로는 서울의 한 카페에서 과학기술정책 연구자 우지수님을 만났다. 우지수 님은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 진학하여 젠더와 과학기술정책의 접점을 연구하고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이화여대 재학 당시의 총학생회 및 총학생회장 재직 경험, 여자대학교에서 남초 사회로의 이동, 그리고 새로운 길인 과학기술정책으로 발을 딛는 과정을 들어보았다. 우지수 님의 독특한 경험이 여성과학기술인정책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정책 전반을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고민하는 데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함께 알아보자.
인터뷰어인 <페미회로>의 우연과 희수는 ‘회로’로, 인터뷰이인 우지수 님은 ‘지수’로 표기했다. 교정은 <페미회로>의 한솔, 발행은 <페미회로>의 배현주, 우연(이상 가나다순)이 맡았다.
회로: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지수: 안녕하세요, 저는 2019년부터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우지수입니다. 학부 때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철학을 전공했습니다. 젠더, 경계, 정체성, 기술과학(technoscience)(*)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데요, 최근에는 여성과학기술인 정책을 보기도 하고,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의 철학적인 담론을 살펴보기도 합니다.
(*) Technoscience는 과학기술학자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에 의해 제시된 개념으로, 과학(Science)과 기술(Technology)이 분리되어 있다기보다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회로: <페미회로>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인터뷰를 요청받으셨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어떤 이유로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지수: <페미회로>는 올해 KAIST에 진학하고 알았습니다. 제가 관심 있는 분야인 이공계 내 여성 문제를 다루는 단체에서 저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다니 기뻤어요. 인터뷰를 처음 요청받았을 때는 제가 대학원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금 주저했어요. 아직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아,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했거든요. 하지만 제 이야기가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은 설득의 연속이었다.”
회로: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먼저 지수 님의 학부 시절 얘기부터 시작해보려 합니다. 지수 님은 2017년도 제49대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하셨는데요. 총학생회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일은 무엇인가요?
지수: 총학생회장으로서 진행했던 일 중 학내 사안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총장 직선제 선거(*)였습니다. 직선제는 전국 최초였고, 해외에서도 사례를 찾아보기가 힘들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쉬운 점도 있지만, 대학에서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시도할 수 있던 기회가 제 임기 중에 있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총장 선거 당일에 학생들이 ECC(이화 캠퍼스 복합단지. 이화여대의 중심부에 위치)에서 길게 줄 서서 투표를 하던 모습, 밤늦게까지 학생, 교직원, 교수들이 모두 모여 개표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태 이후 이화여대 학생들은 학사 비리에 맞서는 시위를 진행했고, 이후 이화여대 학생들은 총장 직선제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결국, 2017년 5월 전국 대학 최초로 학생, 교수, 교직원, 동문이 모두 참여하는 총장 직선제 선거가 시행되었다. 당시 학생들은 다른 구성원들과 같은 투표 비율 반영을 주장했지만, 최종적으로 결정된 학생 투표 반영 비율은 8.5%였다.
출처: 박현철, 「대학가에 부는 총장 직선제의 바람」, 2019.05.20, 숭대시보, 링크: http://www.ssu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7170
회로: 그렇군요. <페미회로> 회원들이 공부하는 다섯 개 과학기술중점대학교는 각 지역에 있어 학교 간 연대가 쉽지 않고, 같은 지역에 있는 학교와도 활발히 고민을 나누기 쉽지 않은데요. 이 점에서 총학생회의 형태나 업무에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화여대의 총학생회나 동아리는 어떤 식으로 연대하고 함께 고민을 나누는지도 궁금해요.
지수: 학교 밖 연대 사안으로는 <전국대학학생회 네트워크 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어요. 2016년도 입학금 폐지와 관련해서 많은 대학의 총학생회장단이 연대하고 함께 일을 추진해본 경험으로 신뢰를 다져왔고, 그해 연말에 국정농단 이슈와 관련해서도 여러 대학이 함께 연대한 경험이 있었어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대학 네트워크를 만들어보자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새로운 연대체를 만들기로 한 거죠. 2016년도 촛불 시위가 ‘우리도 무언가 바꿀 수 있다’는 경험을 가져다준 것도 이런 움직임에 한몫했다고 생각해요.
회로: <전국대학학생회 네트워크>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나요?
지수: 2017년도에 이화여대, 고려대, 한양대 총학생회장이 모여 <전국대학학생회 네트워크 준비위원회>를 공동으로 출범하고 다른 대학 총학생회 대표자들에게 연락하고 만나기 시작했어요. 2017년 상반기에는, 제일 큰 사안이 19대 대선이었기 때문에, 후보들에게 대학생들의 요구를 정리하여 발송한 것이 주된 활동이었어요.
저희가 준비위원회로서 했던 일은 <전국대학학생회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주제로 토론하면서 정당성을 확립하고 운영 세칙을 만드는 등 기반을 다진 일이에요. 왜 새로운 네트워크가 필요하고 그 네트워크는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장기적인 계획을 구상한 거죠. (*)
(*) <전국대학학생회 네트워크>는 준비위원회를 거쳐 2019년 발족했다.
회로: 학내 사안과 학외 사안 중 무엇에 좀 더 초점을 두고 총학생회의 자원을 사용할지도 고민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지수: 둘 다 중요하기 때문에 둘 중 무언가에 좀 더 초점을 두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안이 있을 때마다 할 수 있는 만큼 했죠. 학내 사안 대응은 학생회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고요. 학외 사안에도 신경 썼어요.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하는 발언과 행보는 늘 한국 사회의 항상 주목받아와서요. 특히 2016년~2017년도에는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더 주목을 받기도 했고요.
회로: 방금 말한 것처럼 특히 지수 님이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주목을 많이 받았을 것 같습니다. 저도 당시에 이화여대 학생회를 인상 깊게 보았던 기억이 나고요. 그만큼 부담감도 크셨을 것 같은데요, 학생회장으로 활동할 때 무엇이 가장 힘들었나요?
지수: 모든 대표자가 그러겠지만, 많은 사람을 대표한다는 점이 가장 부담됐어요. 스스로는 제가 얼마나 부족한지 아는데, 공식 석상에서는 부족함을 숨기고 강하게 보여야 하니까요. 결국 제가 감당해야 할 문제라 생각했어요. 당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은 적은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꽤 부담됐어요.
회로: 지수 님이 총학생회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지수: 저는 인생을 계획적으로 사는 편은 아니에요. (웃음) 어쩌다가 1학년 때 총학생회 집행부를 시작했어요. 처음부터 특별한 결심과 포부가 있지는 않았어요.
회로: 그렇군요. 총학생회장이 되었을 때 몇 학년이었나요?
지수: 5학년… 학생회를 하니까 학교가 6년제로 바뀌더라고요. (웃음) 3학년 때에는 자연대학 학생회장을 했어요.
회로: 총학생회장으로서의 경험은 지수님에게 어떤 기억인가요?
지수: 총학생회장을 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고, 많은 사람에게 감사해요.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고 학생들의 지지와 신뢰로 가능했던 자리니까요.
대표자로서 활동하면서 ‘내가 지금 누구를 만나더라도 할 말이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총학생회장이었던 때에는 지금 당장 대통령, 대학교 총장, 교수를 만나도 공적으로 말할 거리가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대표자로서 누군가를 설득해야 할 일이 많은데요. 누구를 만나서 대화를 하고 내 의견을 설득해볼 기회가 많아 정말 값진 시간이었어요.
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친구들에게 “내 인생은 설득의 연속이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해요. 어떤 의제에 관해 사람들과 토론하고 합의 보는 경험이 많아 저 개인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어요.
회로: 인생이 설득의 연속이었다니, 참 멋진 말이네요. 저(우연)는 지수 님이 대표자로서의 경험을 많이 해본 게 부럽기도 해요.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대표자가 되는 경험을 갖기가 쉽지는 않잖아요. 저는 학과 학생회장을 한 적이 있는데, 당시 학과회장 11명 중 2명만 여자여서 아쉬웠어요.
지수: 여성들이 대표자가 되는 경험을 갖기가 보통은 쉽지 않죠. 제가 이화여대라는 특수한 환경에 있어서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이화여대에서는 꼭 대표자가 아니어도 스스로 주체가 되어보는 경험을 모두가 할 수 있어요. 무언가를 선택하거나 결정할 때 지정 성별로 인한 고민이 없이 진짜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 여자 대학의 가장 특별한 점 중 하나인데, 실제로 그 점이 많은 학우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요. 사회에서는 이런 경험들을 갖기 쉽지는 않으니까요.
회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저(희수)도 생각나는 일화가 있어요. 작년에 이화여대에서 한 여성 과학자의 강연을 들었는데요. 강연 못지않게 강연장의 분위기가 기억에 남아요. 당시 강연장의 청중 대부분은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전공하는 이화여대 학생이었는데, 비슷한 것을 공부하는 여성들이 이렇게나 많고 함께 강연을 듣고 있다는 게 정말 기쁘고 인상 깊었어요. UNIST에서 공부할 때는 늘 수적으로 남성이 많은 자리에서 생활하는 게 당연했는데 ‘내가 만약 이런 환경에서 공부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학부 생활
회로: 학부 때 물리학과 철학을 전공하셨습니다. 어떤 계기로 물리학과에 진학하게 되셨나요?
지수: 저는 일반 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이과에 진학한 대다수 여학생이 과학 선택 과목으로 생물2를 선택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물리2를 골라서, 한 반 30~40명 정도 중에서 여학생이 7명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남학생인 참사가 일어났어요. (웃음) 어쨌든, 그때 물리를 재미있게 공부해서 물리학과에 진학했어요.
회로: 보통 물리학과는 자연과학대학 중에서도 특히 ‘남초과’로 알려져 있고, 물리학 자체도 전통적으로는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져 왔는데요. 이화여대의 물리학과는 여학생들만 공부하다 보니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을 것 같아요. 직접 이화여대 물리학과에서 공부하신 경험은 어땠나요?
지수: 이 질문을 듣고서야 생각해봤는데, 저는 학교를 다니면서 물리학과가 남초과인지 아닌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이화여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자대 교수가 되신 분들도 많이 봐왔기 때문에, 물리학자로서의 진로도 낯설지 않았고요.
회로: 지수 님의 말씀이 다른 의미로 충격이네요! 저희는 물리학과가 당연히 남초과라고 생각했고, 관련해서 어려움을 겪거나 기억나는 일화가 있는지 물어보려 질문을 준비했거든요. 저번에 당근님 인터뷰(*)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랬고, 저희 주변 사례만 들어봐도 물리학과는 남학생이 월등히 많은 과이에요.
지수: 지금 생각해보니 저는 학부 때 남학생들의 존재 자체를 크게 인식해보지 않았어요. 남자 화장실이란 게 학교에 있는지도 잘 몰랐죠. (웃음) 우리가 여성으로서 이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은연중에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이 결정을 부추기거나 망설이게 하는 요인일 수 있는데, 이화여대에서는 내가 여성이라는 점이 선택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여대의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아요.
회로: 그럼 철학을 복수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지수: 물리학에 흥미를 잃고…(웃음) 철학을 복수전공하게 된 거죠. 고등학교 때부터 마음 한 켠에서는 늘, 인문계 공부를 해보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너희가 글을 잘 쓰려면 좋은 글을 봐야 한다’며 사비로 <한겨레21>을 구독해 주셨어요. 심심할 때마다 <한겨레21>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회 이슈에 관심을 갖게 되더라고요. 비판적으로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대학에 와서 인문사회계열 쪽 복수전공을 고민하면서 철학과와 사회학과 개론 수업을 들어 보았는데, 철학이 더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철학과를 선택했어요. 한편으로는 종합대학을 다녀서 이런 고민을 할 수 있었기에 감사하기도 해요.
회로: 철학 수업은 보통 어떻게 진행되나요? 과학기술중점대학교의 사회학이나 철학 교양 수업에서는 젠더 이슈를 다루지 않거나, 다루더라도 보통 한 주의 주제 정도로 다루고 넘어가는 편이에요. 그런데 이화여대에 철학과에서는 무려 『여성주의 철학』과 같은 과목이 개설된다고 들었어요.
지수: 말씀하신 대로 철학 전공 수업 중에 『여성주의 철학』이라는 수업이 있어요. 한 학기 동안 주디스 버틀러(미국의 저명한 페미니스트 철학자. 젠더 이론, 퀴어 이론 등에 영향을 줌)만 주구장창 읽는 수업이에요. 주디스 버틀러를 다루니까, 주로 경계와 퀴어 이론을 주제로 토론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재미있는 게, 모두 같은 의견을 갖고 토론했어요. (웃음)
조별 토론을 해도, ‘섹스도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젠더의 경계가 임의적이다’라는 주제로 이야기 나눠보면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어요. 다른 주장을 설득하는 토론이었다기 보다는, 각자의 생각을 발전시키는 토의였죠. 드랙(*)이나 퀴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었는데, 의견을 개진하다가 자신이 퀴어라고 밝히는 분도 있었어요. 그 장소가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말씀하셨겠죠. 교수님들 또한 인권 감수성이 높아서, 누군가를 배제할 수 있는 용어는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시죠.
(*) 생물학적 여성/남성 개인에게 기대하는 복장 등의 퍼포먼스를 반대하는 행위로, 정치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다음 글 참고. 아장맨 (2018.09.18.) “내가 드랙(Drag)을 하는 이유: ‘드랙킹’ 퍼포머의 정체성”, 일다. http://m.ildaro.com/8310
대학원 생활
회로: 그럼 정책을 공부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지수: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뭔가를 바꾸기 위해서 정책이 중요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어요. 예를 들어, 이화여대에서 2015년에 교육 정책과 관련해 프라임(PRIME, Program for Industrial needs-Matched Education) 사업이 이슈가 되었어요. 학생의 입장에서 국가의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책의 중요성을 많이 느낀 것 같아요.
회로: 그건 지수 님이 이화여대에 다녔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 점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과학기술중점대학교의 경우에는 전문연구요원 이슈 정도를 제외하고는 국가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편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학생회의 역할 또한 복지에 훨씬 치우쳐져 있고 학생들의 권리에 대해 대표자로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생각이 다른 대학의 학생회에 비해 덜한 것 같기도 해요.
지수: 이화여대 학생회는 전통적으로 사회 현안에 관심이 많았고, 또 이화여대가 여성들이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낼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어요. 학생들도 사회 현안에 관심이 많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편이기 때문에 총학생회를 하면서도 많은 원동력을 얻을 수 있었고요.
회로: 지수 님이 가진 문제의식을 풀어내기 위해서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하는 것 말고도 사회학을 공부하거나, 여성학을 공부하는 등 다른 선택지가 다양했을 것 같아요. 왜 굳이 과학기술정책학을 공부하기로 선택했나요?
지수: 처음에는 단순히 내가 학부 때 물리학을 전공했으니까, 과학과 관련해 정책적 측면이나 사회적 측면에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과학기술정책 대학원에 지원했어요. 처음에는 과학기술정책, 과학기술 협력사업 등에 관심이 있었는데, 저에게 가장 중요하고 제가 관심이 있는 주제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젠더 문제를 떠올렸어요. 대학원에 오고 나서 젠더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과학기술과 젠더, 여성과학기술인 정책 등에 관심이 기운 셈이죠.
여성학도 고민해보았으나, 정책을 조금 더 공부해보고 싶었어요. 정책이 일상에 끼치는 영향력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 보니 정책을 연구하고 싶었고, 과학기술에 관련된 여성정책을 공부한다는 것이 좀 더 끌렸달까요. 장학금이나 제도 등을 고려했을 때, 카이스트에서 공부와 연구를 하는 데에 장점이 크다고 생각했고요.
회로: 또 다른 진로로는, 정책을 요구하고 만드는 시민단체 활동가로서의 길도 있을 것 같아요. 정책 연구를 위해 대학원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지수: 저는 전문성을 갖고서 이야기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이화여대에 있으면서 많은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도 큰 몫을 했어요. 이화여대의 교수님들이 여러 사회 현안, 특히 여성 문제에 선두적으로 목소리를 내오신 것을 봤어요. 시민단체가 아니더라도 학교에서도 충분히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느꼈어요.
대학원에 와서 좀 더 자세히 알았지만, 여성과학기술정책에도 많은 이화여대 교수님이 기여하셨더라고요. 예를 들어 낙태죄 관련해서도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에서 열심히 연구해왔고, 여성과학기술인 문제와 관련해서도 여러 여성과학자 교수님들이 열심히 활동해오셨고요. 항상 현안에 맞추어 학계에서도 노력하시는 것을 봐왔기 때문에 현장에서만 정책에 대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런 이화여대 분위기에서 지금의 제가 자연스럽게 빚어졌다고 생각해요.
회로: 그런 분위기에서 학부를 다니다가 지금은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 진학했는데요. 대학원에 진학하고 느꼈던 변화가 있을까요?
지수: 글쎄요, 제가 젠더 문제는 제가 직접 찾아서 공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아직 큰 불편을 느끼지는 못했어요. 오히려 제가 주로 젠더 이슈에 관심 있지만, 카이스트에 와서 환경, 청년, 경영 등 다양한 이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 많이 자극받아요. 결국엔 어떻게든 연결이 될 수 있는 문제들이고, 함께 나눌 고민이 많으므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고민할 수 있는 건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회로: 요즘은 주로 어떤 공부를 하고 있나요?
지수: 젠더라는 키워드로 여러 가지 책을 읽고 있어요. 역사, 철학, 사회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요.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봤던 책은 『조선의 퀴어』라는 역사책이에요.
최근에는 포스트 휴먼(*)이라는 주제에도 관심이 생겼는데, 이 주제에 과학기술학적 관점과 철학적 관점이 처한 맥락이 달라서 다양하게 보려고요. 앞으로는 경계와 정체성 문제를 연구하고 싶어요.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서 발행하는 《과학뒤켠》이라는 잡지에 여성과학기술인 정책에 대한 글을 기고했어요. 올해 수립된 여성과학기술 정책 4차 지원 계획을 자세하게 분석해보고 싶었거든요. 3차까지의 계획과 비교하면, 현 정부 기조에 맞추어 정책 한두 개 정도가 추가되고 비전만 바뀌었을 뿐, 세부 사항들은 변화가 적고 여전히 여성학적인 관점은 많이 부족해 보였어요.
사실 ‘인력’ 정책이 사용자의 입장에서 세워지는 정책이라서 마주하는 딜레마인 것 같긴 해요. 노동정책은 노동자의 관점을 더 중시할 수 있어 젠더문제나, 실제로 여성으로서 겪는 어려움들이 더 잘 반영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반면에, 인력정책은 이런 점들을 다 고려하기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요. 젠더 문제가 더 면밀하게 다뤄질 수 있도록 과학기술계의 여성 노동자 입장에서 수립될 수 있는 ‘노동’정책과 국가 차원에서 안정적으로 인력을 공급할 수 있도록 수립하는 인력정책의 간극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성과학기술인을 과학기술의 ‘잠재가치’로 여긴다는 오래된 관점은 물론이고, 십 수 년째 여성과학기술인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아 비슷한 노력과 정책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이번 4차기본계획의 아쉬움이다. 여성과학기술인의 수를 늘리기 위해 노력한 지 어언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기본계획의 가장 주요한 골자는 여성과학기술인들의 수가 부족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과학기술에서 ‘젠더혁신’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양성평등”을 실현해내겠다고 하는 점들은 여성과학기술인 정책을 단순히 성별에 따른 인력 불균형 문제나 과학기술의 젠더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성학이나 노동의 문제와 같이 더 풍부한 사회적 담론 속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함의를 준다. (우지수, 과학뒤켠 7호, 41쪽)
회로: 과학기술정책에서 청년 과학기술인 정책과 여성과학기술인정책은 늘 인력 정책의 관점에서만 다뤄지는 것 같네요. 지금 하고 계신 연구/공부와 관련해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지수: 이러한 관심사를 어떻게 석사 논문으로 풀어낼 것인지가 제일 고민이에요. (웃음)
회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지수: <페미회로>라는 과학기술특성화대학들만의 동아리가 있다는 것을 카이스트에 와서 처음 알았는데, 정말 응원하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페미회로>가 있다는 자체로 변화를 만들 가능성이라고 생각하고요. 비슷한 특성의 학교들끼리 고민을 나눈다는 것이 큰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페미회로 회원들이 주로 생활하는 과학기술특성화대학에서는 여성이 대표자가 되는 일이나, 수적 다수가 되는 상황이 흔치 않다. 그렇기에, 흔히 남초 학과라 일컬어지는 물리학과에서 학부시절을 보내면서 한 번도 여성임을 의식해보지 않았고, 남학생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으며, 대표자가 되어 타 학교와 연대를 맺은 경험을 듣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제는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으로 적을 옮겨 신념과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과학기술인정책을 연구하는 지수님을 응원한다. 언젠가는 인력정책을 넘어 젠더정책으로도 여겨질 수 있는 여성과학기술인정책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